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기쁨 - 제4장
제 4 장
복음화의 사회차원
176. 복음화를 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나라를 세상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풍부함, 복잡함, 역동성을 갖는 복음화의 실체를 포기하려는 모든 시도, 곧 복음화를 부분적으로 혹은 단편적으로 정의하는 모든 시도는 결국 복음화를 메마르게 하고 왜곡하기까지 할 뿐입니다.” 저는 이제 복음화의 사회적 차원에 관한 저의 관심을 나누고 싶습니다. 이 사회적 차원이 적절하게 실현되지 않는다면, 복음화 사명이 갖는 참된 통합적 의미를 왜곡할 위험이 항상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I. 공동의 반향을 일으키는 케리그마, 사회의 반향을 일으키는 케리그마
177. 케리그마는 분명한 사회적 내용을 갖습니다. 복음의 핵심에는 다른 이들과 결합된 생활과 공동체 생활이 있습니다. 첫 선포의 내용은 분명히 사랑에 중심을 둔 도덕적 함의를 갖고 있습니다.
신앙고백과 사회에 대한 헌신
178. 무한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한 분 아버지를 믿는다는 것은 “그 사랑으로 모든 사람에게 무한한 존엄성을 주신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인간의 몸을 취하셨음을 믿는다는 것은 각 사람이 하느님의 바로 그 사랑에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셨음을 믿는다는 것은 각 사람을 고결하게 한 무한한 사랑에 대한 의심을 없애는 것입니다.
그분의 구원은 사회적 차원을 갖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개별 인간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사회적 관계들까지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모든 사람 안에서 활동하신다고 믿는다는 것은 그분께서 모든 인간 환경과 모든 사회적 유대를 꿰뚫으려 하신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성령께서는 성심의 무한한 창조력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심은 인간사의 매듭이 아무리 복잡하게 엉켰더라도 그것을 어떻게 풀 수 있는지를 압니다.”
복음화는 성령께서 하시는 이 해방의 활동에 협력하기 위한 것입니다. 신비 자체인 삼위일체는 우리가 거룩한 친교의 이미지로 창조되었고, 그래서 순전히 우리만의 노력으로 완성과 구원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을 환기시켜 줍니다. 우리는 복음의 핵심에서 복음화와 인간적 진보 사이의 깊은 연계를 봅니다. 인간적 진보는 반드시 복음화의 모든 활동에서 그 표현방식을 찾고 전개되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선물이신 바로 그 사랑으로 다시 그분을 사랑하라고 초대한 첫 선포를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의 생활과 행동에서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응답을 가져옵니다. 그 응답이란 이웃의 선익을 열망하고, 찾고, 보호하는 것입니다.
179. 구원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것과 참된 형제적 사랑 사이에는 이렇게 분리할 수 없는 유대가 있습니다. 이 유대는 여러 성경 본문에 나타나는데, 그 본문의 중요성을 알기 위해서는 그 모든 본문을 잘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 본문의 메시지가 우리의 생활과 우리의 공동체에 실제적인 결과를 낸다는 것을 확실하게 찾아내지도 않은 채, 그냥 당연하다고 간주하거나, 거의 기계적으로 반복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해롭습니까! 왜냐하면 그 때문에 우리는 놀라움, 흥분, 형제애와 정의의 복음을 살려는 열정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의 형제와 누이가 우리 각자를 위한 육화의 연장임을 가르칩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마태오 25,40) 다른 이를 대하는 태도는 초월적 차원을 갖습니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마태오 7,2)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자비에 상응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죄어 너희 품에 담아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36-38)
이 구절이 분명히 밝힌 것은 모든 도덕률의 기본이 되는 위대한 두 계명 가운데 하나로서, 또 완전히 거저주신 하느님의 선물에 부응하는 영적 성장을 식별하기 위한 가장 분명한 표지로서, “우리 자신에게서 나와서 우리 형제와 누이를 향해 가는 것”을 절대적 우위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사랑의 봉사는 교회 사명의 구성요소이며, 교회가 교회임을 드러내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 본성으로 선교의 교회입니다. 교회에는 이해하고 지원하고 촉진하는 동정과 효과적인 사랑이 많습니다.
하느님 나라와 그 도전
180. 성경을 읽어보면 복음이 단순히 우리와 하느님 사이의 개인적인 관계에 관한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의 응답은 단순히 궁핍한 개인들에게 우리의 작은 인간적 몸짓으로 나누어 주는 행동으로, 일종의 “메뉴에 따른 사랑”으로, 혹은 오직 우리의 양심을 편하게 하려는 일련의 행동들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복음은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것입니다.(루카 4,43 참조) 복음은 이 세상에서 통치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에 관한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 가운데서 통치하시는 그만큼, 사회생활이 보편적 형제애, 정의, 평화, 그리고 존엄을 위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적 가르침과 생활은 모두 사회에 영향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찾고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오 6,33) 예수님의 사명은 당신 아버지의 나라를 시작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오 10,7)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라고 명령하십니다.
181. 우리 가운데 이미 와 있으며 자라고 있는 그 나라는 우리 존재를 모든 차원에서 끌어들이고, 바오로 6세가 참된 발전에 적용한 식별의 원리를 환기시킵니다. 참된 발전은 “인간 전체와 인류 전체”를 위한 것이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만일 복음화가 복음과 인간의 구체적인 생활과의 상호활동, 즉 복음과 개인적 생활과 사회적 생활 사이에 지속하는 상호활동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복음화는 완전한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에 내재된 보편성의 원리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는 모든 사람의 구원을 바라시며, 그분의 구원 계획은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 데 모은 것”(에페소 1,10)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기”(로마 8,19) 때문입니다. 여기서 “피조물”은 인간 생활의 모든 측면을 말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사명은 보편 목적을 갖습니다. 사랑의 그 명령은 실존의 모든 차원, 모든 개인, 모든 공동체 생활 영역, 그리고 모든 백성을 포함합니다. 인간적인 것 어느 것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종말론적 왕국을 찾는 그리스도교적 희망은 항상 역사를 일으킵니다.
사회가 제기하는 물음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182. 불확정적인 상황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은 새로워지고 발전해야 하며, 또한 토론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교회의 주요 사회원리들이 그저 아무에게도 도전하지 않는 일반적 원칙들로 남지 않으려면, 반드시 - 자세하게 다루지 않더라도 - 구체적이 되어야 합니다. “복잡한 현 상황에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실질적 결론을 이끌어낼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의 목자들은 다른 학문의 도움을 받아서 백성의 삶에 영향을 주는 모든 것에 대해 의견을 제시할 권리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복음화 과업은 각 인간 존재의 통합적 발전을 포함하고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사적 영역에 제한되어야 한다고, 종교는 오직 천국을 위해 영혼을 준비시키기 위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 자녀가 이 세상에서도 행복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비록 영원성에서 그 행복을 충족시킬 수 있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누리게 하기 위해”(1티모테오 6,17), ‘모든 사람’이 누리도록 모든 것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적 전환은 “사회질서와 공동선 추구와 관련된” 생활의 그 모든 영역과 측면을 특별히 검토할 것을 당연히 요구합니다.
183. 따라서 누구도 종교는 사회생활과 국가생활에 영향을 주지 말고, 시민제도의 건전함에 관심을 기울이지 말고,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사건에 의견을 밝힐 권리가 없는 것으로서, 개인 생활의 내적 지성소에 귀속되어야만 한다고 요구할 수 없습니다. 누가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나 캘커타의 복자 데레사의 메시지를 교회와 침묵 속에 가둬야 한다고 주장하겠습니까?
진정한 신앙은 - 절대로 편안하거나 순전히 개인적일 수 없는데 - 항상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열망을, 가치를 전하려는 열망을, 우리가 발견한 그 어떤 좋은 것을 이 세상에 남기려는 열망을 포함합니다. 우리는 이 장엄한 행성을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행성에 우리를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비극과 투쟁, 희망과 열망, 강함과 나약함을 모두 지니고 이곳에 머무는 인류가족을 사랑합니다.
지구는 우리의 공동 가정이며, 우리 모두는 형제이며 누이입니다. 만일 정말 “정치의 주요 책임이 사회와 국가의 공정한 질서를 세우는 것”이라면, 교회는 “정의를 위한 싸움에서 비켜나 있을 수도 비켜나서도 안 됩니다” 사목자들을 포함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는데 관심을 기울여야만 합니다. 그것은 핵심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은 무엇보다도 긍정적이기 때문입니다. 즉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은 제안을 하고, 변화를 꾀하며, 그런 의미로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마음에서 태어난 희망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동시에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은 “교리의 성찰 단계든 실천 단계든 사회 분야에서 다른 교회들과 교회 공동체들의 헌신”을 결합시킵니다.
184. 지금 이 자리에서 오늘날 세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근심스러운 많은 사회 문제들을 자세하게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저는 그 가운데 일부를 제2장에서 다루었습니다. 이 ‘교황 권고’는 사회문헌이 아닙니다. 다른 여러 주제에 관한 성찰을 위해서 우리는 <간추린 사회교리>(Compendium of the Social Doctrine of the Church) 라는 가장 적절한 도구를 갖고 있습니다. 저는 진심으로 이 <간추린 사회교리>의 활용과 연구를 추천합니다.
더 나아가, 교황이나 교회도 사회 현실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혹은 현안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데 독점권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저는 바오로 6세의 통찰력이 있는 관찰을 반복할 수 있습니다. “이같이 다양한 상황 앞에서, 통일된 메시지를 밝히고, 보편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큰 뜻도 아니며 우리의 사명도 아닙니다. 각 지역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각 지역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책임입니다.”
