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책
김제동 | 방송인
▲ 일기일회 | 법정
내 화두는 ‘고독 속 더불어 살기’
얼마 전부터 이 책을 다시 읽고 있다. 법정 스님의 법문을 모아 놓은 이 책을 보노라면 벚꽃이 흩날리는 날 길상사 법당 옆 나무 밑에 자리 깔고 앉은 수백명의 사람들이 눈에 선하다. 스님은 떠나시기 전 말빚, 글빚을 지지 않겠다고 하셨는데 그 글 덕분에 요즘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스님의 책에는 날카로운 사회 비판도 있고 사람들을 향한 가늠할 수 없는 깊은 애정도 있다. 혼자 계시면서도 늘 사람들을 걱정하던 모습이 법문 곳곳에 나타난다. 외람되지만 어떻게 하면 홀로 있을 때 고독감을 덜 느끼고, 스님처럼 내부의 에너지를 사람들에게 돌릴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요즘 내 화두다. 그래서 한편으로 법정 스님의 그런 부분이 무척 부럽기도 하다. 따뜻한 자비와 매서운 가르침을 어쩌면 그리도 조화롭게 베푸셨는지 무척 닮고 싶다.
스님은 법문 곳곳에서 끊임없이 화두와 질문을 던지라고 하신다. 나는 누구인지, 어디 있는지, 어디쯤 와 있는지 물어보라신다. 어렵고 무겁고 추상적인 주제 같다가도 가끔 이런 질문을 내게 던져보면 아주 세세한 내 감정의 결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요즘 느끼는 외로움의 밀도는 많이 깊어졌다. 그렇지만 예전처럼 많이 슬프지는 않다. 예전엔 외로우면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외로운 내가 멋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이렇게 살아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홀로 있음의 자유를 만끽하고 싶기도 하지만 누군가로부터 소속감과 함께 지지와 격려를 받고 싶기도 하다. 이 두 가지가 조화되면 좋겠지만 둘 중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
이처럼 상반되는 감정을 오가며 어느 하나 놓지 못하는 내 감정을 바라보는 일에 이 책은 꽤 많은 도움을 준다. 그나저나 이러다 출가하게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하긴 출가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건 아닐 거다. (2014.4.1 경향신문에서)
▲ 태백산맥 | 조정래
- ‘산맥’에 오르니 딴 세상이 보였다
나는 이 책을 서른이 넘어서야 읽었으니 상당히 늦게 접한 편이다. 그전에 영화로도 봤고 워낙 명성이 자자한 책이라 한번쯤은 읽어봐야겠다는 생각만 막연히 갖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이 책을 읽어볼 수 있었다. 책을 잡는 순간 나는 1권부터 10권까지 멈추지 못하고 내쳐 읽었다.
이야기의 흡인력이 엄청난 데다 작가의 그 감칠맛나는 말의 맛이 사회자라는 직업을 갖고 있던 내게 쏙쏙 다가왔다. 물론 직업적인 이유를 들기 이전에 이 작품이 내게 준 충격은 대단했다. 어린 시절부터 배우고 듣고 알고 믿어왔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사실들을 이 책은 일깨워줬다. 혹자들은 나를 ‘좌빨’이니 뭐니 하면서 쑥덕거리기도 하는데, 그렇다. 이 책은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을 바꾸게 했고 역사인식의 전환점을 마련해 주었다.
우리는 매일 뉴스를 통해 많은 사건들을 접한다. 과거 체첸사태니 혹은 무슨 사건으로 20만명이 죽었다느니 하는 소식을 들으면 그저 하나의 뭉뚱그려진 사건으로 여기고 넘기기 마련이다. 그런 사건들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개인이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는지, 그 사건이 한 인간을 얼마나 철저히 망가뜨리는지는 제대로 생각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런 사건 하나하나가 개인의 삶에 어떤 형태로 파장을 일으키는지 잘 드러내 보여준다. 게다가 한 인간이 어떤 생각을 갖고 사느냐에 따라 다른 사람과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깊이 생각하게 해준다.
