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기쁨 - 제3장
제 3 장
복음 선포
110. 저는 오늘날 도전 가운데 몇 가지를 성찰했습니다. 이제 저는 모든 시대 모든 곳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과업을 말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주님으로 명백히 선포하지 않는 복음화는 있을 수 없으며, 모든 복음화 사업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 가장 우선”이 아니라면 복음화는 참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아시아 주교들의 관심을 인정하면서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만일 교회가 “그 섭리대로 가야할 길을 온전히 가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구원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기쁘게 인내심을 갖고 끊임없이 전하는 것, 곧 복음화가 여러분에게 절대적으로 우선적인 것이 되어야만 합니다.”라고 말입니다.
I. 하느님 백성 전체가 복음을 선포합니다
111. 복음화는 교회의 과업입니다. 교회는 복음화를 일으키는 단위로서 계급조직이나 제도 이상의 무엇입니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우선 하느님을 향해 순례의 길을 걷는 백성입니다. 교회는 분명히 삼위일체에 뿌리를 둔 신비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구체적으로 역사 속에 순례하는 백성으로, 그리고 복음화를 실현하는 백성으로 존재합니다. 아무리 제도적으로 표현되더라도 교회는 그 제도적 표현을 항상 초월합니다. 저는 교회에 대한 이런 이해를 간략하게 검토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교회의 궁극적 토대를 하느님께서 자유롭게 그리고 감사하게도 주도하신 데에서 발견됩니다.
모든 이를 위한 하나의 백성
112.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그분 자비의 작품입니다. 어떤 인간적 노력으로도, 그것이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그렇게 위대한 그분의 선물에 칭송을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순전히 그분의 은총으로 우리들 당신께 이끄셔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그분은 당신 성령을 우리 마음에 보내시어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살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변형시켜서 우리 삶으로 당신 사랑에 응답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교회는 하느님께서 주신 구원의 성사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신 것입니다. 교회는 복음화 활동을 통해 그분께 협력합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활동하는 하느님 은총의 도구입니다. 베네딕토 16세는 시노드를 성찰하면서 이점을 매우 훌륭하게 표현했습니다. “첫 말씀, 참된 주도성, 참된 활동은 하느님께로부터 나오며, 우리 자신 그분의 거룩한 주도성에 들어감으로써만, 이 거룩한 주도성에 애원함으로써만, 그분 안에서 그분과 함께 우리도 복음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은총의 우선성의 원리야말로 우리가 복음화를 성찰할 때 항상 빛을 비추는 횃불입니다.
113. 하느님께서 행하셨고 교회가 기쁘게 선포하는 구원은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모든 시대 모든 사람과 결합시키는 길을 내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사람들을 고립된 개인들이 아니라 한 백성으로 함께 부르시기로 하셨습니다. 어느 누구도 개별적으로 스스로, 혹은 자신 만의 노력으로 구원되지 않습니다. 인간 공동체의 생활에는 수많은 인격적 관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인격적 관계는 복합적으로 뒤섞여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를 고려하시면서 우리를 당신께 끌어들이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선택하셨고 부르신 이 백성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배타적이며 선발된 그룹을 만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으라”(마태오 28,19)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오로 성인은 하느님의 백성 안에 있는 우리, 교회 안에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갈라디아 3,28) 하느님과 교회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두려워하거나 무관심한 모든 사람들에게, 저는 이런 말을 하고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숭고한 존경과 사랑을 갖고 당신 백성의 일부가 되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114. 교회가 된다는 것은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에서 빚어진 위대한 계획에 따라서 하느님의 백성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인류 한 가운데서 그분의 누룩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구원을 우리가 사는 세상에 선포하고 가져다주는 것을 뜻합니다. 세상은 종종 길을 잃습니다. 세상이 걷는 여정에는 종종 격려가 필요하고, 희망이 제시되어야 하며, 용기를 불어넣어주어야 합니다. 교회는 자비를 아낌없이 주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환영받는다는 것을, 사랑받는다는 것을, 용서받는다는 것을, 그리고 복음의 삶을 살 수 있도록 격려를 받는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많은 얼굴을 갖고 있는 한 백성
115. 하느님의 백성은 지상의 백성들 안에서 구체화됩니다. 각 백성은 그 나름의 고유한 문화를 갖고 있습니다. 하느님 백성 안에 있는 그리스도교적 생활이 다양하게 표현된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문화의 개념은 유용합니다. 문화는 그 사회의 생활양식, 곧 그 구성원이 다른 구성원과, 다른 피조물과, 하느님과 관계 맺는 특정한 방식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이해되는 문화는 백성의 삶 전체를 포괄합니다.
각 백성은 그 역사의 여정에서 정당한 자율성을 갖고 문화를 발전시킵니다. 그것은 인간이 “그 본성에서 반드시 사회생활이 필요하며”, 사회 안에서 현실과 관계를 맺는 구체적인 방법을 발견함으로써 사회와 관련해서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인간은 항상 어떤 문화 안에 있습니다. “본성과 문화는 매우 밀접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은총은 문화를 가정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선물은 그 선물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문화에서 구체화됩니다.
116. 2천년 동안 수많은 민족들이 신앙의 은총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꽃을 피웠으며, 그들 고유의 문화가 갖는 언어로 이 신앙을 후대에 전했습니다. 어떤 공동체가 구원의 메시지를 받아들일 때마다 성령께서는 변형시키는 복음의 힘으로 그 문화를 풍요롭게 했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그리스도교가 단순하게 하나의 문화적 표현만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교는 자기 본성에 절대로 어긋나지 않으면서, 복음 선포와 교회의 전통에 흔들림 없는 충실성을 갖고,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고 정착시킨 민족과 문화가 갖는 다양한 얼굴들을 반영할 것이다.” 하느님의 선물을 체험한 다양한 백성들 안에서, 그 나름 고유한 문화에 따라서, 교회는 그 참된 보편성을 드러내며 “그 다양한 얼굴들이 갖는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복음화된 민족이 갖고 있는 그리스도교 관습 속에서, 성령께서는 교회에 계시의 새로운 모습들을 보여주고 교회에 새 얼굴을 줌으로써 교회를 아름답게 꾸미십니다. 토착화를 통해 교회는 “백성들에게 그들의 문화와 함께 교회 고유의 공동체를 이끌어 들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문화는 복음을 선포하고 이해하고 사는 방식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긍정적인 가치와 형식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교회는 서로 다른 문화가 갖는 가치들을 채택하고 “패물로 단장한 신부”(이사야 61,10 참조)가 됩니다.
117. 제대로 이해한다면, 문화의 다양성은 교회 일치에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께서 보내신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변형시키고 복된 삼위일체의 완전한 친교에 들어갈 수 있게 하십니다. 복된 삼위일체의 완전한 친교에서 모든 것이 그 일치를 이룹니다. 성령께서는 하느님 백성의 조화와 친교를 구축하십니다. 성령께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랑의 유대인 것처럼, 성령께서는 바로 그 조화 자체이십니다.