185. 저는 이 시대의 역사에서 근본적인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 가장 큰 두 문제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저는 이 두 주제가 인류의 미래를 형성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보다 자세히 다룰 것입니다. 첫째 주제는 사회 안에 가난한 사람을 포함시키는 문제이며, 둘째 주제는 평화와 사회적 대화의 문제입니다.
II. 사회 안에 가난한 사람을 포함시켜야 합니다
186. 가난해지셨고 항상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과 가까이 계셨던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신앙이야말로 사회가 가장 무시하는 구성원들의 통합적 발전에 관한 우리 관심의 근거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우리는 탄원을 듣는다.
187. 모든 그리스도인과 공동체는 가난한 이들의 해방과 발전을 위한, 그들을 사회의 완전한 일원이 될 수 있게 하는 하느님의 도구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가난한 이들이 울부짖는 소리에 온유하고 주의 깊은 사람이 되어 그들을 돕기 위해 나서야 합니다. 성서를 그저 힐끗 살펴보아도 은총의 우리 아버지께서는 얼마나 가난한 사람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려 하시는지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이 고통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기 위해.... 너를 보낸다.”(탈출기 3,7-8, 10)
우리는 그분이 얼마나 그들의 필요에 관심을 기울이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주님께 부르짖자, 주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구원자를 세우셨다.”(판관기 3,15)
가난한 사람의 울부짖는 소리를 듣는 하느님의 도구인 우리가 만일 그 탄원에 귀를 막는다면, 우리는 아버지의 뜻과 그분의 계획을 반대하는 것이다. 그 가난한 사람이 “너희를 걸어 주님께 호소하면 너희에게 죄가 될 것이다.”(신명기 15,9) 가난한 사람의 곤궁을 향한 연대의 결여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 가난한 사람이 “비참한 삶 속에서 너를 저주하면 그를 만드신 분께서 그의 호소를 들어주시리라.”(집회서 4,6)
자연스럽게 오래된 물음이 다시 등장합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1요한 3,17) 억압받는 사람이 울부짖는 소리에 관해 야고보 사도가 얼마나 무섭게 말했는지를 기억합시다. “그대들의 밭에서 곡식을 벤 일꾼들에게 주지 않고 사기로 가로챈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곡식을 거두어들인 일꾼들의 아우성이 만군의 주님 귀에 들어갔습니다.”(야고보 5,4)
188. 그 탄원에 마음을 둘 필요는 그 자체로 해방하는 은총의 활동에서 나온다는 것을 교회는 알았습니다. 그 은총이 우리 각자 안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소수의 사람에게만 부여된 사명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자비의 복음과 인류에 대한 사랑에 이끌리는 교회는 정의를 위한 부르짖음을 듣고 모든 역량을 다해 그 부르짖음에 응답할 뜻이 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스스로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르코 6,37) 이 말씀은 우리가 만나는 이들의 실제적 궁핍을 덜어주려는 일상의 연대 행위뿐만 아니라, 빈곤의 구조적 원인을 제거하고, 가난한 이들의 통합적 발전을 증진하기 위해 일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연대”라는 말이 약간 진부하게 때로는 불충분하게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연대”는 산발적인 관대한 행동 그 이상의 중요한 무엇을 지칭합니다. “연대”는 공동체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사고방식, 즉 소수에게 돌아갈 선보다는 모든 이의 삶을 우선하는 사고방식을 만들어냅니다.
189. 연대는 재산의 사회적 기능과 재화의 보편 목적이 사유재산보다 우선하는 것들이라는 점을 깨달은 사람의 자발적 반응입니다. 재화의 사적 소유는 그것을 보호하고 증대시킬 필요로 정당화됩니다. 그것은 그 재화가 공동선에 더 잘 기여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때문에 연대는 반드시 가난한 사람에게 속한 것을 되돌려주려는 결의로 실천해야 합니다. 연대가 갖는 이런 신념과 습관을 실현할 때, 이 신념과 습관은 다른 구조적 변형에 이르는 길의 문을 열어 그 변형을 가능하게 합니다. 새로운 신념과 태도를 낳지 않는 구조의 변화는 그 구조가 머지않아 부패하고 억압적이며 비효율적이 될 것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줄뿐입니다.
190. 때로는 전체 민족,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민족 전체의 울부짖는 소리를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평화는 인권의 존중뿐만 아니라, 민족들의 권리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슬프게도, 인권조차도 개인적 권리들 혹은 보다 부유한 민족의 권리들을 터무니없이 수호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될 수 있습니다. 각 민족은 고유의 문화와 자율성을 갖는 것이 당연하지만, 이 행성이 모든 인류에게 속하고 모든 인류를 위한 것임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일부 민족이 자원이 부족하거나 발전이 덜 된 곳에 태어난다는 그 사실이 그들이 낮은 존엄성을 지니고 살고 있음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되풀이해 말해야 합니다. “남보다 잘사는 사람들은 자기 재산을 남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너그러이 양보해야 한다.” 우리 자신의 권리에 대해 적절하게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자기 나라의 탄원과 전망을 넘어 다른 민족과 지역의 탄원을 듣고 그 전망을 확장해야 합니다. 우리는 연대의 정신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연대는 “모든 민족이 각자의 운명을 스스로 해결하게 도울 수 있는데”,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자신을 완성시키도록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191. 모든 곳에서, 모든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은 목자의 도움과 함께 가난한 사람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브라질의 주교들은 이를 훌륭하게 밝혔습니다.
“우리는 매일 브라질 백성의 기쁨과 희망, 고생과 슬픔을 (우리의 짐으로) 짊어지고 싶습니다. 특히 땅과 집이 없고, 음식이 없고 건강관리가 이루어지지 않는 시골과 도시의 특정지역에서 그들의 권리를 희생시켜가며 살고 있는 사람들의 기쁨과 희망, 고생과 슬픔을 말입니다. 그들의 빈곤을 보고, 그들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치욕을 안겨줍니다. 왜냐하면 모든 이를 위한 식량이 충분하다는 것과 굶주림은 재화와 소득의 잘못된 분배의 결과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잘못된 분배는 일반화된 낭비와 사치로 더욱 악화됩니다.”
192. 그러나 우리는 이보다 더한 것을 갈망합니다. 우리의 꿈은 더 높이 날아오릅니다. 우리는 단순히 모든 민족의 영양 상태나 “품위 유지”에 관해서뿐만 아니라, 그들의 “어느 시대든 그 어떠한 것이든 모든 복지와 번영”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교육, 건강관리,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용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신의 삶의 품위를 드러내고 증진시키는 것은 자유롭고, 창의적이고, 참여적이며 상호 협력적인 노동을 통해서이기 때문입니다. 정당한 임금은 그들이 다른 모든 재화를 취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 모든 재화는 사실 우리가 공동으로 사용하도록 되어 있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헛수고를 하지 않으려면 복음에 충실해야 합니다
193. 다른 이의 고통으로 우리가 움직일 때 비로소 가난한 사람이 부르짖는 소리를 들어야 할 의무를 우리가 실현하는 것입니다. 자비에 관해 가르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읍시다. 그리고 그 말씀이 교회의 생활 속에 울려 퍼지게 합시다. 복음은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오 5,7)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야고보 사도는 다른 이에 대한 우리의 자비가 하느님의 심판의 날에 우리를 변호해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장차 자유의 법에 따라 심판받을 사람으로서 말하고 행동하십시오. 자비를 베풀지 않은 자는 가차 없는 심판을 받습니다.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야고보 2,12-13)
여기서 야고보 사도는 (에집트) 탈출 후 유다인의 영성이 갖는 훌륭한 전통을 충실히 따르고 있습니다. 그 전통은 자비가 얼마나 좋은 가치인지를 강조합니다. “의로운 일을 하시어 죄를 벗으시고, 가난한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불의를 벗으십시오. 그리하시면 임금님의 번영이 지속될 것입니다.”(다니엘 4,24) 지혜문학은 자선을 궁핍한 사람을 향한 자비의 구체적 실천으로 보고 있습니다. “자선은 사람을 죽음에서 구해 주고 모든 죄를 깨끗이 없애 준다.”(토빗 12,9) 집회서는 이런 사랑을 보다 입체적으로 표현합니다. “물은 타오르는 불을 끄고 자선은 죄를 없앤다.”(집회 3:30)
신약성경에도 똑같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한결같이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많은 죄를 덮어줍니다.”(1베드로 4,8) 이 진리는 교부들의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고, 이교 신앙의 자기중심적 쾌락주의에 대한 저항 및 예언 문화를 창출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한 가지 예만 소개합니다. “우리가 만일 불길의 위험에 처했다면, 분명히 그 불을 끄기 위해 물로 달려갈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만일 죄의 불꽃이 우리의 결점에서 타오른다면, 그리고 그 때문에 곤경에 처한다면, 자비의 일을 수행할 기회를 가질 때마다, 우리는 그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자비는 마치 수문이 이미 열려 있어 불을 끌 수 있는 분수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194. 이 메시지는 너무 분명하고 직접적이며, 너무 단순하고 훌륭해서, 어떤 교회의 해설도 그것을 상대화시킬 권리를 가질 수 없습니다. 이 본문들에 대한 교회의 성찰은 그 본문이 갖는 힘을 약화시키거나 애매모호하게 해서는 안 되며, 우리가 그 권고를 용감하고 열정적으로 받아들이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간단한 것을 왜 복잡하게 만듭니까? 개념상의 도구들은 그것이 설명하려는 실체와의 접촉을 높이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우리를 그 실체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형제적 사랑에, 겸손하고 친절한 봉사에, 정의와 가난한 이를 향한 자비로 우리를 부르는 성경의 권고들이 특별히 그런 경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이를 그런 방식으로 보라고 당신 말씀과 행동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왜 그렇게 분명한 것을 가리려합니까? 우리는 단순히 교의상의 오류에 빠지는 것에 관심을 두면 안 됩니다. 우리는 빛으로 가득한 이 생명과 지혜의 오솔길에 충실히 남아 있는 것에 관심을 두어야합니다. 왜냐하면 “때때로 정설의 수호자들이 견딜 수 없는 불의한 상황과 그것을 지속하는 정권에 대해 수동적이고 혹은 무저항적이고, 관대한, 심지어 공범이라는 비난을 받습니다.”
