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화의 내 인생의 책] 이이화 | 역사학자
▲ 임꺽정 | 홍명희
문학소년 뒤흔들어 놓은 금서
나는 한때 문학소년의 시절을 보냈다. 그때 홍명희가 쓴 <임꺽정>을 읽었다. 홍명희가 월북한 탓으로 이 책이 금서로 지정돼 구하기가 어려웠다. 해방 직후에 나와서 종이도 거무튀튀했고 인쇄도 희미했다. 임꺽정은 조선 전기에 실존한 백정 출신의 의적이었다. 조선시대에 백정은 벼슬자리에 나갈 수 없었고 차별과 천대를 받았다. 아버지가 백정이면 아들도 백정이 되어야 했다.
소설에 등장하는 임꺽정은 이런 천대에 맞서 떼를 지어 관가에 대항하고 부정한 재산을 빼앗아 빈민에게 나누어주는 의적이었다. 그의 의적 활동이 화려하기도 했지만 신출귀몰한 지략으로 서울에 잠입하기도 하고 포도청의 눈을 속여 좀체 잡히지 않는다.
게다가 그의 부하들 속에는 의리의 사나이와 간지가 넘치는 인간군이 어울려 조연을 거들고 있었다. 개성이 강한 인간들이 어우러져 있었고 구수한 토속의 언어를 구사하기도 했고 산골의 정경을 실감나게 그리기도 했다. 나도 작가가 되어 이와 같은 역사소설을 써보겠다는 의욕이 일어났다. 감수성이 예민한 소년의 정서를 흔들어 놓았다. 역사공부를 하면서 다시 읽어보니 군데군데 역사 사실과 맞지 않는 부분과 표현이 있었으나 감동은 어릴 적 읽을 때와 다름이 없었다.
1990년대 민주화 열기를 타고 월북 작자의 작품이 금서에서 풀렸다. 어느 출판사에서 이 소설을 정리해 해설을 곁들여 펴냈다. 새로 출간된 책을 나의 역사지식을 동원해 분석하면서 읽었는데 감동은 여전했다. 나는 평생에 후회되는 일 한 가지를 들어보라는 제목으로 에세이를 쓸 적에 역사 대중화를 위해 사실과 픽션이 어우러진 역사소설을 쓰지 못한 걸 후회한다고 했다. 그 모델이 소설 <임꺽정>이었다. 이제 늙어서 역사소설을 쓰겠다는 꿈은 접었지만 소년시절에 겪은 감동 어린 추억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2014년 3월 17일자 [경향신문])
▲ 오하기문 - 황현
균형 잡힌 동학농민군 기술
나는 30대부터 동학농민혁명 연구에 몰두했다. 연구를 거듭할수록 빈곤한 사료에 아쉬움을 지울 수가 없었다. 관군의 기록은 토벌 사실만을 늘어놓았고 유림들이 쓴 기록은 역적으로 규정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동학농민군의 기록으로는 격문 등 몇 종류만 전해질 뿐이다.
나는 동학과 관련한 사실을 짧게 담은 황현의 <매천야록>을 읽을 적에 자세한 기록은 <동비기략>에 있다는 주석을 보고 나서 이 자료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다가 어느 인사가 국사편찬위원회 도서실에 황현이 쓴 이 관련 자료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국편 도서실을 샅샅이 뒤진 끝에 <오하기문>을 찾아냈다. 이 책은 필사본을 복사한 것이다. 국편에서 황현의 <매천야록>을 출간할 적에 수집했다고 전해진다.
나는 이 책을 독파하면서 많은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 책에서는 김씨, 민씨의 세도정치의 부정과 비리를 신랄하게 지적하고 수령 아전의 횡포를 폭로했다. 또 흥선대원군과 민비 사이에 벌어진 갈등도 실감나게 기술했다. 그러고서 동학농민군 활동을 자세하게 연대기로 기술했다. 여기에는 동학농민군의 포고문과 일화 등 귀중한 사료가 수록되어 있다.
황현은 양비론의 관점에서 동학농민군의 잘못도 지적했다. 특히 김개남이 남원을 중심으로 양반 토호를 징치한 전말과 김인배가 섬진강을 중심으로 순천 광양 진주에서 활동한 모습은 다른 기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사실을 알려준다. 스토리텔링의 수법으로 엮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은 동학농민혁명의 통사는 아니지만 중앙 정계의 동향과 의병활동도 기술했다. 그래서 오늘날 연구자들의 기본 사료가 되고 있다. 이를 통해 역사 기록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우게 한다. 황현은 이 책을 쓰고 나서 아편을 마시고 순절했다.