은사의 풍성한 다양성을 가져온 분은 바로 성령이십니다. 그분은 결코 획일성이 아니라 많은 측면을 가졌으면서도 조화를 꾀하는 일치를 창조하십니다. 복음화는 성령께서 교회에 부어주신 이 다양한 보물들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교를 단일문화와 단조음을 가진 것으로 생각했다면 육화의 논리를 우리는 정당하게 평가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문화가 복음의 가르침과 그리스도교 사상의 발달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지만, 그렇다고 계시된 메시지가 그 문화와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계시된 메시지는 문화를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문화, 혹은 그리스도교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은 문화의 복음화에 있어서, 아무리 아름답고 오래된 것이라 하더라도, 특정 문화형식을 복음과 함께 부과하는 것은 본질이 아닙니다. 우리가 선포하는 메시지가 항상 어떤 문화적 외모를 갖지만, 교회 안에 있는 우리가 자신의 문화를 불필요하게 숭배하게 될 수 있고, 그럼으로써 참된 복음화의 열정보다는 환상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118. 오세아니아의 주교들이 교회가 “활동하는 그리스도의 진리를 지역의 문화와 전통에서 이해하고 제시하는 것을 개발할 것을” 요청했으며, “교회의 신앙과 생활이 각 문화에 적합한 정당한 형식으로 표현될 수 있게 하기 위해 모든 선교사들이 원주민 그리스도인과 조화를 이루며 활동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우리는 모든 대륙의 민족들에게 그들의 그리스도교 신앙을 표현할 때, 유럽의 민족들이 특정 역사에서 발전시킨 표현 양태를 모방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은 어떤 특정 문화의 표현과 이해의 테두리 안에 가둬둘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단일 문화도 우리의 구속이라는 신비를 남김없이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모두 선교하는 제자입니다
119. 성령께서는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 안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거룩하게 하는 힘으로 활동하십니다. 그분은 항상 우리를 복음화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이 기름부음 덕분에 거룩합니다. 성령의 인도는 하느님 백성을 신앙고백에 있어서 오류가 없도록 합니다. 이것은 신앙에 있어서 잘못이 없다는 뜻입니다. 비록 하느님의 백성이 그 신앙을 설명하지 못할 수는 있더라도 말입니다. 성령께서는 진리로 하느님 백성을 인도하여 구원에로 이끄십니다.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신비로운 사랑의 일부로서, 하느님께서는 믿는 이들 전체가 신앙 감각을 갖추도록 했는데, 이 신앙의 감각은 인류가 무엇이 진정으로 하느님의 것인지를 식별하도록 돕습니다. 성령의 현존은 그리스도인에게 거룩한 실재들과 같은 종류의 것들을 주십니다. 그리고 인류가 그 실재들을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하는 지혜를 주십니다. 인류가 그 거룩한 실재들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단을 갖고 있지 못할 때조차도 말입니다.
120. 세례의 효력으로 모든 하느님 백성은 선교하는 제자가 되었습니다.(마태오 28:19 참조) 교회 안에서 그 지위가 무엇이든, 혹은 신앙에 있어 훈련 수준이 어느 정도이든,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이 복음화의 일꾼입니다. 전문가들이 계획을 수립하고 나머지 신앙인들은 단순한 수동적 수령자가 되는 그런 복음화 계획을 그리는 것은 적절하지 못합니다. 새 복음화는 모든 세례 받은 사람의 인격적 개입을 요구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지금 여기서’ 복음화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라는 도전을 받습니다.
실제로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밖으로 나가 그 사랑을 선포하는데 많은 시간이나 오랜 훈련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만난 그만큼 선교사가 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제자”이며 “선교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항상 “선교하는 제자”라고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확신하지 못한다면, 첫 사도들을 바라봅시다. 첫 사도들은 예수님의 시선과 마주치자마자 즉시 그분을 기쁘게 선포하러 밖으로 나갔습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41)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자마자 선교사가 되었고 많은 사마리아 사람이 그분을 믿게 되었습니다. “증언하는 말을 하였기 때문에”(요한 4,39) 말입니다. 바오로 성인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다음 “곧바로 예수님을 선포하였습니다.”(사도행전 9,20; 22,6-21 참조)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121. 물론 우리 모두가 복음화의 일꾼으로 일하면서 성숙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더 나은 훈련을 원하고, 복음을 더 또렷하게 증언하고 사랑하기 위한 더 나은 훈련을 원합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를 복음화 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복음화의 사명을 연기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각자가 어디에 있든 예수님을 전달할 방법들을 찾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에게 구원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분명하게 증언해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불완전함에도 가까이 계신다는 것, 그분의 말씀, 그분의 힘을 우리에게 건네시며 삶에 의미를 부여하십니다. 그분이 없다면, 여러분의 삶이 변해버린다는 것을 여러분은 압니다. 여러분이 깨달은 것, 여러분을 도와 살게 한 것, 여러분에게 희망을 준 것,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그것을 여러분은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불완전함이 핑계가 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사명은 평범함에 빠져 머물지 말고 계속해서 성장하라고 끊임없이 자극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제시해야 할 신앙의 증언은 우리로 하여금 바오로 성인처럼 말하게 합니다. “나는 이미 그것을 얻은 것도 아니고 목적지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차지하려고 달려갈 따름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이미 나를 당신 것으로 차지하셨기 때문입니다.”(필리비 3,12-13)
민중의 경건함이 갖는 복음화 하는 힘
122. 같은 방식으로, 그들 가운데 복음이 토착화된 여러 민족들이 바로 복음화 사명을 수행하는 적극적인 집단주체이거나 집단일꾼입니다. 각 민족이 그 고유한 문화의 창조자이며 그 고유한 역사의 주역이기 때문입니다. 문화는 한 민족이 끊임없이 창조하는 역동적인 실재입니다. 각 세대는 나름의 존재론적 환경에 접근하는 일련의 방식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줍니다. 다음세대는 그 고유한 도전에 직면했을 때 물려받은 문화를 다시 공식화합니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그가 속한 문화의 아들이 되며 동시에 아버지가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일단 복음이 어떤 민족 사이에 토착화되면, 그들의 문화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그 민족은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복음도 전달합니다. 따라서 복음화를 토착화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하느님의 선물을 자신들의 재능에 맞추어, 자신들의 삶으로 번역합니다. 그럼으로써 그 민족이 받아들인 신앙을 증언하고, 새롭고 훌륭한 표현과 함께 풍요롭게 합니다. 그래서 “한 민족은 끊임없이 자신들을 복음화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민중이 갖는 경건함이 중요성을 갖습니다. 이 경건함은 하느님 백성의 자발적 선교활동을 참되게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입니다. 물론 그 과정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123. 민중의 경건함은 일단 신앙을 받아들이면 신앙이 어떤 문화의 형식으로 구체화되며 끊임없이 전달된다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한 때 사람들이 낮게 보았던 이 민중의 경건함은 공의회 이후 수십 년간 다시 한 번 제대로 된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바오로 6세의 사도적 권고 <현대의 복음선교>(Evangelii Nuntiandi)는 이 분야에 관해서 결정적인 자극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바오로 6세는 민중의 경건함이 “가난하고 소박한 사람만 알 수 있는 하느님에 대한 갈망을 드러낸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이 민중의 경건함은 사람들이 믿음을 증언하는 것이 문제가 될 때 거의 영웅적 희생과 관대함을 갖게 해준다”고 했습니다. 오늘날에 이르러 베네딕토 16세는 라틴 아메리카와 관련해 이야기하면서 민중의 경건함이 “가톨릭교회의 보물”이며, 그 안에서 “우리는 라틴 아메리카 백성의 영혼을 보고 있다”고 했습니다.