195. 바오로 성인이 그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나 전에 한 일이 허사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갈라디아 2,2)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 갔을 때, 그들이 제시한 확실성의 기준은 그가 가난한 사람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갈라디아 2,10 참조) 이 중요한 원리, 즉 바오로 공동체는 이교도의 자기중심적 생활태도에 절대로 굴복해서는 안 된다는 이 원리를 강조한 것은 새로운 자기중심적 이교 신앙이 자라고 있는 오늘날에도 시의적절한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의 아름다움을 항상 적절히 성찰할 수는 없지만, 우리에게 절대로 없애서는 안 될 하나의 표징이 있습니다.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들, 사회가 내다버린 사람들에 대한 선택이 그것입니다.
196. 때때로 우리는 심장과 마음이 굳어버린 것을 봅니다. 우리는 잘 잊고, 빗나가고, 현대 사회가 제공하는 소비와 오락에 대한 무한한 가능성들에 넋을 잃습니다. 이것은 모든 차원에서 일종의 소외를 가져옵니다. 왜냐하면 “한 사회조직의, 생산의, 그리고 소비의 형태들이 자신을 선물로 봉헌하는 것과 인간들 사이의 연대를 구축하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들 때 그 사회는 소외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백성안에서 가난한 사람은 특별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197. 하느님의 마음에는 가난한 사람을 위한 특별한 자리가 있습니다. 정말 그렇기 때문에 그분 자신이 “가난하게 되셨습니다.”(2코린토 8,9) 우리의 전체 구원역사는 가난한 사람의 현존을 특징으로 합니다. 구원은 거대한 제국의 끄트머리 작은 동네의 비천한 처녀가 “예”라고 응답함으로써 우리에게 왔습니다. 구세주는 구유에서, 동물들 가운데서,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처럼 태어나셨습니다. 그분은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와 함께 성전에 봉헌되셨습니다. 그것은 양을 바칠 수 없는 이들을 위한 봉헌제물이었습니다.(루카 2,24; 레위 5,7 참조) 그분은 평범한 노동자들의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그분은 빵을 마련하기 위해 직접 자기 손으로 일을 하셨습니다.
그분이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기 시작했을 때, 재산을 빼앗긴 군중이 그분을 따랐습니다. 이는 그분의 말씀이 보여줍니다.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보내셔서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기 때문이다.”(루카 4,18) 그분께서는 슬픔으로 짓눌리고, 빈곤으로 무너져버린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 당신 마음에 그들을 위한 특별한 자리를 마련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
그분께서는 스스로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되셨습니다. “나는 배가 고팠다. 그런데 너희는 나에게 먹을 음식을 주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이 모든 가난한 이들을 향한 자비가 하늘나라의 열쇠가 된다고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마태오 25,5 참조)
198. 교회에게 가난한 이를 위한 선택은 문화적, 사회학적, 정치적, 혹은 철학적 범주라기보다는 무엇보다도 신학적 범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이에게 “당신의 첫 자비”를 드러내십니다. 이 신적 우선성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 영향을 줍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필리피 2,5) 가질 자격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으로 고무된 교회는 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 선택을 가르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실천에서 우선성을 갖는 특별한 형태이며, 교회의 모든 전통이 그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선택은 - 베네딕토 16세가 가르친 것처럼 - “그분의 빈곤으로 우리를 부유하게 할 만큼, 우리를 위해 가난해지신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절대적입니다.” 그것이 제가 가난한 교회, 가난한 이를 위한 교회를 원하는 이유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칩니다. 그들은 신앙의 감각을 공유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고생 속에서 그리스도의 고통을 압니다. 그들이 우리를 복음화 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새 복음화는 그들의 삶에서 활동하는 구원의 힘을 인정하고, 교회의 순교 길에서 그들을 중심으로 삼으라는 초대입니다. 우리는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들의 주장에 우리의 목소리를 실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들의 친구가 되어야 하며,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하며, 그들을 위해 말해야 하고, 하느님께서 그들을 통해 우리에게 나눠주시려는 신비스러운 지혜를 끌어안아야 합니다.
199. 우리의 헌신은 증진과 보조를 위한 활동이나 프로그램에만 배타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움직이게 하시는 것은 제멋대로의 행동주의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다른 이를 “어떤 점에서는 우리 자신으로” 생각하는 정중함입니다. 사랑에서 비롯된 이 정중함은 다른 이에 대한 참된 관심의 시작입니다. 이 관심은 나를 고무시켜 다른 사람의 선을 효과적으로 추구하도록 합니다. 이는 가난한 사람들의 선량함, 그들의 생활 체험, 그들의 문화, 신앙을 살아가는 그들의 방법이 지닌 진가를 인정하게 합니다.
참사랑은 항상 관조적이며, 필요나 허영, 단순한 외모를 넘어서는 아름다움 때문에 그에게 봉사하게 합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이 즐거워하는 것을 발견하게 하는데, 그 사랑은 그에게 무엇인가를 거저 줍니다.” 가난한 사람은, 사랑을 받을 때, “위대한 가치를 지닌 사람으로 존중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점이 가난한 이를 위한 진정한 우선적 선택이 다른 모든 이데올로기와 다르고, 자신의 개인적 혹은 정치적 이익을 위해 가난한 사람을 착취하려는 모든 시도와 다른 점입니다. 실질적이며 진실한 이 친밀감에 기초해야만 가난한 이들이 걷는 해방의 길에서 우리는 그들과 합당하게 동행할 수 있습니다. 그것만이 “모든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는 가난한 사람이 마음 편하다는 것을 보증할 것입니다. 그런 접근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실을 가장 위대하고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가난한 이에 대한 우선적 선택이 없다면, “그 자체로 사랑의 탁월한 형태인 복음 선포는 잘못 이해되거나 말의 바다 속에 가라앉을 위험이 있습니다. 현대의 대중매체 사회에서 그 말의 바다는 매일 우리를 집어삼키고 있습니다.”
200. 이 권고는 가톨릭교회 신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매우 유감스럽게도 가난한 사람이 겪는 최악의 차별은 영적 배려의 결여라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가난한 사람 대부분은 신앙에 대해 특별한 개방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느님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그들에게 하느님의 우정, 하느님의 축복, 하느님의 말씀, 성사의 기념을 제공해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그들이 걷는 신앙의 성장과 성숙을 도모해야 합니다. 가난한 이를 위한 우리의 우선적 선택은 주로 탁월하고 우선적인 종교적 배려로 표현되어야만 합니다.
201. 누구든지 자신만의 생활태도가 다른 분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하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에게 가까이 갈 수 없다고 말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이 같은 핑계는 학계, 사업 분야나 직업 분야, 그리고 교회의 여러 분야에서도 들리는 공통된 현상입니다. 비록 평신도의 핵심적인 소명과 사명이 세상 현실과 인간 활동을 복음으로 변형시키기 위해 분투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 가운데 누구도 가난한 이와 사회정의에 대한 관심에서 예외가 된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영적 전환, 하느님과 이웃 사랑에의 집중, 정의와 평화를 향한 열정, 가난한 이들과 빈곤에 대한 복음의 가르침은 모든 사람에게 요구됩니다.” 저는 이런 말들이 아무런 실질적 실천 효과는 없이 해석과 토론만 불러일으킬까봐 두렵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갖는 개방성과 준비성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하나의 공동체로서 이 쇄신된 소명을 수용할 수 있는 창의적 방법들을 모색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경제와 소득의 분배
202. 빈곤의 구조적 원인을 해결하는 일은 미룰 수 없습니다. 이는 좋은 사회 질서를 위해서 빈곤의 구조적 원인을 시급히 해결해야 한다는 실용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닙니다. 사회를 약화시키고 무너뜨리는 사회적 질병을 치유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회적 질병은 사회를 새로운 위기로 내몰 수밖에 없습니다. 시급한 문제에 대응하려는 사회복지 사업은 단순히 임시방편에 불과합니다. 시장과 금융투기의 절대 자율을 배척하고, 불평등의 구조적 원인을 없애지 않으면 가난한 사람의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한 세상의 빈곤 문제를 풀 답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혹은 시장과 금융투기의 절대 자율과 관련해 생긴 그 어떤 문제들도 해결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불평등은 사회적 병고의 뿌리입니다.
