이 땅에 진정한 아카데미즘은 있기나 한 것인가
김덕영 독일 카셀대 교수 사회학
(출처-2014년 6월 23일 <한겨레>)
촛불 등 새 사회현상 긴 호흡 심층연구 없어
‘세월호’에 대한 분노 과학적 연구로 이어져야
종교 개혁가 루터는 얼마나 썼을까?
이론과 실천의 관계에 대해 강의할 때 내가 으레 던지는 질문이다. 이 문제는 오랜 동안 사회과학을 공부한 사람에게도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어린 시절부터 모든 것에 확실한 정답이 있다고 배우는 한국인들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학생들이나 독자들을 이해시킬 수 있을까 고민하다 만들어낸 몇 가지 예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질문이다.
이런 질문을 받으면 거의 예외 없이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인다. 루터는 실천적 개혁가이지 이론적 사색가가 아닐진대 쓴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쓴다는 것은 오히려 실천에 방해가 되지 않느냐는 식의 반응이다. ‘95개조 반박문’이면 종교개혁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루터 이야기는 조금 있다 다시 하기로 하고, 한국 사회로 눈을 돌려보자. 멀리 갈 것도 없이 세월호 참사의 경우를 보면 된다. 이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 수많은 지식인들이 다양한 매스컴을 통해 좋은 의견을 개진했다. 그리고 시민들에게 ‘분노하라’고 외쳤고 스스로도 분노했다.
이는 너무나도 지식인의 본분에 합당한 행위였다. 진정한 지식인이라면 이 경악할 사건에 침묵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다양한 관점에서 분석하고 설명을 시도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리고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세월호 참사의 전 과정이 경악 그 자체였지만, 내가 보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특히 우리를 경악하게 만들었고 분노하게 만들었다. 대통령을 위시한 수많은 국가기관이 동원되고 군과 경찰의 수많은 최첨단 장비가 동원되었지만 세월호가 수백명의 고귀한 생명을 태운 채 가라앉는데도 손 한번 써보지 못했다. 이건 한마디로 국가가 아니고 정부가 아니다. 그건 ‘페이퍼 스테이트’(paper state)요, ‘페이퍼 거번먼트’(paper government)다.
합리적인 기업 활동을 통해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탈세나 불법 외화반출을 위해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회사를 ‘페이퍼 컴퍼니’라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개인을 통제하고 인권을 탄압하는 데에는 ‘귀신’ 같지만 정작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일에는 ‘등신’과 같은, 그러니까 개인과 인간 그리고 시민의 관점에서 보면 서류상에나 존재하는 국가와 정부를 나는 페이퍼 스테이트와 페이퍼 거번먼트라고 부른다.
이런 페이퍼 스테이트와 페이퍼 거번먼트를 보고 지식인들이 시민들에게 분노하라고 말하고 자신도 분노하는 것은 백번 옳은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그들의 분노가 한국 사회에 대한 광범위하고 심층적인 연구로 이어질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과연 한국의 지식인들은 이 분노를 승화시켜 세월호 사건을 야기한 역사적·사회적 요인과 과정을 규명해내는 일에 매달릴까?
그렇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는 2008년 촛불시위와 2002년 한일 월드컵의 경험을 보면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다. 당시에도 수많은 지식인들이 대중매체를 통해 길거리 정치와 길거리 응원이라는 새로운 사회적 현상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멀리 내다보고 길게 호흡하는 연구 결과는 찾아보기가 힘든 것 같다. 촛불시위가 끝나고 한일 월드컵이 끝나면서 그들의 관심도 같이 끝나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분노가 분노에 머물지 않고 내적인 승화를 거쳐 엄밀하고 체계적인 과학적 논의와 연구로 이어지는 것, 나는 이것을 거리를 두는 참여 또는 거리를 통한 참여라고 부른다. 그리고 나는 이것을 아카데미즘이라고 부른다. 실천과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 그 실천으로부터 한걸음 물러서 냉철한 사유와 인식을 추구하며, 그 결과를 광범위하고 심층적인 연구물로 내놓는 것이 아카데미즘이다. 이 아카데미즘은 체계적·기능적으로 분화된 근대세계에서 대학이 존립하고 지식인이 실존하는 원리이자 방식이다.
다시 루터로 돌아가 보자. 루터는 어마어마한 지적 유산을 남겼다. <바이마르판 루터 전집>은 물경 127권 약 8만쪽 정도로 구성되어 있으며 126년에 걸쳐 출간되었다. 중세의 끝자락에서 근대를 사유하면서 새로운 신학적 패러다임과 신앙 형태를 구축해 종교개혁과 사회개혁을 가능하게 하려면 그만큼 방대한 양의 저작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루터가 단지 ‘95개조 반박문’만을 가지고 기존의 교회와 신학을 비판했더라면, 그것은 그저 일회적인 저항운동으로 끝났을 것이다. 왜냐하면 새로운 세계를 열려면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원리, 가치, 개념, 이론, 방법, 제도, 정책 등이 필요하며, 이는 단순히 구호나 운동 또는 저항을 통해서가 아니라 광범위하고 심층적인 지적 사유를 통해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세월호는 작은 한국호이고 한국호는 큰 세월호이다. 다시 말해 이번 세월호 참사는 체계적·기능적으로 분화되지 못한 한국 근대화의 갈등과 모순이 비극적으로 표출된 것이다. 그런데 이 비근대성, 아니 반근대성에는 대학과 지식인도 포함된다. 진정한 아카데미즘을 확립하지 못한 채 대중매체의 논리에 휘둘려 ‘텔레페서’ 수준의 발언으로 끝나는, 그리고 이것을 현실참여라는 명분으로 포장하는 것은 분명 합리적인 지식생산의 모습이 아니다.
김덕영 카셀대 교수
한국에서 아카데미즘을 가로막는 요인은 그밖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먼저 대학과 교수들이 프로젝트에 목을 매고 그 결과를 A4 용지 10매 정도의 논문으로 포장한다. 인문사회과학은 시가 아니라 소설이다. 그것도 장편소설 또는 대하소설이다. 아니 시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서사시, 대서사시가 되어야 한다. 또한 미국 학위, 영어강의, 영어논문에 목을 맨다. 오늘날의 한국의 대학과 지식인 사회는 미국에 대하여 ‘분리불안’, 아니 ‘유기불안’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어린아이가 어머니로부터 떨어질까 봐 불안해하듯이! 아니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을까 봐 불안해하듯이! 마지막으로 출판사들이 점점 더 전문 연구서를 외면하고 교양서 출판에 치중함으로써 우리 사회 전체의 인식과 사유를 천박하게 만들고 있는 것 같다. 이 점에서는 인적, 재정적, 조직적 자원이 풍부한 대형 출판사들이 앞장서고 있다.
세월호 참사는 일어난 지 두 달이 지나면서 서서히 잊혀가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4년에 한 번 돌아오는 월드컵 시즌으로 인해 그에 대한 관심이 ‘침몰’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대학과 지식인은 세월호 사건을 치열한 연구의 대상으로 전환함으로써 이 비극적 사건에 대한 관심을 결코 침몰시키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