124. 아파레시다 문헌은 성령께서 대중의 경건함에 부어주신 풍요로움을 무상의 주도성이라고 기술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민중의 경건함을 통해 자기의 신앙을 표현하고 있는 사랑받는 이 대륙에서 주교들은 이 대중의 경건함을 “민중의 영성” 혹은 “백성의 신비주의”라고도 했습니다. 그것은 “진정으로 기층문화에 육화된 영성입니다.” 그것은 내용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추론적인 설명보다는 상징의 방법으로 그 내용을 보다 잘 발견하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신앙이 행동에 있어서 ‘하느님을 믿는 것’ 보다는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 것’을 더 강조합니다. 그것은 “신앙을 살아가는 정당한 방식입니다. 교회를 느끼는 방식이며 선교사가 갖는 태도입니다.” 그 자체로 선교사가 되게 하는 은총을, 스스로의 테두리에서 걸어 나와 순례의 길을 나서게 하는 은총을 가져다줍니다. “자기 아이들과 더부어, 초대한 또다른 이들의 손을 잡고 함께 성전을 향해 여행하고 다른 형태의 대중의 경건함에 참여하는 것은 그 자체로 복음화 하고 있다는 몸짓이 됩니다.” 우리 자신 이 선교의 힘을 억누르거나 조절할 생각을 하지 맙시다!
125. 이 실재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착한 목자의 눈으로 그것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착한 목자는 심판하려하지 않고 사랑하려 합니다. 사랑으로 태어나 함께 자란 애정으로만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경건함 안에 현존하는, 특히 그들의 가난 속에 있는 신학적 생명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아픈 자녀를 돌보는 어머니들의 굳건한 신앙을 생각합니다. 그 어머니는 비록 신앙조목에 대해 거의 제대로 알지 못하더라도 로사리오에 매달리거나, 초라한 집안에서 촛불을 켜놓고 마리아의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바치며 모든 희망을 걸거나, 혹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부드러운 사랑의 눈으로 응시합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이런 행동을 두고 순전히 인간적인 노력으로만 하느님을 찾으려는 것이라고 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 행동들은 우리 마음에 부어주신 성령께서 하신 활동으로 성장한 신학적 생명을 드러낸 것입니다.(로마 5,5)
126. 토착화한 복음의 결실인 대중의 경건함은 우리가 결코 가볍게 봐서는 안 되는 복음화의 활동력입니다. 우리가 이를 가볍게 여긴다면 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알아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 대신 끝이 없는 토착화의 과정을 심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그 활동력을 촉진하고 강화해야 합니다. 민중의 경건함을 드러낸 것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해독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들이야말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신학의 터전이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새 복음화를 모색하는 시점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사람을 직접 만나자
127. 오늘날 교회가 선교의 뜻 깊은 쇄신을 체험하려고 할 때, 일상의 책임으로서 우리 각자에게 부여된 설교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이웃이건 완전히 낯선 사람이건 우리가 만나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과 관련됩니다. 선교사가 어떤 가정을 방문했을 때 하는 대화 중에 드러나는 것처럼 그것은 비공식적 설교입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끊임없이 예수님의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가져다줄 준비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견하지 않은 때에 어떤 곳에서든, 거리에서, 도시의 광장에서, 노동을 하는 도중에, 여행 중에도 그런 일은 생길 수 있습니다.
128. 항상 존중하는 마음으로 점잖게 행하는 이 설교에서 첫걸음은 인격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의 기쁨, 희망,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관심을 이야기할 때, 혹은 마음을 움직이는 다른 많은 요구를 할 때가 인격적인 대화를 나눠야 합니다. 그렇게 한 다음에야 비로소 하느님의 말씀을 꺼낼 수 있습니다. 성경구절이나 관련된 이야기를 읽어줌으로써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항상 근본적인 메시지, 곧 당신 자신을 우리를 위해 건네주신 분의, 당신의 구원과 우정을 우리에게 주시고 살아계신 분의,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인격적 사랑을 명심해야 합니다.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에게 이 메시지는 증언이 될 것입니다. 그는 이 증언을 반드시 겸손하게 전해야 합니다. 이 메시지는 풍부하고 심오해서 언제나 우리의 파악 범위를 넘어선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래서 항상 배우려는 자세를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메시지가 직접 전달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인간적 증언과 몸짓을 통해 전달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성령께서 그 특정 상황에서 인도하시는 방법으로 전달될 수도 있습니다. 만일 적절한 상황이 허용된다면, 이 형제적이며 선교적인 만남은 그 사람이 드러내고 싶어 하는 관심사와 관련된 짧은 기도로 마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그들은 자기의 관심을 누가 듣고 이해하고 있다는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느님 앞에 있다는 것,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이 실제로 그들의 생활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129. 그러나 우리는 복음의 메시지를 절대로 변할 수 없는 내용으로 여기고, 외워서 배운 고정된 형식으로만 전달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복음 메시지의 소통은 기술하거나 유형화할 수 없는 수많은 다른 방법으로 이루어지며, 수많은 몸짓과 표지를 갖고 있는 하느님 백성은 복음 메시지 소통의 집단적 주체입니다. 만일 복음이 어떤 문화에서 구체화된다면, 그 메시지는 더 이상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만 전달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가 소수 종교인 그런 나라에서는,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서로 복음 선포를 격려하면서, 특정 교회들은 더 적극적으로 토착화를 준비하고 시작해야 합니다. 복음은 각 문화에 적합한 범주로 선포됩니다. 따라서 이런 지역에서는 복음이 그 특정 문화와 새로운 종합을 창조하는 것이야말로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 진행은 항상 더디며, 그 때문에 우리는 몹시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심과 두려움 때문에 우리의 용기를 꺾는다면, 창조적인 사람이 되기보다는 편한 상태로 머물러 그 어떤 진전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경우 우리는 역사의 과정에서 아무런 적극적 역할도 맡지 못할 것이고, 대신 교회가 활기를 잃고 있는데도 우리는 그저 방관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복음화하는 친교에 봉사하는 은사