203. 모든 경제 정책이 반드시 실현해야 할 관심사는 각 개인의 존엄과 공동선 추구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이 인간 존엄과 공동선추구는 참되고 통합적인 발전을 위한 전망이나 계획을 갖고 있지 않은 어떤 정치적 담론을 채우기 위해 밖으로부터 유입한 단순한 부가물 쯤으로 간주됩니다. 이런 시스템이 넌덜머리가 난다고 증명하는 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윤리의 문제를 제기할 때, 재화의 분배를 언급할 때, 노동의 보호와 약자의 존엄함 수호를 이야기할 때, 정의에의 헌신을 요구하시는 하느님에 대해 간접적으로 이야기할 때, 넌덜머리가 납니다. 때때로 이런 문제들은 말잔치의 주제가 됩니다. 이 말잔치는 이 문제들을 하찮은 것으로 만듭니다. 사업은 소명, 그것도 거룩한 소명입니다. 단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인생에서 더 큰 의미를 추구한다는 조건에서 그렇습니다. 이 인생의 더 큰 의미 때문에 그들은 이 세상의 재화를 증대시킴으로써, 그리고 그 모든 사람이 그 재화에 더 많이 접근할 수 있게 함으로써 공동선에 진정으로 기여할 수 있습니다.
204. 우리는 더 이상 시장에 있는 보이지 않는 권력, 보이지 않는 손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정의의 성장은 경제의 성장을 전제하면서도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합니다. 정의의 성장은 특별히 더 나은 소득분배, 고용자원의 창출, 단순한 시혜정신을 넘어서는 가난한 이의 통합적 발전을 위한 결정, 계획수립, 작동, 그리고 과정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무책임한 인기영합주의를 제안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경제가 노동력을 감소시키면서 이익을 증대시키려는 시도와 그럼으로써 배제된 이들의 계급을 확대시키는 것 같은 새로운 독에 대한 처방들을 경제가 더 이상 내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밝히려는 것입니다.
205. 저는 이 세상에 퍼진 죄악의 깊은 뿌리 -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죄악이 아니라 - 를 치유하기 위해 진지하고 효과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더 많은 정치인들을 우리에게 달라고 하느님께 청하고 있습니다! 정치는, 비록 자주 훼손되지만, 공동선을 추구하는 한 고상한 소명이며 사랑의 높은 차원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는 사랑이 “친구나 가족, 소집단에서 맺는 미시적 관계뿐만 아니라 사회, 경제, 정치 집단 안에서 맺는 거시적 관계의 원리”라는 것을 확신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사회 조건, 백성, 그리고 가난한 사람의 삶 때문에 괴로워하는 정치인이 더 많이 등장하기를 주님께 간절히 구합니다! 정부 지도자들과 금융 지도자들이 이 점을 유념하고 그들의 전망을 넓혀, 모든 시민이 품위 있는 노동, 교육과 건강한 삶을 꾸려갈 수 있도록 일하는 것이 지극히 중요합니다. 왜 하느님께 돌아가 그들의 그런 계획들을 불러 일으켜 달라고 청하지 않습니까? 초월성에 문을 열면, 새로운 정치 경제적 사고를 가져올 수 있다고 굳게 확신합니다. 그 새로운 사고는 경제와 사회의 공동선 사이를 갈라놓은 장벽을 허무는 데 도움이 됩니다.
206. 경제는 그 용어가 드러내는 것처럼 우리의 공동 가정을 적절하게 관리하는 예술이어야 합니다. 이 세계 전체가 우리의 공동 가정입니다. 이 세계 곳곳에서 내린 각각의 중요한 경제적 결정은 다른 모든 곳에 영향을 줍니다. 따라서 어떤 정부도 공동의 책임을 고려하지 않고 단독으로 행동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수많은 세계적 문제들에 대한 지역 차원의 해결책을 찾는다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수많은 세계적 문제들이 그 해결의 어려움을 갖고 지역 정치를 압도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건강한 세계 경제를 원한다면, 역사의 이 전환점에서 필요한 것은 몇몇 나라가 아니라 각 국가의 주권을 존중하면서 모든 나라의 경제적 웰빙을 실현하는 상호작용의 보다 유효한 방법입니다.
207. 만일 어떤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가난한 사람들이 존엄성을 갖고 살도록 돕는데,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다가가는 데 효과적인 협력과 창의적인 관심을 갖지 않고 편안하게 자기들만의 길을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공동체는 아무리 사회문제에 관해서 많은 말을 하고, 정부를 비판하더라도, 무너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런 공동체는 종교적 활동, 비생산적인 회의와 공허한 이야기 등으로 위장한 일종의 정신적 세속성의 바다로 떠내려 갈 것입니다.
208. 혹시 저의 이 말에 불쾌한 사람이 있다면, 저는 그 어떤 개인적 관심이나 정치적 이데올로기와는 전혀 무관하게 애정과 최선의 의도를 갖고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을 밝히고 싶습니다. 저의 말은 적이나 공격자가 하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저는 오직 개인주의적이고, 무관심하며, 자기중심적 사고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도와서, 그런 무가치한 사슬에서 자유로워져 보다 인간적이고, 고귀하며 결실이 풍부한 삶을 생각하고 살도록, 이 지상에 있는 그들의 현존에 존엄함을 가져오도록 돕는 일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상처입기 쉬운 이들을 위한 배려
209. 가장 탁월한 복음전파자이며 복음자체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가장 작은이들과 동일시했습니다.(마태오 25,40 참조) 이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세상에서 가장 약한 사람을 돌보아야 한다는 것을 환기시킵니다. 그러나 성공과 자립을 강조하는 지금의 모델은 느린 사람, 약한 사람, 혹은 생활에서 기회를 찾는 데 재능이 부족한 사람을 도우려는 노력에 투자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210. 새로운 형태의 빈곤과 취약성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고통 받는 그리스도를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비록 우리에게 아무런 즉각적이고 확실한 이득을 가져다주지 않을지라도 말입니다. 저는 노숙자, 의존증자, 난민, 원주민, 점점 고립되고 버려지고 있는 노인, 그리고 다른 많은 이를 생각합니다. 저는 특별히 이민자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어떤 국경도 없는 교회의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자신을 모든 이의 어머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때문에 저는 모든 국가에게 관대한 개방을 권고합니다. 이 개방은 해당 지역의 정체성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가져오기보다는 새로운 형태의 문화 통합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삐거덕거리는 불신을 극복하고, 서로 사른 사람을 통합해서, 그 통합 자체를 발전의 새 요소로 만드는 그런 도시들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건축학적 디자인에서도 다른 공간의 가치를 우호적으로 인정하고, 그것들을 연결하고, 결합한 공간들로 가득 찬 그런 도시들이 얼마나 매력적입니까!
211. 저는 다양한 종류의 많은 인신매매 희생자들의 운명을 생각하면 언제나 비탄에 빠집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네 아우는 어디 있느냐?”(창세기 4,9)는 하느님의 절규를 들었으면 좋겠다고 얼마나 간절히 바라는지 모릅니다. 노예 생활하는 여러분의 형제자매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이 매일 은밀한 수용시설에서, 매매춘 굴에서, 구걸시키기 위해 이용하는 어린이들 안에서, 서류를 갖추지 않은 노동자들의 착취 속에서, 그렇게 죽이고 있는 형제자매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 맙시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공모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모든 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 악랄한 범죄망은 우리 도시에 튼튼하게 자리 잡았으며, 많은 사람이 편하고 조용하게 공모한 결과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고 있습니다.
212. 배제, 혹사, 폭력의 상황을 견디고 있는 여성들은 이중의 고통을 겪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경우 자신의 권리를 지킬 수 없을 때가 빈번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들 가운데에서 자신의 힘없는 가족들을 보호하고 지키려는 수많은 영웅적 행위를 매일 끊임없이 목격하고 있습니다.
213. 교회가 특별한 사랑과 배려로 돌보고 싶은 약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우리 가운데 가장 약하고 순진합니다. 오늘날 이 아이들의 인간 존엄성을 부정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생명을 빼앗고, 그것을 거부하는 이는 누구나 처벌하려는 법을 통과시키는 등 그들과 관련된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종종 그들의 생명을 수호하려는 교회의 노력을 조롱하는 한 방법으로 교회의 입장을 이데올로기적인 것으로, 반계몽주의적인 것으로, 보수적인 것으로 보이게 하려는 시도들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태어나지 않은 생명의 수호는 각 개인과 모든 사람의 다른 인권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든, 어떤 발달 단계에 있든, 항상 신성하며 침해할 수 없는 존재라는 자각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목적이며, 절대로 다른 문제들을 푸는 수단이 아닙니다. 일단 이 자각이 사라지면, 인권 수호의 견고하고 항구한 기초도 사라집니다. 그리되면 인권은 언제나 지금 있는 눈앞의 권력에 복종하게 될 것입니다. 각 개인의 생명이 갖는 침해할 수 없는 가치를 인정하는 데에는 이성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그 주제를 신앙의 관점에서도 본다면 “인간의 인격적 존엄에 대한 모든 침해는 하느님께 복수를 울부짖는 것이며, 각 개인의 창조주에 대항하는 공격입니다.”