그동안 힘 있는 사람들이나 집단이 공동선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추진하고 몰아쳤던 정책들이 얼마나 많은 개인들을 짓밟았는가. 그들이 만들어놓은 이념 때문에 얼마나 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희생되었나. 그들은 합리성과 정당성을 갖고 그 이념에 따라 살아가고 행동한다지만 무고한 피와 눈물을 짜내는 그런 이념이라면 무슨 쓸모가 있겠나. (2014.3.31 경향신문에서)
▲ 인간 붓다 | 법륜
붓다와 예수, 서로 통하더라
이 책은 그전에 몰랐던, 너무도 놀라운 사실을 알려줬다. 부처님에게 아들과 아내가 있었다는 것, 게다가 수백 명에 이르는 첩까지 있었다는 것도 말이다. 부처님이기 이전에 무술에 능한 왕자였다는 사실도 말이다. 더 재미있는 것은 출가 의사를 밝히자 아들 하나만 낳아주고 출가하라는 부모의 요청을 받들었다는 점이다. 이 부분에서 뭐랄까 인간적으로 참 힘들었겠다 싶은 안타까움과 함께 친근하고 재미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렵고 멀게만 느껴졌던 인간 붓다는 지극히 매력적이고 인간적인 인물이었다. 출가 전에 그를 둘러쌌던 온갖 세속의 즐거움과 쾌락은 아버지 슛도다나왕이 왕자의 출가를 막기 위해 짜낸 방편이었지만 그는 결국 이를 뒤로 하고 출가의 길에 오른다. 출가의 계기가 됐던 ‘사문유관’을 통해 그는 인생의 고통과 불행의 굴레에 대해 깊은 의문을 가졌다.
이 책을 보면서 인간 예수, 독립운동가로서의 예수, 청년혁명가로서의 예수에 대해서도 많이 찾아보게 됐다. 붓다와 예수를 잇는 인간적인 유대와 연대감도 새롭게 느끼면서 두 분 사이에 깊은 유사성도 발견하게 됐다.
붓다는 수많은 기득권을 버렸다. 자기 것을 내려놓고 스스로 가난과 청빈을 선택했다. 그리고 세상을 품었다. 예수는 가장 빈약하고 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낮은 곳에서 올라가 그 역시 세상을 품었다. 처음 출발이 상반되지만 결국 같은 길을 갔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붓다는 자비를 강조했다. 자비란 함께 아파하고 슬퍼한다는 뜻 아닌가. 자비의 결정판을 보여준 이는 예수다. 자신의 몸을 창으로 찌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셨던가. 다른 시대를 살았던 위대한 두 인물의 삶을 나름대로 비교하며 그들의 가르침을 새길 수 있는 계기가 됐다. (2014.4.4 경향신문에서)
그밖에...
▲ 불안 | 알랭 드 보통 - 연예계 초창기 강박증 치료약
▲ 사랑해 | 허영만 - 웃기면서 날카로운 교훈 김제동
내 인생의 책
서수민 | 방송 프로듀서
▲ 오래된 서울 | 김창희·최종현
- 오래된 것이 주는 뜨거움
지난해 말 <개그콘서트> 제작에서 물러날 때까지, 나는 책을 그다지 많이 읽지 않았다. <1박2일>의 책임프로듀서를 맡은 후부터 프로그램의 큰 그림을 그려야 할 때는 책을 집는다.
‘책 읽기’는 <1박2일> 유호진 PD가 생각이 안 풀릴 때 주로 쓰는 방법이다. 후배지만 그 모습이 좋아 보였다. 그래서 나도 책을 늘 한두 권 갖고 다니며 읽곤 한다.
<오래된 서울>은 지난 설 서울여행 특집을 기획하면서 읽었다. 그저 ‘오래됐다’는 사실만으로 잔향을 주어왔던 공간에 대한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이다. 그 공간을 살아낸 몰랐던 사람들의 온기와 표정들이 있다.
책은 주로 서촌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데, 구한말을 거쳐 1950년대까지 격변의 역사 속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왕자 시절의 세종대왕부터 친일파 윤덕영의 벽수산장과 독립운동가 김가진의 백운정, 천재시인 이상의 집까지…. 공간에 묻어 있는 시대의 열기가 뜨거웠다.
책에서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부분이 둘 있다. 우선 지금은 사라진 ‘벽수산장’의 사진이다. 벽수산장은 초가집 천지였던 당시 서촌 한쪽에 우뚝 솟아 있던 프랑스식 건물이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기괴하면서 폭력적인 건물은 지금 기둥 몇 개만 남았다. 이 친일파의 집 사진에서 그 시절의 광기가 그대로 느껴졌다.
두 번째는 변동림이라는 인물이다. 화가 구본웅의 이모로 그의 친구 이상과 마지막 3개월을 함께한 사람. 이후 화가 김환기와 결혼해 환기미술관을 만든 사람. 현실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두 명의 천재와 산 여인의 이야기가 무척이나 흥미롭다.
<1박2일-서울여행> 편을 시작하게 해준 건 김주혁 부모님의 사진 한 장이었다. 어머니는 아들의 프로그램을 위해 몰래 간직하던 청춘 시절의 데이트 사진을 꺼내주셨다. 그냥 흑백사진 한 장이었지만 사진엔 온기가 있었다. 뜨겁고 설레었던 청춘의 시간을 담고 있는 그 사진처럼, <오래된 서울>에는 온통 뜨거움이 가득하다. (2014.4.7 경향신문에서)
▲ 조선희의 영감 | 조선희
- 교훈과 영감을 주는 그 무엇
사진작가 조선희와 나는 연세대 재학시절 사진 동아리를 같이 했다. 나는 1990년대 초반 당시 돈으로 60만원 하던 수동 카메라를 살 여유가 없었다. 결국 나는 사진을 접고 연극반으로 옮겼고 조선희는 끝까지 사진을 하겠다고 남았다. 나는 PD가 됐고 조선희는 사진작가가 됐다.