130. 성령께서는 복음화 하는 전체 교회를 다양한 은사로 풍요롭게 합니다. 성령의 이 선물들은 교회 쇄신과 교회 건설을 위한 것입니다. 이 선물들은 보관하라고 작은 집단에 위임하고 안전하게 맡긴 일종의 유산 같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교회의 몸에 통합되어, 중심이신 그리스도에게 이끌리고, 그리고 마침내 복음화하려는 추진력에 도달합니다. 어떤 은사가 진정성을 갖고 있다는 분명한 표지는 그 교회적 성격에 있습니다. 즉 그 은사의 진정성은 모든 사람의 선을 위해 거룩하고 충실한 하느님 백성의 생활과 조화롭게 통합될 수 있는 능력에 있습니다. 성령께서 가져오신 새롭고 참된 어떤 것은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 다른 선물이나 영성을 가리지 않습니다. 복음의 핵심을 보다 더 직접 겨냥하고 있는 은사라면, 은사의 행사는 그만큼 더 교회적일 것입니다. 은사가 진정하고 신비로운 결실을 가져오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비록 친교가 고통스러울 때조차, 친교 안에서 행사되어야 합니다. 이런 도전(친교)에 응답하는 가운데, 교회는 이 세상에서 평화의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131. 사람 사이, 공동체 사이의 차이들은 가끔 불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양성의 원천이신 성령께서는 모든 것에서 좋은 것을 가져올 수 있으며 그 좋은 것을 복음화에 유용한 수단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다양성은 항상 성령의 도움으로 조화를 이루어야만 합니다. 그분만이 다양성, 복수성, 다중성을 불러일으키며 동시에 일치를 가져오실 수 있습니다. 우리 입장에서 우리가 다양성을 갈망할 때, 우리는 자신 안에 갇혀 배타적이고 불화를 일으키게 됩니다. 비슷하게 우리가 우리의 인간적 계산에 기초해서 일치를 창조하려고 시도할 때마다, 우리는 일률적 획일성을 강요하고 말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의 사명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문화, 사상, 교육
132. 다른 문화에 복음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은 그것을 직업, 학문, 과학의 영역에도 선포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 이성, 그리고 학문 사이의 조우를 의미합니다. 이 때 교회는 신뢰성, 즉 일종의 창의적인 호교론의 문제에 관해서 새로운 논리와 접근법의 개발을 기대합니다. 이 창의적인 호교론은 모든 사람에게 복음에의 문을 많이 열어주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메시지 선포를 위해 이성과 과학의 일부 범주들을 채택할 때, 그 범주들은 복음화의 도구가 됩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화된 것입니다. 채택된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원래대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밝게 비추고 쇄신하기 위한 성령의 수단으로 바뀝니다.
133. 복음 전파자가 각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혹은 복음이 전체 문화에 선포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목 신학 뿐만 아니라 다른 학문이나 인간 경험과 대화하는 신학은 복음의 메시지를 어떻게 다른 문화적 배경과 그룹에 가장 잘 전할 수 있는지를 식별하는 데 가장 중요합니다. 복음화에 헌신하는 교회는 학문과 문화, 세상과 대화를 나누려는 신학자들의 학문적 노력과 그 은사를 높이 평가하며 격려합니다. 저는 신학자들이 그 봉사를 교회의 구원 사명의 하나로 수행해주시를 바랍니다. 그러나 신학자들이 그렇게 할 때, 교회와 신학은 복음화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과 탁상공론의 신학에 만족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134. 대학은 학문간 교류하고 통합하는 방법으로 이 복음화 헌신을 정교하게 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탁월한 환경이 됩니다. 언제나 교육 활동과 복음의 분명한 선포를 결합시키려고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가톨릭 학교는 문화의 복음화에 있어서 가장 가치 있는 자원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에게 적대감을 갖고 있어 적합한 방법을 찾는데 더 많은 창의성을 가져야 할 그런 나라와 도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II. 강론
135. 그러면 전례 안에서 가르치는 것을 살펴봅시다. 이는 사목자가 진지하게 고려해야 합니다. 저는 특히 그리고 어느 정도 세세하게 강론과 그 준비에 대해 생각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중요한 직무에 대해 너무나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우리는 그 관심을 그냥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강론은 사목자가 자기 백성과 나누는 친밀성과 소통의 능력을 판단하는 초석입니다. 우리는 신자들이 강론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신자들과 신품을 받은 교역자 모두 강론 때문에 힘들어 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평신도는 강론을 듣는 것이, 성직자는 강론을 하는 것이 고통스럽습니다! 그런 경우라면 슬픈 일입니다. 강론은 실제로 성령과 하느님의 말씀과 쇄신과 성장의 끊임없는 원천에 대한 강렬하고 행복한 체험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136. 가르침에 있어 우리의 자신감을 회복합시다. 우리를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려는 분은 하느님이라는 것을, 그분께서 인간의 언어를 통해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신다는 것을 확신합시다. 바오로 성인은 선포의 필요성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말을 빌어서 다른 사람에게 가고 싶어 하시기 때문입니다.(로마 10,14-17 참조)
선포하는 사람의 말로 주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끌어들이셨습니다. 그들은 사방에서 그분의 말씀을 듣기 위해 왔습니다.(마르코 1,45 참조)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을 듣고 놀랐습니다.(마르코 6,2 참조) 그들은 그분께서 권위를 갖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아챘습니다.(마르코 1,27 참조)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려고”(마르코 3,14) 세우신 사도들은 그들의 말로써 모든 민족을 교회의 품에 불러들이셨습니다.(마태오 16,15. 20 참조)
전례 안의 강론
137. 다음의 진술은 기억할만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례로, 특히 성찬례에서 선포하는 것은 묵상과 교리를 위한 시간이라기보다는 하느님과 당신 백성이 대화를 나누는 시간입니다. 이 대화에서 구원의 위대한 업적이 선포되며, 거룩한 계약의 요구사항들이 계속적으로 재론됩니다.” 강론은 성찬례에서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특별히 중요합니다. 강론은 성사적 친교에 도달하는 하느님과 당신 백성 사이의 대화에서 최고의 순간입니다. 그래서 다른 모든 형식의 교리교육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강론은 주님께서 당신 백성과 이미 세워놓으신 대화를 한 번 더 채택하는 것입니다. 선포하는 사람은 자신의 공동체의 마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어디서 하느님을 향한 열망이 생생하게 살아있고 불타오르는지, 어디서 한때 사랑의 대화였던 그 대화가 방해를 받아서 메마르게 되었는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138. 강론은 대중매체가 전하는 것과 같은 오락의 한 형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대신 강론은 기념하는 것에 의미와 생명을 주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전혀 다른 양식입니다. 왜냐하면 강론은 ‘전례’라는 구조 안에 위치한 선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강론은 간결해야 하고, 연설이나 강의와 모양을 갖춰서는 안 됩니다. 강론을 하는 한 시간 동안이나 계속되면 청중의 주목을 끌 능력을 갖고 있을 수 있지만, 그 경우에 그의 말이 신앙의 기념보다 더 중요한 것이 될 것입니다. 만일 강론이 그렇게 너무 길어지면, 전례 기념에 두 가지 특성 요소, 즉 균형과 리듬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전례라는 배경에서 가르침이 이루어질 때 그것은 하느님께 바치는 것의 일부가 되어야 하고, 그리스도께서 기념 중에 부어주시는 은총의 중재가 되어야 합니다. 전례의 기념에서 강론을 한다는 것은 강론이 회중과 강론을 하는 사람을 모두 생활을 변화시키는 성체 안의 그리스도와 맺는 친교로 이끌어야 합니다. 그래서 강론을 하는 사람의 말은 신중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회중은 주님의 일꾼이 아니라 주님을 주목하게 될 것입니다.