214. 이 문제가 인간의 가치에 관한 우리의 메시지와 내적으로 일관성을 갖고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교회는 이 문제에 대해 입장을 바꿀 수 없습니다. 저는 이 점에 관해서 철저하게 정직하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절대로 개혁으로 혹은 “현대화”로 간주되는 그 어떤 것의 주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생명을 제거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진보적”인 것이 아닙니다. 반면에 우리가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인 여성들과 적합하게 동반하는데 그다지 한 일이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매우 어려운 처지에서는, 특히 여성들의 뱃속에서 자라고 있는 생명이 강간이나 극단적 빈곤 상황의 결과일 때, 낙태는 여성들이 갖고 있는 심각한 고통을 해결하는 빠른 방법처럼 보입니다. 누가 그 같은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꿈쩍도 않고 남아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215. 또 다른 약하고 무력한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빈번하게 경제적 이익이나 무차별적 착취 앞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저는 피조세계 전체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수혜자일 뿐만 아니라 다른 피조물의 청지기이기도 합니다. 우리 몸 덕분에, 하느님께서는 우리 주변의 세상과 우리를 가깝게 결합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신체적 만성질환을 느끼듯이 땅의 사막화를, 그리고 고통스러운 신체 손상을 느끼듯이 종의 멸종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생활과 미래 세대에 영향을 미칠 죽음과 파괴의 자취를 우리가 지나간 자국에 남겨놓지 맙시다.
저는 이 자리에서 몇 해 전 필리핀의 주교들이 행한 감동적이며 예언적인 비탄의 목소리를 저의 것으로 삼고자 합니다.
“믿을 수 없이 다양한 곤충이 삼림에 살며 그들의 과업을 수행하느라 바빴습니다. 새들은 숲의 창공을 날아다녔습니다. 새들의 밝은 깃털과 다양한 노랫소리는 푸른 숲에 색깔과 노래를 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특별한 피조물인 우리를 위해 이 땅을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것을 파괴해도 되거나 불모의 땅으로 만들어도 괜찮다고 그렇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단 하루 밤만 비가와도 여러분 지역에는 초코렛 갈색 강물이 흐르고 있는 것을 보십시오. 그 강물은 땅의 생명의 피를 바다로 흘려보내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파시그강 같은 하수구에서 어떻게 물고기가 헤엄을 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오염시킨 그런 강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누가 경이로운 바다를 색깔과 생명을 빼앗은 물속의 무덤으로 만들었습니까?”
216. 하느님의 사랑 속에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우리 모두는 작지만 강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이 살고 있는 이 약한 세상을 보살피고 보호해야할 사명을 갖습니다.
평화는 폭력의 부재를 넘어선다
III. 사회에서 실현해야 할 공동선과 평화
217. 우리는 기쁨과 사랑에 대해서 오랫동안 이야기했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평화라는 열매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갈라디아 5,22참조)
218. 사회에서의 평화는 사회의 한 부분이 다른 부분을 지배함으로써 생긴 분쟁 제거나 단순한 폭력의 부재 정도로 이해될 수 없습니다. 참된 평화는 가난한 사람들을 달래거나 침묵하게 하는, 그래서 보다 유복한 사람들이 만족스럽게 자기들이 생활양식을 유지하고, 대신 다른 이들은 이들의 만족을 위해 무엇이든 해야만 하는, 그런 사회구조를 정당화시키는 구실이 될 수도 없습니다. 부의 분배, 가난한 이들에 대한 배려, 그리고 인권을 포함한 이런 요구들을 서류로 합의를 만들거나 만족스러운 소수를 위한 일시적 평화를 가장해서 억누를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존엄과 공동선은 자신의 특권 포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안락함보다 높은 가치입니다. 따라서 이런 가치들이 위협을 받을 때, 예언자는 반드시 그 목소리를 높여야 합니다.
219. 평화는 “권력의 불안한 균형으로 전쟁을 피하는 것”도 아닙니다. “평화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질서의 세계, 인간 사이에 보다 완전한 정의를 갖춘 그런 질서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매일매일 노력해 꼴을 갖춰가는 것입니다.” 결국, 통합적 발전의 결과가 아닌 평화는 사라질 것입니다. 그런 평화는 항상 새로운 갈등과 다양한 형태의 폭력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220. 모든 국가의 시민은, 권력을 쫓아 휩쓸리고 권력으로 휘둘리는 그런 군중이 아니라, 헌신적이며 책임감 있는 시민으로 활동함으로써 자신의 삶이 갖는 사회적 차원을 드높입니다. “책임감 있는 시민의식은 일종의 덕이며, 정치생활의 참여는 도덕적 의무”라는 것을 잊지 맙시다. 그러나 ‘시민’이 된다는 것은 중요한 그 무엇을 요구합니다. 시민이 된다는 것은 계속되는 과정이며, 그 과정에는 모든 새로운 세대가 참여해야만 합니다. 평화로운 문화의 교류, 다양한 모습을 갖는 문화의 교류를 증진시킴으로써, 이를 (시민이 된다는 것을) 성취하려는 의지와 통합의 열망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더디지만 끈기 있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221. 평화, 정의, 그리고 형제의식에서 한 백성이 형성되는 과정은 모든 사회적 실재 속에 끊임없는 긴장관계를 갖고 연결되어 있는 네 가지의 원리(인간 존엄성, 공동선, 보조성, 연대성의 원리)에 의존합니다. 이것들은 교회의 사회교리의 기둥들에서 나옵니다. 이 원리들은 “사회현상을 해석하고 평가하는 기본적이고 으뜸가는 준거인 매개변수”로 기여합니다. 그 빛으로 저는 이제 사회생활의 발전을 인도할 수 있고, 다양성이 각자의 몫을 다하는 가운데 조화를 이루는 한 백성의 형성을 인도할 수 있는 네 가지 특별한 원리를 전개하고자 합니다. 저는 그 원리들의 적용이 각 나라 안에서, 그리고 전체 세계 안에서 평화의 참된 길이 될 수 있다는 신념에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시간은 공간보다 위대합니다
222. 만족과 한계 사이에는 일종의 지속적 긴장이 존재합니다. 만족은 완전한 소유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한계는 우리 앞에 세워진 벽입니다. 대체로 말하면, “시간”은 항상 우리 앞에서 지평을 여는 표현으로서 만족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각각의 순간은 한계와 관계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각각의 순간과 목적인으로서 유토피아적 미래라는 지평 그 사이에서 균형을 갖고 삽니다. 이 목적인은 그 목적자체로 우리를 이끕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백성을 일으켜 세우는 과정의 첫 번째 원리를 보게 됩니다. 즉 시간은 공간보다 위대합니다.
223. 이 원리 때문에 우리는 당장의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천천히 그렇지만 확실하게 일할 수 있습니다. 이 원리는 우리의 계획에서 만나는 어려움, 역풍, 혹은 불가피한 변화를 참을성 있게 견디게 합니다. 이 원리는 만족과 한계 사이의 긴장을 받아들여 시간에 우선성을 두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우리가 사회정치활동에서 종종 관찰하는 잘못 가운데 하나가 바로 시간과 과정보다는 공간과 힘을 선호한다는 것입니다.
공간을 우선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함께 현재 안에 필사적으로 가둬두려고 한다는 것, 모든 힘의 공간들과 자기과시의 공간들을 소유하려고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과정들을 구체화시켜서 억누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시간을 우선한다는 것은 ‘공간을 소유한다기보다는 과정을 시작하는 것’에 관심을 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간은 공간을 다스리고, 공간을 비추고, 공간을 끊임없는 확장의 고리 속에서 되돌아갈 가능성 없이 서로 연결시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에서 새로운 과정을 창출하고,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에서 열매를 맺는 지점까지 그 과정을 발전시킬 수 있는 다른 사람과 그룹들을 끌어들이는 행동들에 우선성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걱정은 하지 않지만, 분명한 신념과 강한 끈기를 갖고 말입니다.
224. 가끔 저는 오늘날 쉽고, 사람들이 빠른 단기적인 정치적 소득을 내지만 인간의 만족을 높이지는 않는, 그런 즉각적인 결과를 얻으려 하지 않는 대신에, 백성을 일으켜 세우는 과정을 창출하는 데 실제 관심을 기울이는지 의구심을 갖습니다. 역사는 아마도 “한 시대를 적절하게 평가하는 유일한 척도는 그 시대의 역량과 특성에 따라 충만하고 진정으로 의미 있는 인간 실존을 어느 정도로 발전시키고 성취하려 했는가를 묻은 것이다”라는 로메로 가르디니가 설파한 기준에 따라 이를 판단할 것입니다.
225. 이 기준은 복음화에도 적용됩니다. 복음화는 더 큰 그림, 적합한 과정에의 개방성, 장기적 안목을 주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도 당신 지상 생활 동안 당신 제자들이 미처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 그들이 성령을 기다려야 할 것이라는 점을 자주 경고하셨습니다.(요한 16,12-13 참조) 밀과 가라지의 비유(마태오 13,24-30 참조)는 복음화가 갖는 중요한 점을 도식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원수가 왕국에 침입해서 해로운 것을 뿌릴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밀의 선함에 패퇴할 것입니다.
일치는 갈등을 극복합니다
226. 갈등은 무시하거나 감출 수 없습니다. 갈등은 반드시 직면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만일 우리가 갈등에 빠져 있다면, 우리는 전망을 잃어버리고, 우리의 지평은 위축되며, 실체 그 자체는 붕괴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갈등 속에서 우리는 실체가 갖는 일치성에 대한 감각을 잃습니다.