▲ 허균의 생각 | 이이화
억압의 시대에 재발견한 허균
내가 저술활동을 시작하면서 첫 책으로 <허균의 생각>을 냈다. 나는 역사학도로서 많은 역사 인물의 문집을 뒤지면서 허균의 시문집인 <성소부부고>를 찾아냈다. 호민론이란 짧은 논설을 읽으면서 눈이 번쩍 뜨였다. 그 글에서 민중을 항민, 원민, 호민으로 분류했는데 그 첫머리에 “백성은 호랑이나 홍수보다도 더 무섭다”고 했다.
이어 항민은 아무런 의식이 없이 내 팔자라고 여기고 그저 부림을 받는 부류라 했고 원민은 왜 내가 압제를 받아야 하나라고 여기면서 기회만 닿으면 몽둥이를 들고 무도한 자들에게 대들려는 부류라고 했다. 이와 달리 호민은 세상 돌아가는 정세를 살피다가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자고 외치면 원민은 몽둥이를 들고 달려오고 항민도 살길을 찾아 호응한다고 했다. 이렇게 되면 세상이 뒤집어진다는 것이다.
그는 혈연이나 지연을 가리지 말고 인재를 고르게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글 ‘유재론’을 쓰기도 했고 유학자들의 허위의식을 설파한 ‘군자론’ 등도 썼다. 시를 지을 적에도 형식보다 뜻을 중시해야 한다는 논지를 펴기도 했다. 그의 글에서는 독창성과 개혁의지가 곳곳에 번득였다. 그는 이런 의지를 담아 <홍길동전>을 썼던 것이다. 당시 홍길동의 저자 허균의 작가론에서는 거의 그의 선진적 사상에 대해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였다.
그의 삶도 단순치 않았다. 그는 벼슬아치나 선비들보다 불평에 찬 시인 화가나 서자나 중들과 어울리고 도움을 주었는데 마침내 역적의 누명을 쓰고 죽었다. 나는 이런 사실을 내 책 속에 모두 담았다. 나는 신군부가 시퍼렇게 날뛰는 시기에 <허균의 생각>을 집필해서 뿌리깊은나무에서 펴냈는데 한때 금서목록에 오르기도 했다. 그래도 이 책이 나오자 독자의 반응이 뜨거웠다. 나의 첫 책은 허균을 팔아 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2014년 3월 21일 [경향신문])
그밖에
▲ 조선혁명선언 | 신채호 - 기개로 쓴 일체 항쟁 선언
▲ 한국혼 | 신규식 - 민족혼·독립정신을 설파하다
[내 인생의 책] 김진애 | 도시건축가·(사)인간도시컨센서스 공동대표
▲ 인간의 조건 | 한나 아렌트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하라
특수한 악인이 악을 저지르는 게 아니라 생각 없는 사람들이 악을 저지른다는 ‘악의 평범성’ 개념으로 사람들을 뜨끔하게 만든 한나 아렌트(1906~1975)는 이 책에서 근원적인 인간의 조건을 세 가지로 정의한다.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action).
쉽게 풀자면, 생명체인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필연적으로 노동하고, 죽기 마련인 인간은 영원성을 꿈꾸며 작업에 몰두하고, 타인과 살아가야만 하는 인간은 소통의 행위(즉, 정치)를 통해 존재의 의미를 찾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만든다. 인류 역사상 이 세 가지 조건을 어떻게 규정하느냐가 개인 삶의 과제이자 사회의 과제이다.
그런데 노동의 가치는 자칫 무시되고, 작업은 자칫 맹목적으로 변질되며, 의미를 찾으려는 소통 행위는 자칫 억압되고 통제된다. 아렌트는 이를 예방하기 위해 생생하고 활력 넘치는 공공 영역을 강조한다. 생각하고 소통하고 참여하고 열려 있는 ‘폴리스(polis)’가 건강한 인간의 조건을 만들고, 세계 사랑(Amor Mundi)의 기초가 된다는 것이다.
유학 시절에 정치학, 경영학, 도시학 등의 강좌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 책을 만나서 서론을 읽는 순간 ‘번쩍’ 하는 충격을 받았다. 아렌트의 지적 배포에 감탄했고 그의 비판적이면서도 긍정적인 실천 태도에 감동을 받았다.