어머니의 대화
139. 우리는 하느님의 백성이 성령의 끊임없는 내적 활동으로 항상 스스로를 복음화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원리가 설교가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그것은 교회가 어머니라는 것, 어머니가 자기 자녀에게 말하는 같은 방법으로 교회가 설교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어머니가 자녀에게 가르친 것을 아이는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신뢰합니다. 자녀는 자기가 사랑 받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더구나 착한 어머니는 하느님께서 자기 자녀에게 주신 모든 것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녀는 자녀의 관심에 귀를 기울이고, 그 관심에서 무엇인가를 배웁니다. 한 가정을 감싸는 사랑의 정신은 어머니와 아이를 대화로 이끕니다. 그 대화에서 어머니와 아이는 가르치고 배우고, 교정을 체험하며, 좋은 것을 깨달으면서 성장합니다.
그와 비슷한 것이 강론에서 생깁니다. 복음을 불러일으켰고, 교회 안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같은 성령께서는 설교가가 하느님 백성의 신앙을 듣게 하고, 성찬례 때마다 옳게 가르치는 방법을 찾게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설교는 백성의 마음에서 그리고 그들의 문화에서 생명의 원천을 발견합니다. 그 원천의 도움으로 설교가는 무엇을 반드시 말해야 하고 그것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모국어를 듣는 것을 좋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앙에 관해서도 우리는 “어머니의 문화”인 모국어(2 마카베오7,21. 27 참조)로 듣는 것을 좋아합니다. 우리한테는 더 잘 듣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이 언어는 용기와 힘과 열정을 자극하는 그런 음악과 같은 것입니다.
140. 어머니와 회중이라는 이 환경은, 주님과 당신 백성 사이에서 대화가 이루어지는 이 환경은 설교가의 친밀감, 그 목소리의 따뜻함, 말하는 태도의 솔직함, 자세에서 나오는 기쁨으로 강화되어야 합니다. 강론이 지루할 때조차도 이 어머니와 회중의 정신이 현존한다면, 강론은 반드시 결실을 낼 것입니다. 마치 어머니의 지루한 조언이 적절한 때에 자녀의 마음에서 결실을 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141. 우리는 당신의 고상한 가르침과 요청으로 보통 사람을 끌어들이고, 당신의 신비를 모든 이에게 드러내기 위해, 주님께서 당신 백성과 대화할 때 사용한 자료들에 감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백성을 바라보시는 방법에 그 비밀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분은 그들의 약점과 결점 그 이상을 보셨습니다. “너희들 작은 양 떼야,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 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기로 하셨다.”(루카 12,32) 예수님께서는 그 정신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성령 안에서 기쁨으로 가득차서, 그분은 작은이들을 당신께 보내주신 아버지를 찬양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루카 10,21)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과 말씀하시는 것을 진정으로 기뻐하십니다. 설교가는 그 똑같은 기쁨을 그의 청중에게 전하기 위해 매진해야만 합니다.
마음에 불을 놓는 말씀
142. 대화는 진리의 소통 그 이상의 것입니다. 대화는 말하는 기쁨에서 이루어집니다. 대화는 말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서로의 사랑을 표현하는 사람들을 풍요롭게 합니다. 이 풍요로움은 목적이 아니라, 대화 속에서 서로를 나누는 사람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순전히 교훈적이거나 교의적인 말씀, 혹은 성경 주석에 관한 강의로 남는 그런 말씀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강론은 강론에서 발생하는 마음의 소통, 준성사적 성격을 갖는 마음의 소통에는 부족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10,17)
강론에서, 진리는 선과 미와 서로 협조합니다. 강론의 진리는 추상적 진리들이나 냉정한 삼단논법을 다루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선의 실천을 격려하기 위해 사용한 이미지가 갖는 아름다움을 전달합니다. 신자들의 기억은 마리아의 기억처럼 하느님께서 하신 놀라운 것들과 함께 흘러넘쳐야만 합니다. 신자들의 마음은 그들이 받은 사랑의 실천과 기쁨에서 나온 희망을 갖고 자랍니다. 신자들의 이 마음은 성경의 한 마디 한마가 명령이라기보다는 선물이라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143. 설교의 토착화라는 도전은 사상이나 분리된 가치들이 아니라, 하나로 종합한 것을 선포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 종합이 이루어지는 곳은 여러분의 마음입니다. 하나의 종합으로 백성을 비추는 것과 분리된 사상으로 백성을 비추는 것 사이의 차이는 마음으로 느끼는 열정과 지루함 사이의 차이와 같습니다. 설교가에게는 훌륭하지만 어려운 임무가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과 그 백성의 마음, 곧 사랑하는 마음을 결합시키는 임무 말입니다. 하느님과 그 백성 사이의 대화는 그 사이의 계약을 강화시키고, 사량의 유대를 결합시킵니다.
강론 중에 믿는 이들의 마음은 침묵을 유지하며,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게 합니다. 주님과 그의 백성은 어떤 중개도 없이 직접 수많은 방법으로 서로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강론에서 주님과 그의 백성은 누군가 도구로 봉사해주기를, 또 자기가 선택해도 되는 대화 방법으로 자기들의 느낌을 표현해 줄 누군가를 원합니다. 말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매개 수단입니다. 말은 말하는 두 사람만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제시하는 중개자를 필요로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선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하고, 우리 자신은 예수님을 위한 여러분의 종입니다.”(2코린토 4,5)라는 신념에서 나온 것입니다.
144. 마음으로 말한다는 것은 우리 마음이 단순히 불타오른 것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충만한 계시가 마음을 밝혔으며, 전 역사에 걸쳐 교회와 충실한 백성의 마음속에서 하느님 말씀이 여행하신 길이 마음을 밝혔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미천했을 때 세례를 통해 우리를 포용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이 정체성은 회개한 자녀로서, 마리아의 마음에 드는 자녀로서, 우리한테 또 다른 포용을 바라게 합니다. 즉 영광 속에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로운 포용 말입니다. 우리 백성이 이 두 포용 가운데 살고 있다고 느끼도록 돕는 것은 복음을 가르치는 사람에게는 어렵지만 아름다운 임무입니다.