227. 갈등이 발생했을 때, 어떤 사람은 단순히 그것을 바라보기만 하고 마치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는 듯이 자기 갈 길을 갑니다. 그들은 그 일에 손을 씻고 자기 삶을 계속합니다. 다른 이들은 그 갈등의 포로가 되는 식으로 그 갈등을 끌어안고 있습니다. 그들은 방향을 잃고, 자기들의 혼돈과 불만을 제도의 탓으로 돌림으로써 일치를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분명히 제3의 길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갈등을 다루는 가장 좋은 길입니다. 그것은 기꺼이 먼저 갈등에 용감하게 맞서고, 그것을 해결하고 새로운 과정의 고리에 그 갈등을 연결시킵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마태오 5,9)
228. 이 방식으로 불일치 중에서도 친교를 구축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 일은 갈등의 겉모습을 넘어서 다른 이들의 존엄함을 보려는 위대한 사람만 성취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에서 우정을 구축하는 데 있어 불가결한 한 원리, 즉 일치가 갈등보다 위대하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연대는 그 심오하고 가장 매력적인 의식으로 삶의 자리에서 역사를 만들어가는 하나의 길이 됩니다. 이 삶의 자리에서 갈등, 긴장, 그리고 충돌은 다양하면서 생명을 불어넣는 일치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혼합주의나, 어떤 것을 다른 것에 흡수시키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높은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양 쪽에 모두 타당하고 유용한 것을 보존하는 해결책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229. 복음에서 나온 이 원리는 그리스도께서 하늘과 땅, 하느님과 인간, 시간과 영원, 육과 영, 사람과 사회, 그 모든 것을 당신 안에 하나로 만드셨다는 것을 환기시킵니다. 그 분 안에서 이루신 모든 것의 일치와 화해의 표지는 바로 평화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에페소 2,14)
복음의 메시지는 항상 평화의 인사로 시작합니다. 평화는 모든 시대에 제자들 사이의 관계를 확인하고 유종의 미를 거둡니다. 평화는 주님께서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심으로써”(콜로새 1,20) 세상과 세상의 갈등을 이기셨고 화해시키셨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성서 본문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다른 것들을 화해시키는 자리가 우리 자신 안이라는 것, 분열과 붕괴로 위협을 받더라도 우리의 삶 안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만일 마음이 수천 조각으로 흩어진다면, 사회 안에 참된 평화를 일구어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230. 평화의 메시지는 일종의 협상으로 얻어내는 안정에 관한 것이 아니라 성령이 가져다준 일치가 모든 다양함을 조화시킬 수 있다는 확신에 관한 것입니다. 그 평화는 새롭고 믿음직한 종합을 창출함으로써 모든 갈등을 극복합니다. 다양성은 화해의 과정 속으로 끊임없이 들어갈 때, “화해를 이룬 다양성”을 가져오는 일종의 문화적 계약을 보증할 때 아름다운 것이 됩니다. 콩고의 주교들이 “우리의 인종적 다양성은 우리의 부입니다... 마음의 전환과 화해를 통해서, 일치 안에서만 우리와 우리나라가 모든 차원에서 발전하도록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밝힌 것처럼 말입니다.
실재들은 관념들보다 중요합니다
231. 관념과 실재 사이에는 일종의 항구적 긴장이 존재합니다. 관념은 애써서 성취해야 하는 반면에 실재는 단순하게 존재합니다. 관념들이 실재들로부터 분리되지 않으려면, 둘 사이에는 끊임없는 대화가 있어야만 합니다. 말의 영역, 이미지의 영역, 수학의 영역에서만 남아있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래서 실재들이 관념들보다 위대하다는 세 번째 원리가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이 원리는 실재를 포장하는 다양한 수단들을 물리칠 것을 요구합니다. 즉 순수함이라는 천사의 형식들, 상대주의라는 독재들, 공허한 수사들, 실제보다 더한 이상적 목표들, 역사와 관계없는 근본주의라는 상표들, 친절함이 없는 윤리 시스템들, 지혜가 없는 지적 담화들 같은 것들을 물리쳐야 합니다.
232. 관념들은 - 개념의 역작들은 소통, 이해와 응용(praxis)에 기여합니다. 실재들과 유리된 관념들은 기껏해야 분류하고 정의를 내릴 수 있지만 확실한 행동을 요구하지 않는 비효과적인 이상주의(관념론)와 유명론(명목론)을 낳습니다. 우리에게 행동을 요구하는 것은 이성으로 계발된 실재들입니다. 형식적 유명론은 조화로운 목적을 제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진리는 조작되고, 화장품이 우리 몸에 대한 실질적 관심사가 됩니다. 자기들의 제안이 그렇게 분명하고 논리적인데 왜 사람들이 이해하지 않고 자기들을 따르지 않는지를 모르는 정치지도자들이, 또 그런 종교지도자들도 있습니다. 아마 그것은 순수한 관념의 영역에 빠져서 정치나 신앙을 수사학(레토릭)으로 환원시켰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른 이들은 단순함을 떠나서 대부분 사람에게 낯선 합리성을 도입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233. 실재들은 관념들보다 더 위대합니다. 이 원리는 말씀의 육화와 말씀의 실천과 관계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영을 이렇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고 고백하는 영은 모두 하느님께 속한 영입니다.”(1요한 4,2) 실재의 원리, 이미 살을 취하신 말씀, 그리고 끊임없이 새로운 살을 취하려 하는 말씀의 원리는 복음화에서 핵심입니다. 이 원리는 우리를 도와 교회의 역사가 구원의 역사라는 것을 보게 하고, 우리 백성의 생활 속에 복음을 토착화한 성인들을 잊지 않게 하며, 교회의 풍부한 이천년 역사가 갖는 열매를 수확하게 합니다. 마치 우리가 복음을 다시 만들어내기를 바란다는 듯이 이 보물과는 유리된 사고체계를 찾아내려는 척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이 원리는 우리의 말씀을 실천하도록, 그 말씀의 결실을 내는 정의와 사랑의 과업을 수행하도록 재촉합니다.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 것, 말씀을 실재로 만들지 않는 것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이고, 순수한 관념의 영역에 머무는 것이며, 생명력이 없고 결실도 못내는 자기중심주의과 영지주의로 마치는 것이다.
전체가 부분보다 위대합니다
234. 세계화와 지역화 사이에도 내적 긴장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편협함과 진부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세계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역도 살펴봐야 합니다. 지역은 우리 발을 딛고 있는 땅입니다. 세계화와 지역화는 모두 우리가 양극단 가운데 하나에 빠지는 것을 막아줍니다. 한 극단은 다른 모든 사람 뒤에서 보조를 맞추면서, 빛나는 다른 사람들의 세상을 사모하면서, 모든 시대를 멍청히 바라보며 환호합니다. 또 다른 한 극단은 민속학의 박물관으로, 동떨어진 세상으로, 똑 같은 것을 반복하도록 정해진 세상으로, 새로운 경험과 만날 수 없는 세상으로, 하느님께서 그들의 경계 밖에 내려주신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없는 세상으로 들어갑니다.
235. 전체가 부분보다 더 위대합니다. 그러나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도 더 위대합니다. 그래서 제한된 특정 물음에 지나치게 몰두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지평을 넓혀서 우리 모두에게 이로움이 될 더 큰 선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얼버무리거나 뿌리를 자르지 않으면서 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비옥한 땅과 우리의 원래 장소가 지닌 역사에 우리의 뿌리를 깊게 내려야 합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는 작은 규모로 우리 인근에서, 그렇지만 더 큰 전망을 갖고 일할 수 있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 공동체 생활에 파묻힌 사람이라면 자기의 개별성을 잃지 않고 자기의 정체성을 감출 필요는 없습니다. 대신 그들은 개인적인 성장을 위한 새로운 자극을 받아들입니다. 세계적인 것을 질식시켜야 할 필요는 없으며, 그렇다고 특별한 것이 열매를 못 맺는 것도 아닙니다.
236. 이 자리에서 우리가 말하는 모델은 구체(球体)가 아닙니다. 구체는 그 부분들보다 더 크지 않습니다. 구체 표면의 모든 점은 중심에서 같은 거리에 있으며, 각 점들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대신 우리의 모델은 다면체입니다. 다면체는 그 모든 부분들을 수렴하며, 각 부분들은 그 독창성을 유지합니다. 사목활동과 정치활동은 이 다면체에서 함께 각자의 최선을 추구합니다. 그곳에는 가난한 사람과 그들의 문화, 그들의 열망과 그들의 잠재력을 위한 자리가 있습니다. 자기의 잘못 때문에 의심스러운 사람이라 하더라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될 그 어떤 것을 갖고 기여합니다. 이 다면체는 사람을 수렴한 것입니다. 보편적 질서 안에서 사람들은 자기 고유의 개별성을 유지합니다. 공동선을 추구하는 한 사회 안에서 사람들이 함께 사는 것이 바로 이 다면체 모델입니다. 이 다면체 모델 사회에는 진정으로 모든 사람을 위한 자리가 있습니다.
237. 그리스도인에게, 이 원리는 복음의 전체성 혹은 통합성을 환기시킵니다. 교회는 이 복음의 전체성과 통합성을 우리에게 전하고 그것을 선포하라고 내보냅니다. 복음의 풍요로움과 충만함은 학자와 노동자, 기업인과 예술가, 한 마디로 모든 사람을 끌어안습니다. 각 사람이 가진 특별한 재능은 고유한 방식으로 전체 복음을 받아들이며 기도, 형제애, 정의, 투쟁과 기념의 표현양식으로 그것을 구체화시킵니다.