사진으로 밥을 벌어먹는 일은 쉽지 않다. 그래서 동아리 일만 해서는 사진을 계속 찍기 어렵다. 당시 조선희는 이화여대 앞 웨딩숍들을 찾아다니며 “나를 써 달라”고 홍보했다. 1994년인가, 한 군데서 연락이 와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곧 환불해주고 말았다.
이유는 신부의 시아버지가 조선희의 신부 사진을 보더니 “기본이 안 됐다”고 혹평했기 때문이다. 당시 웨딩사진에는 규격화된 수치가 있었다. 하지만 조선희는 과감하게 이를 벗어났다.
그는 당시에 피사체로부터 받은 ‘영감’을 사진에 반영했다. 화려한 이미지의 신부는 화려하게 찍었고, 파격적인 구도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돈을 환불해줄 수밖에 없어 내게 술을 먹고 푸념하던 기억이 난다.
조선희의 사진집 <조선희의 영감>을 읽었다. 그리고는 사진작가가 된 친구 영감의 원천을 봤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사물과 풍경 하나도 조선희의 사진을 거치면 의미있는 사진으로 다시 태어났다. 늘 감각을 열어놓고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영감을 담아내는 능력이야말로 PD인 나에게 중요하다. 고민해봤다. 어떻게 하면 계속 좋은 영감을 떠올릴 수 있을까. 결국은 내가 얼마나 열려 있느냐의 문제다. 사람과 일상의 이야기들은 어느 순간 틀림없이 의미를 품는다. 다만 이를 흘려보내지 않고 잡아내기 위해선 마음이 늘 열려 있어야 한다. 그래야 뭐든 들어와서 내 안에 살 수 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친구 조선희는 끊임없이 영감을 주는 사람이다. 가만히 있지 않는 그의 일상과 순간에 대한 집요함이 내겐 무엇보다 큰 교훈과 영감을 준다. (2014.4.8 경향신문에서)
▲ 작은 새가 온 날 | 이와사키 치히로
- 임신 스트레스 날려준 선물
1995년 입사해 1997년에 결혼을 했다. 그리고 첫 아이를 2003년에 낳았다. 결혼을 하고도 꽤 오래 아이를 갖지 않고 지낸 셈이다. 내 시간을 관리할 수 있는 메인PD가 돼야 아이를 키울 수 있다는 생각에 출산을 미뤄왔다.
하지만 아이는 한 번에 찾아오질 않았다. 당시 서른을 넘어버린 나이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적지 않은 스트레스가 왔다. 내 고민을 옆에서 보던 작가가 생일선물이라며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생뚱맞게도 그림책이었다. 나이 서른에 그림책이라니…. 그런데 그림이 너무나 예뻤다.
<작은 새가 온 날>은 어느 소녀에게 작은 새가 찾아와 행복한 시간을 함께 보낸다는 내용이다. 그해의 나는 이 책 때문에 설레는 마음으로 아기를 기다리게 됐고 그해 9월 예쁜 첫 아이를 얻었다. 무뚝뚝한 나와 일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내 마음을 읽어 선물해 준 작가에게 부끄러움과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결국 욕심을 내려놓으니 인생 최고의 행운이 내 곁에 찾아왔다. 결혼을 하고 일을 하면 가장 큰 걱정이 아이문제다. ‘잘 키울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면 아이를 위해서라도 낳지 않는 게 맞지 않을까’ 등 많은 생각이 들었다.
책은 운명처럼 찾아온 작은 새를 보며 소녀처럼 기뻐하고 감사하라고 일러줬다. 진심을 다해 놀아주고 웃어주며 보살피기로 했다. 작은 새는 언젠가 내 곁에서 날아가겠지만, 그때까지 잘 보듬어 줘야겠다는 생각으로 책을 버리지 않고 꼭 품고 다녔다.
책에서는 둥지를 떠나 날아갔던 새가 더 많은 새들을 데리고 다시 찾아온다. 하지만 새들을 반기는 주인공은 여전히 ‘소녀’다. 나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할머니 싸움닭이 돼 아이가 데려오는 남편후보를 이리저리 재고, 용돈을 푸념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 난 이 책을 꺼내 보련다. 내 인생을 밝고 의미 있게 만들어준 작은 새를 생각하며. (2014.4.10 경향신문에서)
그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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