III. 가르침의 준비
145. 설교의 준비는 오랜 시간의 연구, 기도, 성찰, 그리고 사목의 창의성을 쏟아야만 하는 중요한 과업입니다. 저는 잠시 멈춰서 강론을 준비하는 한 방법을 제시하고 싶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 제안이 당연하겠지만, 저는 이 귀중한 일에 양질의 시간을 바쳐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임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어떤 사목자는 수행해야 할 과제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그 같은 준비가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그럼에도, 저는 감히 매주 이 과제를 위해 개인시간과 공동시간 가운데 충분한 시간을 바쳐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다른 중요한 활동에 시간을 덜 할애해서라도 말입니다.
강론 중에 활동하시는 성령께 대한 신뢰는 단순히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이며 창의적인 것입니다. 성령께 대한 신뢰는 우리 자신과 모든 능력을 하느님께서 이용하실 수 있는 도구로 바칠 것을 요구합니다. 준비되지 않은 설교가는 “영성적”이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은사에 대해 무책임하고 불성실한 사람입니다.
진리에 존경심을 가집시다
146. 성령을 기도 속에서 부른 다음, 첫걸음은 성경 본문에 우리의 모든 주의를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 본문이 우리의 강론의 기반이 되어야합니다. 어떤 특정 본문이 갖는 메시지에 머물러 그것을 이해하려고 할 때마다 우리는 “진리에 대한 존경심”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이 우리보다 항상 탁월하다는 것과 “우리는 말씀의 주인도 소유자도 아니며, 그 파수꾼, 전달자, 종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마음의 겸손입니다. 말씀에 대한 이런 겸손한 태도와 경외하는 존경심은 그 말씀을 왜곡하지 않기 위해 거룩한 두려움과 많은 주의를 기울여 말씀을 연구하는데 시간을 할애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성경의 본문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다른 모든 관심거리들을 제쳐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성경 본문에 시간과 관심과 집중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다른 모든 관심사를 놔두고 차분하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빠르고, 쉽고, 즉각적인 결과를 바라면서 성경의 본문을 읽으려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강론에 대한 준비에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나 사물에 한참의 고요한 시간을 바칩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하느님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말씀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을 말입니다. 이 사랑 때문에 우리는 필요한 시간만큼 충분히 많은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모든 참된 제자들이 “말씀하십시오. 주님, 당신의 종이 듣고 있습니다.”(2사무엘 3:9)라고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147. 무엇보다 우리가 읽은 말씀의 의미를 확실히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분명해 보이지만 항상 고려하지 못하고 있는 어떤 것을 주장하고 싶습니다. 즉, 우리가 연구하는 성경의 텍스트는 2-3천년이나 된 것이며, 그 언어는 오늘날 언어와 매우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언어로 번역된 말씀을 이해한다고 생각하더라도, 그것이 거룩한 저자가 말하고 싶어한 것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문헌 분석이 제공하는 다양한 도구들은 잘 알려졌습니다. 즉 반복하거나 강조하는 단어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 본문의 구조와 특이한 말투를 확인하는 것, 여러 등장인물이 수행한 역할을 고려하는 것 따위가 그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목표는 본문의 세세한 것을 전부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목표는 본문의 주요 메시지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구조와 통일성을 부여하는 메시지 말입니다.
만일 설교가가 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의 가르침은 거의 아무런 통일성도 질서도 갖추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런 연결고리도 없으며 다른 사람을 자극할 수도 없는 그런 여러 생각들을 단순하게 모아놓은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중심 메시지는 저자가 가장 중요하게 소통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저자의 생각뿐만 아니라 그가 만들어내고 싶었던 효과가 무엇인지 알게 합니다. 만일 본문이 위로하기 위해 쓴 것이라면, 그 본문은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데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권고하기 위해 쓴 것이라면 교의를 가르치는 데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에 관해 무엇인가 가르치기 위해 쓴 것이라면, 다양한 신학적 의견을 전개하는 데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찬미와 선교적 파견을 위한 하느님의 부르심을 전하기 위해 쓴 것이라면, 최근 뉴스에 관해 말하기 위해 그 본문을 사용하지 않도록 합시다.
148. 분명히, 본문에서 중심이 되는 메시지의 의미를 합당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메시지를 교회가 전한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연결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성경 일부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 영감을 불어넣었다는 것과, 어떤 특정 지역의 백성이 그들의 인격적 체험에 바탕을 두고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도록 하신다는 것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이게 성경 해석에서 중요한 원리입니다. 그것은 같은 성경의 다른 가르침과 모순이 되는 잘못되거나 부분적인 해석을 방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르쳐야 할 본문이 특별하고 독특하게 강조한 것을 우리가 약화시킬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지루하고 헛된 가르침이 갖고 있는 결점 가운데 하나는 바로 선포된 본문이 본래 갖고 있는 힘을 전달하지 못하는 그 무력함입니다.
말씀을 인격화 합시다
149. 설교가는 “무엇보다도 하느님 말씀과 인격적으로 대단히 친숙해야만 합니다. 말씀에 대한 언어학적 혹은 주석적 지식이 분명히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는 말씀이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깊게 파고들어 자신 안에 새로운 전망이 생길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부드러운 마음과 기도하는 마음을 갖고 그 말씀에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르치는 말씀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자라고 있는지 성찰하면서 강론을 준비할 때, 매일 그리고 매주 우리의 열정을 쇄신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교역자의 거룩함의 정도는 말씀의 선포에 실제 효과를 본다”는 것을 잊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을 시험하시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설교합니다.”(1테살로니카 2,4)는 바오로 성인의 말씀대로입니다. 만일 우리가 가르칠 말씀을 제일 먼저 듣는 사람이 되기를 열렬히 바란다면, 그 말씀은 분명히 하느님의 충실한 백성에게 전달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에 가득한 찬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마태오 12,34)이기 때문입니다. 주일 독서 말씀이 갖는 그 모든 광채가 먼저 사목자의 마음에서 울려 퍼진다면 신자들의 마음에서도 그 말씀이 울려 퍼질 것이다.
150.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지만 그 말씀으로 빛이 나지 않으면서 다른 이에게는 많은 것을 요구하는 그런 교사들에게 화를 내셨습니다.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마태오 23,4) 야고보 사도는 “많은 사람이 교사가 되려고 하지는 마십시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우리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야고보 3,1)라고 권고하셨습니다.