최근 더 자주 이 책을 연다. 속절없이 무너지는 인간의 조건을 더 극심하게 목격하기 때문이다. 점점 더 소외되는 노동의 가치, 가속되는 부익부 빈익빈, 탐욕적인 자본, 억압적인 권력, 생각 없는 언론, 외마디 단어만 무성한 정부, 불통의 정치 등. 우리 사회에 전체주의의 망령이 다시 살아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하랴? 부디, 인간의 조건을 성찰하며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하라! (2014년 3월 24일 [경향신문])
▲ 토지 | 박경리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깨치다
<토지>를 드라마로 본 사람과 축약본으로 본 사람과 원작을 읽은 사람은 분명 다를 것이다. 한 번 읽은 사람과 여러 번 읽은 사람은 또 다를 것이다. 원래 다른 사람들일까, 책을 읽고 달라졌을까? <토지>를 간절하게 읽은 사람들은 어딘가 좀 다르다. 감히 표현하자면, ‘박경리스럽다’. 고통 속에서 자존심 높고, 슬픔 속에서 아름답고, 기가 서려 있다.
절망에 맞닥뜨렸을 때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나라 잃고, 고향 잃고, 가문이 무너지고, 가족 잃고, 사랑 잃고, 재산을 뺏기고, 가난에서 벗어날 길 없고, 신분의 굴레는 지긋지긋하고, 탐욕의 악행에 진저리쳐지고, 어디 하나 믿을 데 없을 때, 포기할 것인가, 좌절할 것인가, 방어할 것인가, 저항할 것인가, 도전할 것인가? 박경리 작가의 의문이었고, 우리의 의문이다. 일제강점기 시대를 살았더라면 우리 각자는 어떤 선택을 하였을까?
그 절망 속에서도 <토지>는 너무 아름다워서 더 슬프다. 강은 도도하고, 산은 깊으며, 음식은 맛깔스럽고, 사투리는 뚝뚝 정이 묻어나고, 이별은 또 다른 사랑이며, 바라볼 수 없는 사랑은 절절하여 더 아름답다. 나는 <토지>를 통해 우리의 마을과 건축의 아름다움을 깨쳤다. 어떤 이는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어떤 이는 우리 산하의 아름다움을 깨쳤다고 한다.
펑펑 울었던 장면을 떠올려본다. 멀리 일 떠났던 용이가 돌아오자 그제사 그 품에서 숨을 거두는 월선이, 진달래 화전을 부쳐주고 싶다던 별당아씨, 어둠 속에서 짐승처럼 부르짖던 구천이, 키운 아들과 못 키운 아들 사이에서 흔들리는 윤씨 부인의 눈길, 사랑은 왜 이리 아픈가?
그 절망의 시대에 가슴에 칼을 품고 자신의 선택을 했던 서희와 길상의 화해를 그린다. 해방과 더불어 비로소 자신을 옭아맸던 가슴속 쇠사슬을 풀어버린 서희에게서 작가 박경리의 영혼을 본다. (2014년 3월 25일 [경향신문])
▲ 올란도 | 버지니아 울프
남녀 넘나들며 살아 보면 어떨까?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라는 제목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만으로도 고통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진실을 맞닥뜨리는 고통이다.
판타지 소설 같은 <올란도>를 울프가 썼다는 게 안 믿어지기도 하고 또 그럼직도 하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총애를 받던 꽃소년이 성별을 바꾸면서 300년 동안 사는 이야기다. 남자일 때는 자유 연애에 매혹되는가 하면, 여자로 바뀌어서는 호혜적 차별을 즐기다가 재산 상속권이 없다는 사실에 경악하여 사랑 없는 결혼까지 하고, 여성의 인격권에 대한 법정 투쟁을 거치고 나서야 자유를 얻는다. 투표권은커녕 상속권도 없고, 작가 대접은커녕 자비 출판까지 해야 하고, 결혼해야 제도권에서 인정받던 시대를 살던 작가는 얼마나 속을 끓였을까?
다시 태어난다면 어떤 성으로 태어나고 싶은가? 대체 남자는 무엇이고 여자는 무엇이냐? 여성과 남성은 역지사지하지 못하는 태생적 한계가 있는가? 남자 속의 아니마, 여자 속의 아니무스를 어떻게 넘나들까? 양성성을 어떻게 껴안을까? 지금도 계속되는 의문이다.
울프의 작품 중 가장 대중적이지만 이 소설을 읽어내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면 영화로 봐도 좋다. <설국열차>에 나오는 틸다 스윈턴이 남성과 여성을 자연스럽게 오가며 올란도를 연기한다. 내친김에 <디 아워스>를 봐도 좋다. 울프를 사로잡았던 고통이 어떤 것인지 시대를 넘나들며 섬세하게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내 인생의 책’으로 추천한 5권은 모두 여성 작가의 책이다. 이 여성 작가들은 남자 여자를 넘나들며 올란도처럼 살아보면 어떨까 한번쯤은 상상해봤을 것 같다. 그런데, 남성 작가들은 그런 상상 안 해보나? (2014년 3월 28일 [경향신문])
그밖에
▲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 | 제인 제이콥스
▲ 7년의 밤 | 정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