기쁜 소식은 가장 작은 이 가운데 누구라도 잃지 않기를 바라시는 아버지의 기쁨입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아 무리 속으로 데려오시는 착한 목자의 기쁨입니다. 복음은 반죽을 부풀어 오르게 하는 누룩이며 모든 민족을 비추는 언덕 위의 도시입니다. 복음은 원래 전체성의 원리를 그 안에 담고 있습니다. 즉 복음이 항상 모든 민족에게 선포될 때까지, 복음이 인류의 모든 측면을 치유하고 강화할 때까지, 복음이 모든 사람을 하느님 나라 식탁에 모아들일 때까지, 복음은 항상 기쁜 소식으로 남아 있습니다. 복음이 가르치는 전체는 부분보다 더 위대합니다.
VI. 평화에 기여하는 것으로서 사회적 대화
238. 복음화는 대화의 길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는 세 대화 영역이 있습니다. 이 대화들은 교회가 인간의 완전한 발전을 증진하고 공동선을 추구하기 위해 존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국가와의 대화, 사회와의 대화 - 이는 문화와 대화, 학문(과학)과 대화를 포함합니다. - 그리고 비 가톨릭교회의 다른 신앙인과의 대화가 그 세 영역입니다.
이 모든 대화에서 “교회는 신앙이 제공하는 빛을 통해 말합니다.” 교회는 지난 이천년 동안 이 신앙의 빛을 체험 했으며, 항상 인간의 생명과 고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빛은 인간의 이성을 초월합니다. 그러나 이 빛은 믿지 않는 사람도 풍요롭게 할 수 있고, 그들의 삶도 의미가 있으며, 이성을 자극해서 이성의 전망을 확대시킵니다.
239. 교회는 “평화의 복음”(에페소 6,15)를 선포하며, 이 광대한 보편적 선을 수호하는 데 모든 국가와 국제 공권력과 협력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평화 자체이신(에페소 2,14 참조)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침으로써, 새 복음화는 모든 세례 받은 사람에게 평화를 이루는 사람, 화해를 이룬 생활에 대해 믿을만한 증인이 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대화가 만남의 한 형식으로서 자리 잡은 그런 문화에서는, 공정하고, 반응하며, 포괄하는 사회라는 목표를 추구하면서, 일치와 합의를 구축하기 위한 수단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역사적 주체, 곧 주요 장본인은 전체로서의 백성과 그들의 문화입니다. 단일한 계급, 소수, 그룹, 혹은 엘리트가 주체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소수를 위한 소수나, 모든 이를 위해 발언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계몽된 소수나, 혹은 목소리 큰 소수가 만들어낸 계획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계획은 함께 살자고 초대하는 사회적 문화적 합의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240. 사회의 공동선을 증진하고 수호하는 것은 국가의 책임입니다. 보조성과 연대성의 원리에 기초해서, 그리고 충분하게 이루어진 정치적 대화와 합의에 기초해서, 국가는 모든 이의 통합적 발전을 위한 작업에 있어서 근본적인 역할을 수행합니다. 이 역할은 위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 이 역할은 사회적 겸손을 필요로 합니다.
241. 국가와 대화를 나누고, 사회와 대화를 나누면서, 교회는 모든 개별 현안을 위한 해결책을 갖고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회의 다양한 분야와 함께 교회는 각 사람의 존엄과 공동선에 가장 잘 부합하는 그런 프로그램들을 지지하고 지원합니다. 그 일을 할 때 교회는 인간 생활에 근본적인 가치들과 정치 활동에서 드러날 수 있는 확신들을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신앙과 이성과 학문(과학) 사이의 대화
242. 학문(과학)과 신앙 사이의 대화 역시 평화에 기여하는 복음화 활동에 포함됩니다. 실증주의와 과학만능주의가 “확실한 과학의 지식이 아닌 다른 모든 형태의 지식의 유효성을 받아들지 않는” 반면에, 교회는 다른 길을 제시합니다. 그 길은 경험과학에 적합한 학문방법들과 철학, 신학, 그리고 신앙 자체 같은 다른 영역의 지식 사이의 종합을 요청합니다. 철학과 신학, 그리고 신앙 영역의 진실은 자연과 인간의 지성을 초월하는 신비에로 우리를 끌어올려 줍니다.
신앙은 이성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반대로 신앙은 이성을 찾고 신뢰합니다. 왜냐하면 “이성의 빛과 신앙의 빛은 모두 하느님에게서 나오며,” 서로 모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화는 과학의 진보를 존중합니다. 그러면서 교회는 어느 단계에 있든 인간 생명이 중심이며 최고의 가치라는 것을 과학의 진보가 존중하도록, 그 진보에 신앙의 빛을 비추고 자연법이 스며들게 하고자 합니다. 이 대화로 사회의 모든 분야는 풍요로워질 수 있습니다. 이 대화는 새로운 사상의 지평을 열고, 이성의 역량을 확장시킵니다. 이 대화는 조화와 평화의 길이기도 합니다.
243. 교회는 과학의 놀라운 진보를 억누를 뜻이 전혀 없습니다. 반대로 교회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마음에 심어주신 무궁한 가능성을 인정하면서 즐거워하고 기뻐하기까지 합니다. 엄격하게 특정 영역의 탐구에 집중하는 - 과학이 이성이 논박할 수 없는 어떤 결론에 도달할 때마다 신앙은 그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믿는 사람은 사람의 마음을 끌지만 충분히 입증되지 않은 과학적 의견이 신앙의 도그마와 같은 비중을 갖는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때때로 일부 과학자들은 자신의 진술과 주장을 확신함으로써 자신의 과학적 역량의 한계를 넘어섭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는 이성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참되고, 고요하며 생산적인 대화의 길을 차단하는 특정 이데올로기의 전파에 있습니다.
교회일치를 위한 대화
244. 교회일치에 대한 책무는 주 예수님께서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주십시오.”(요한 17,21) 하신 기도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그 분열을 극복할 수 있다면, 교회가 “세례로 교회에 들어왔지만 교회와 완전한 친교를 이루지 못한 교회의 자녀들에게서 교회의 그 고유의 충만한 보편성”을 실현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교 메시지의 신뢰성은 훨씬 더 커질 것입니다. 우리는 동행하는 순례자들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모든 의심이나 불신을 제쳐두고 동료 순례자를 진심으로 신뢰하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찾고 있는 것, 즉 하느님의 얼굴에서 빛나는 평화에로 시선을 돌리는 것입니다. 다른 이를 신뢰한다는 것은 일종의 예술이며 평화도 예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마태오 5,9)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평화의 임무를 수행함으로써, 우리 가운데에서는 물론이고, 우리는 다음과 같은 오랜 예언을 실현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리라.”(이사야 2,4)
245. 이런 전망으로, 교회일치는 인류가족의 일치에 기여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인 바르톨로메우스 1세 총대주교(His Holiness)와 캔터베리 대주교인 로완 윌리엄스 대주교(His Grace)가 시노드에 참여한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참된 선물이면서, 그리스도교임을 드러낸 값진 증언입니다.
246. 그리스도인, 특히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그리스도인 사이의 분열을 드러내는 증언이 갖는 심각성을 고려할 때, 일치의 길을 모색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시급합니다. 이 대륙의 선교사들은 빈번하게 갈라진 그리스도인이라는 악한 표양(스캔들)이 불러일으키는 비판, 불평, 조롱을 언급합니다. 만일 우리가 공유하는 신념에 집중하고, 진리의 위계질서 원리를 명심한다면, 우리는 선포, 서비스, 그리고 증언을 공동으로 드러내기 위해 확실하게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무관심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을 돕는 일치에의 헌신은 더 이상 단순한 외교의 문제나 강요된 굴종의 문제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복음화에 절대 필요한 길이다. 폭력으로 황폐하게 된 여러 나라에서 보이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분열은 평화의 누룩이 되어야 할 사람들에게 갈등의 또 다른 원인이 됩니다.
얼마나 많은 중요한 일들이 우리를 결합시키고 있습니까! 우리가 만일 성령께서 풍부하게 무상으로 하시는 일을 믿는다면, 우리는 서로 얼마나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까! 이는 상대에 대해 그저 더 잘 아는 것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그보다 성령께서 그에게 뿌린 것(은사)을 거두어들이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성령께서 상대에게 그것을 뿌리신 목적은 우리에게도 하나의 은사가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한 가지 예만 들자면, 정교회 형제자매와 나누는 대화에서 우리 가톨릭신자들은 주교의 단체성(episcopal collegiality)의 의미에 대해서, 그 집회성(synodality)의 경험에 대해서 더 많이 배울 기회를 갖습니다. 성령께서는 당신 은사의 교환을 통해 보다 완전한 진리와 선에로 우리를 이끄실 수 있습니다.
유대교와 맺는 관계
247. “하느님의 은사와 소명은 철회될 수 없이기 때문에”(로마 11,29) 유대 민족이 맺은 하느님과의 계약은 결코 철회되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유대 민족을 특별히 존중합니다. 성경에서 중요한 부분을 유대인과 공유하고 있는 교회는 계약의 백성과 그들의 신앙을 교회 자신의 그리스도교적 정체성의 거룩한 뿌리 가운데 하나로 여깁니다.(로마 11,16-18)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유대교를 낯선 종교로 여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유대인들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서서 그분을 섬겨야 할 사람들(1테살로니카 1,9)에 포함시키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는 한 분 하느님을 믿습니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그분의 계시된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248. 이스라엘 자녀들과의 대화와 우정은 예수님의 제자 생활의 일부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우정을 나눴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견뎠고, 계속해서 견디고 있는 끔찍한 박해를, 특히 그리스도인을 포함시킨 박해를, 통렬히 그리고 진정으로 후회하고 있습니다.