가르치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먼저 철저하게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행동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자신의 일상에서 구체화 시켜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르침은 결실을 많이 내는 진지한 활동이 될 것입니다. “설교가가 계획한 것을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그런 활동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이유 때문에, 우리가 설교 내용을 준비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다른 사람을 감동시킬 그 말씀에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말씀은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내는”(히브리 4,12) 것처럼 살아있으며 능동적인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매우 큰 사목적 중요성을 갖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목격한 것에 대한 증언을 선호합니다. 사람들은 “마치 자기들이 하느님을 보고 있는 것처럼, 복음전파자 자신이 잘 알고 친숙한 하느님에 대해 말해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151. 우리는 결점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복음의 오솔길을 따라서 걸으면서 계속해서 성장하고 또 성장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무기를 내려놓지 맙시다. 핵심은 설교가가 하느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구원하셨으며, 그분의 사랑은 항상 마지막으로 말씀하신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런 아름다움과 조우했을 때, 설교가는 빈번하게 자신의 생활이 마땅히 영광을 받으셔야 할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낄 것이며, 그렇게 위대한 사랑에 보다 완전하게 응답하기를 진정으로 갈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열린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시간을 갖지 않는다면, 만일 하느님의 말씀이 그의 생활을 움직이고, 그에게 도전하고, 그를 재촉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만일 그 말씀과 함께 기도할 시간을 바치지 않는다면, 그는 정말 거짓 예언자, 사기꾼, 천박한 협잡꾼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빈곤을 인정하고 헌신하면서 성장하기를 열망함으로써, 그는 항상 자신을 그리스도께 바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사도행전 3,6)라고 한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살아있고, 자유로우며, 창의적인 존재로서 우리를 이용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분은 당신 말씀이 다른 이들에게 전달되기 전에 우선 우리 마음으로 들어가기를 바라십니다.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지적 분야만이 아니라 전 존재에 걸쳐 설교가를 감화시키고 사로잡아야 합니다. 말씀을 재촉하신 성령께서는 “교회의 시초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성령에 사로잡히고 인도되는 모든 설교가 안에서 활동하십니다. 그 성령께서 설교가의 힘으로는 발견할 수 없는 말씀을 그의 입술 위에 얹어주십니다.”
영적 독서
152. 주님께서 당신 말씀에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싶으신 것을 듣고, 우리 자신이 성령으로 변형되는 특별한 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 입니다. 그것은 기도 때에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이 우리를 비추고 새롭게 하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성경 독서로 기도하는 것은 본문의 중심 메시지를 규명하기 위해 설교가가 연구하는 것과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로, 그것은 그 연구로 시작해야만 하고, 그 다음에 그 같은 메시지가 자기의 삶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지를 식별하는 것입니다. 한 본문을 영적 독서하는 것은 글자 그대로의 의미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본문을 우리한테 편리한 대로, 우리가 이미 결정한 것을 확인하는 데 이용하고, 우리의 사고방식에 맞추어서 읽기 쉽습니다. 이런 독서는 자칫하면 거룩한 어떤 것을 우리를 위하여 이용하게 하고, 이러한 혼동을 하느님 백성에게 전달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가끔 “사탄도 빛의 천사로 위장합니다”(2코린토 11,14)는 말씀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153. 하느님 앞에서 본문을 침착하게 읽는 동안에는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묻는 것이 좋습니다. “주님, 이 본문이 ‘저한테’ 하는 말은 무엇입니까? 당신께서 이 본문으로 바꾸고 싶으신 저의 삶은 무엇입니까? 제가 이 본문 때문에 불편한 것이 무엇입니까? 제가 왜 이 본문에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까? 혹은 제가 이 본문에서 기쁨을 느끼는 것은 무엇입니까? 저를 움직이는 이 말씀은 무엇에 관한 것입니까? 저를 사로잡는 것은 무엇입니까? 왜 그것이 저를 사로잡습니까?”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노력할 때 유혹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불편함이나 부담을 느끼고 외면하는 것입니다. 다른 일반적 유혹은 이 본문이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그 의미를 자신한테는 적용하지 않으려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문의 분명한 의미를 약화시키기 위해 핑계거리를 찾는 일도 생길 수 있습니다. 혹은 우리가 아직 준비하지도 않은 어떤 결정을 요청하심으로써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너무 많을 것을 요구하시는 것은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 때문에 하느님 말씀과 만나면서 더 이상 즐거움을 얻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어느 누구도 아버지 하느님보다 인내심이 강한 분이 없다는 것과, 어느 누구도 그분보다 더 이해하고 기다리는 분이 없다는 것을 잊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분은 항상 앞으로 나서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가 준비되지 않았는데도 완전한 응답을 요구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분은 단지 우리가 자신의 삶을 성실하게 바라보고 자신을 당신 앞에 정직하게 내놓으라고, 그리고 우리가 아직 성취할 수 없는 것을 당신께 청함으로써 계속해서 성장하라고 하실 뿐입니다.
백성의 말을 들읍시다
154. 설교가는 백성의 말을 들어야 하며, 백성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려내야 합니다. 설교가는 말씀을 묵상해야 하지만, 백성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방법으로 설교가는 “삶과 세상의 열망, 풍요로움과 한계, 세상이 기도하는 방법, 세상이 사랑하는 것, 그리고 삶과 세상을 관찰하는 것을 배웁니다. 그런 것들이 인간적 모임의 이런 저런 특징입니다.” 그러면서 설교가는 “실제 백성에,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에, 그들의 표지와 상징에, 그들의 물음에 답을 내놓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설교가는 성서 본문을 인간 상황에, 즉 하느님 말씀의 빛을 얻고자 외치고 있는 그들의 체험에 연결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관심은 똑똑함이나 계산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매우 경건하고 사목적인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그것은 “사건에서 하느님의 메시지를 읽기 위한 영적 감수성”이며, 단순히 흥미로운 이야기 거리를 찾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이런 저런 상황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의 준비는 복음적 식별 연습이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의 빛 속에서 “하느님께서 역사의 환경 속에서 울려 퍼지게 하시는 부르심을 알아보려고 노력합니다. 이 환경에서 그리고 이 환경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믿은 이들을 부르십니다.”
155. 그런 노력을 기울일 때, 재회의 기쁨, 절망의 순간, 혼자가 되는 두려움, 다른 이들이 고통에 대한 동정심,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배려와 같은 보통 사람이 겪는 체험이 우리에게는 부족하겠지만, 그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백성의 삶에 실제로 영향을 주는 것에 대해 폭넓고 깊은 감수성을 개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도 묻지 않는다면 절대로 응답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합시다. 백성의 관심을 끌기 위해 최근 소식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은 텔레비전이 전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말씀이 개종, 경신례, 형제애와 봉사에의 헌신 따위를 요청하실 때, 그 하느님 말씀이 강렬하게 울려 퍼질 수 있도록 어떤 사실과 스토리로 시작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현안에 대한 설교가의 해설을 듣고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사람들도 항상 있을 것입니다.