249. 하느님께서는 구약의 백성 가운데에서 계속해서 일하시며, 그들이 당신 말씀과 만남으로써 흘러나온 지혜의 보물을 계속해서 낳습니다. 그 때문에 유대교의 가치들을 받아들일 때 교회도 풍요로워집니다. 그리스도교의 일부 믿음이 유대교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것과 교회가 예수님을 주님이며 메시아라고 선포하는 것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상호 보완할 수 있는 것이 많습니다. 즉 히브리 성경 본문을 함께 읽을 수 있으며, 서로 도와서 하느님 말씀의 보고를 조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많은 윤리적 확신과 민족들의 발전과 정의에 대한 공동의 관심을 나눌 수도 있습니다.
종교간 대화
250. 비그리스도교 종교인과의 대화는 다양한 장애와 어려움, 특별히 양 쪽의 근본주의 형식 때문에 장애와 어려움이 있더라도 반드시 진리와 사랑에 대한 개방적 태도를 지녀야 합니다. 종교간 대화는 세상의 평화를 위한 필요조건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다른 종교 공동체는 물론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이 대화는 우선 인간 실존에 관한 대화, 혹은 인도의 주교들이 말한 것처럼, 단순히 “그들에게 개방하고 그들과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것”에 관한 대화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그들의 삶의 방식과 사고방식, 이야기방식을 받아들이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정의와 평화에 기여해야 할 의무를 수행하면서 서로 결합할 수 있습니다. 평화와 정의에 기여할 의무는 우리가 무엇이든 교환할 때 기초원리가 되어야 합니다. 사회의 평화와 정의를 추구하는 대화는 그 자체로 윤리적 헌신입니다. 그것은 단순하고 실질적인 검토 이상의 무엇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사회 상황을 이끌어낼 것입니다. 특정 주제를 다룰 때 기울여야 할 노력은 하나의 과정이 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양측은 정화되고 풍요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노력들은 진리에 대한 사랑을 드러낼 수도 있습니다.
251. 항상 친밀하고 진지한 이 대화에서는, 반드시 대화와 선포 사이의 본질적 유대에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 유대는 교회가 비그리스도인과 맺은 관계를 유지하고 강화시켜 줍니다. 손쉬운 혼합주의는 궁극적으로 전체주의적 몸짓이 될 것입니다. 이는 보다 큰 가치들의 주인이 아닌데도 그 가치들을 무시하려는 이들이 지배하는 전체주의적 몸짓을 말합니다. 참된 개방성은 항상 자신의 심오한 확신에 변함없고, 자신의 정체성에 분명하고 기뻐합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다른 쪽의 확신과 정체성을 개방적으로 이해하고, 대화가 서로를 풍요롭게 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 모든 일에 “예”하는 외교적 개방성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이들을 속이는 방식이며, 진정으로 나눔을 위해 자신이 받은 선물을 그들에게 주지 않으려는 거절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복음화와 종교간 대화는 반대되기는커녕 서로를 지지하고 살찌게 합니다.
252. 이슬람교도와의 관계는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그리스도교 전통의 국가에서 그들은 상당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 전통의 국가들에서 자유롭게 경배할 수 있으며 완전히 사회의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아브라함의 신앙을 간직하고 있다고 고백하며, 마지막 날에 사람들을 심판하실 자비로우시고 유일하신 하느님을 우리와 함께 흠숭하고 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슬람의 경전들은 일부 그리스도교 가르침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마리아를 깊이 존경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무슬림들이 매일의 기도에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지, 충실하게 종교 예절에 참여하고 있는지 경탄할 만합니다. 많은 무슬림들은 생명의 영원성이 하느님에게서 오고 하느님을 향하고 있다는 굳은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도 윤리적 생활과 가장 어려운 사람을 향한 자비로 하느님께 응답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253. 이슬람과의 대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관련 당사자 모두에게 적합한 훈련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들이 흔들림 없고 기쁘게 자신의 정체성을 간직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상대가 갖고 있는 가치를 인정하고, 상대가 강조하는 관심을 존중하고, 공유하는 믿음들에 빛을 비추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이슬람 전통의 국가에서 그리스도인이 존중받고 수용되기를 희망하고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우리의 나라에 온 무슬림 이민자를 존중하고 사랑하며 포용해야만 합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에게 하느님을 흠숭하고 신앙을 실천할 자유를 허용해달라고 이슬람 전통의 나라들에게 요청하며 또 겸손하게 탄원합니다! 이슬람교도가 서구의 여러 나라에서 누리는 그 자유를 생각해서 말입니다! 우리를 좌절시키는 폭력적인 근본주의에 관련된 일들을 대하더라도, 참된 이슬람교도에 대한 우리의 존중이 이슬람 전체에 대한 증오에 찬 일반화를 피하도록 해줘야 합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이슬람과 코란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모든 형태의 폭력과 대립하기 때문입니다.
254. 비그리스도인도, 하느님의 은혜로운 초대로 자기 양심에 충실할 때, “하느님의 은총으로 의롭게” 살 수 있으며,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화은총의 성사적 차원 때문에, 하느님의 활동은 그들 안에서 표징과 의례, 거룩한 표현을 낳기 쉽습니다. 그 다음에 그것들은 다른 이에게 하느님을 향한 여정이라는 공동체적 경험을 깨닫게 해줍니다. 비록 그런 것들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성사의 의미와 효과를 갖고 있지 않지만, 그것들은 비그리스도인을 무신론적 내재론이나 순전히 개인적인 종교 체험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 성령께서 일으켜 세우신 매개들일 수 있습니다. 같은 성령께서는 어느 곳에나 다양한 형태의 실천적 지혜를 가져다주시는데, 이 실천적 지혜들 덕분에 사람들은 고통을 견디고 더 큰 평화와 조화 속에서 삽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수세기에 걸쳐 형성된 이 보화에서 이익을 얻을 수도 있는데, 그 보화는 우리가 믿음을 갖고 사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종교자유의 환경에서 이루어지는 사회적 대화
255. 시노드의 교부들은 종교자유를 기본적 인권으로 보았으며, 종교자유를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습니다. 종교자유는 “자신이 참되다고 판단한 종교를 선택할 자유와 자신의 믿음을 공개적으로 드러낼 자유”를 포함합니다. 건전한 다원주의는 차이를 진정으로 존중하고 있는 그대로 가치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건전한 다원주의는 종교들을 개인의 양심이라는 고요한 어둠 속으로 몰아넣거나, 혹은 교회, 회당, 모스크 건물이라는 폐쇄된 경내로 추방하려고 시도함으로써 종교를 사적인 것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은 사실상 새로운 형태의 차별과 권위주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불가지론자 혹은 믿지 않는 소수를 존중한다고 해서, 그것이 믿고 있는 다수의 확신을 억누르거나, 풍부한 종교적 전통을 무시하는 그런 무차별적 존중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장기적으로 볼 때, 그런 것은 관용과 평화보다는 분노를 키울 것입니다.
256. 종교가 공공생활에 미치는 효과를 고려할 때 우리는 종교를 실천하는 다양한 방법들을 구별해야만 합니다. 지성인들과 진지한 언론인들이 종교의 결점을 말할 때 자주 유치하고 피상적으로 일반화시킵니다만, 그들은 믿는 이들 모두가 - 혹은 종교 지도자들 모두가 - 똑같지 않다는 것을 깨달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일부 정치인들은 차별하는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런 혼동을 이용합니다.
또 다른 경우는 종교적 고전들이 모든 시대에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면서 종교적 확신을 반영하는 글들을 경멸하려는 것입니다. 그런 글들은 새로운 지평을 열고, 사상을 자극하고, 마음과 심장을 확장하는 영구적인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경멸은 일종의 이성주의라는 근시안에 기인합니다. 단순히 종교적 믿음을 배경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그 작품들을 버리는 것이 과연 이성적이고 사리에 맞습니까? 그런 작품들은 심오한 인본주의적 원리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 작품들을 종교적 상징과 가르침으로 채색되었지만 이성에 부합하는 어떤 가치를 담고 있습니다.
257. 우리는 이 진선미의 최상의 표현과 원천이 하느님 안에 있다고 믿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스스로 어떤 종교전통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여기지만, 여전히 진지하게 진리와 선과 미를 추구하는 이들과도 가까이 있음을 느낍니다. 우리는 인간존엄을 수호하고, 백성들 사이의 평화로운 공존을 구축하고, 피조물을 보호하는 데 있어 이들을 귀한 협력자들로 여깁니다. 이방인의 법정 같은 새로운 아레오파기는 만남의 특별한 장소가 됩니다. 이곳에서 “믿는 이와 믿지 않는 이가 윤리, 예술, 그리고 과학의 근본적인 주제들에 관한 대화에, 그리고 초월의 탐구에 관한 대화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문제를 안고 있는 이 세상에서 평화를 찾는 한 길이기도 합니다.
258. 인류의 미래에 분명히 중요한 사회적 현안에서 출발해서, 저는 복음 메시지가 불가피하게 사회적 차원을 갖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자 했으며,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들의 말과 태도와 행동으로 그 메시지를 드러내도록 격려하고자 했습니다.
출처: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번역: 박동호 신부
서울대교구 신정동 성당,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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