강론의 자원
156. 어떤 사람은 무엇을 말해야 할지 알기 때문에 자신이 훌륭한 설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즉 설교를 구체적으로 구성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백성이 듣지 않거나 음미하지 않는 것을 보고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아마도 메시지를 제시하는 적절한 방법을 찾는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복음화의 내용이 갖는 분명한 중요성이 절대로 그 수단과 방법을 가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가르치는 방법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심오한 영적 관심과 비슷합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사명에 봉사하는 데 우리의 모든 재능과 창의성을 투입함으로써 하느님 사랑에 응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이웃에게 형편없는 것을 주지 않으려는 훌륭하고 적극적인 이웃사랑을 드러냅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 우리는 사람들의 마음에 가장 잘 다가가기 위해서 강론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조언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많은 것을 간결하게 말하고, 알면서도 침묵하는 사람이 되어라”(집회 32,8)
157. 몇 가지 예를 들어서, 우리의 가르침을 풍요롭게 하고, 보다 호소력 있게 할 수 있는 실질적인 자원들을 찾아봅시다.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가르칠 때 이미지들을 사용하는 방법을, 즉 어떻게 마음 속에 상을 그리게 할 수 있는지를 배우는 것입니다. 때로는 사례들이 특정 요점을 분명히 하는데 사용됩니다. 그러나 이 사례들은 보통 마음에만 호소합니다. 반면에 이미지들은 우리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사람들이 더 잘 음미하고 받아들이는데 도움이 됩니다. 사람을 사로잡는 이미지는 메시지를 낯익은 것으로, 편한 것으로, 실질적인 것으로, 일상과 관련된 것으로 만듭니다. 훌륭한 이미지는 사람들이 메시지를 맛볼 수 있게 하고, 복음을 향한 욕구를 불러일으켜 그 의지를 움직이게 할 수 있습니다. 옛 스승께서 저에게 말씀하신 훌륭한 강론은 “생각, 감성, 이미지”를 가져야만 합니다.
158. 바오로 6세는 “신자들은 가르침에서 많은 것을 기대합니다. 그리고 단순하고, 명료하고, 직접적이며, 제대로 적용된 가르침이라면 그 가르침에서 커다란 이익을 얻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단순성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이 헛된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사용하는 언어가 백성이 이해할만한 것이어야 합니다. 설교가는 자주 청중의 일상 언어가 아닌 단어, 곧 학습 중에 배운 단어와 특별한 배경을 갖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런 단어들은 신학이나 교리교육에 적합하지만 대다수 그리스도인은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설교가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자기에게 너무 익숙해서 모든 사람이 당연히 그 단어를 이해하고 사용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백성의 언어에 맞추어 하느님의 말씀으로 그들에게 다가가기를 원한다면, 그들의 삶을 공유하고 사랑의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성과 명료성은 다릅니다. 우리의 언어는 단순할 수 있지만, 우리의 가르침은 분명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런 가르침은 제대로 구성되지 않거나, 논리적 전개가 결여되어 있거나, 혹은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다루려 하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강론의 주제가 단일하고, 문장 사이의 분명한 관계와 질서를 가져서, 백성이 설교가의 말을 쉽게 따라잡아 그 줄거리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159. 훌륭한 강론의 다른 특징은 그것이 긍정적이란 것입니다. 무엇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지적하는 강론보다는 무엇을 더 잘 할 수 있는지를 제시하는 강론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어떤 경우라도, 강론이 부정적인 어떤 것에 대한 주의를 끌었다면, 마찬가지로 긍정적이며 바람직한 가치를 가리키려 해야 할 것입니다. 강론이 불평, 탄식, 비판, 그리고 비난의 늪에서 허우적거리지 않으려면 말입니다. 긍정적인 가르침은 항상 희망을 주고, 미래를 가리키며, 우리를 부정에 덫에 걸린 채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보다 더 호소력 있는 가르침을 펼치기 위해 사제, 부제 그리고 평신도가 자원들을 발굴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만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IV. 보다 깊은 선포(케리그마)의 이해와 복음화
160. 주님의 선교 명령에는 신앙의 성장이 포함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오 28,20) 따라서 첫 번째 선포가 지속적인 양성과 성숙을 요구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복음화는 성장의 과정을 겨냥합니다. 그 성장 과정은 각 사람과 그의 삶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을 진지하게 취하는 것입니다. 복음화는 이 성장의 열망을 자극해서, 우리 각자가 온 마음을 다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디아 2,20)라고 말할 수 있어야합니다.
161. 이런 성장의 소명이 주로 혹은 배타적으로 교의 형성과 관한 것이라고 보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당신 사랑에 응답하는 방법으로 보여주신 모든 것을 “지키는” 것과 관련이 있어야 합니다. 이는 다른 덕목들과 함께 첫째 계명이면서 가장 큰 계명인 새 계명, 우리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가장 잘 알아보게 하는 그 계명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명백하게, 신약성경 저자들이 그리스도교의 도덕적 메시지의 핵심을 제시하려고 할 때마다, 이웃사랑을 핵심 조건이라고 제시합니다. “‘자기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그러므로 이웃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8,10) 이는 바오로 성인의 말씀입니다. 바오로 성인에게 사랑의 계명은 율법을 완성할 뿐만 아니라 율법의 핵심과 목적입니다. “사실 모든 율법은 한 계명으로 요약됩니다.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계명입니다.”(갈라디아 5,14)
바오로는 자기의 공동체에게 그리스도인 생활을 사랑 안에서 성장하는 여정으로 제시합니다. “여러분이 서로 지니고 있는 사랑과 다른 모든 사람을 향한 사랑도...주님께서 더욱 자라게 하시고 충만하게 하시길... 빕니다.”(1테살로니카 3,12) 마찬가지로 야고보 성인도 그리스도인이 율법 전체를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는 “성경에 따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 하신 지고한 법을”(야고보 2,8) 이행하라고 권고합니다.
162. 다른 한편 응답과 성장의 이 과정은 항상 하느님의 선물을 뒤따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마태오 28,19)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 아버지의 무상의 선물과 그분 은총의 우선성(에페소 2,8-9; 1코린토 4,7 참조)은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영광을 드리는 그 변치 않는 성화를 가능하게 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변형될 수 있습니다.
선포와 신비의 전달인 교리교육
163. 교리교육은 신앙의 성장에 기여합니다. 우리는 이미 사도좌와 여러 주교회의가 발행한 교도권을 갖는 다수의 교리교육 관련 문헌과 보조 자료를 갖고 있습니다. 저는 특히 사도적 권고 <Catechesi Tradendae>(1979), <교리교육의 일반 지침>(the General Catechetical Directory 1997), 그리고 그 내용을 이 자리에서 다시 다룰 필요가 없는 다른 문헌들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믿는 몇 가지를 간략하게 고찰하고 싶습니다.
164. 교리교육에서도, 우리는 첫 선포 혹은 케리그마가 갖는 근본적인 역할을 재발견했습니다. 케리그마는 모든 복음화 활동과 교회 쇄신 노력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케리그마는 삼위일체적입니다. 성령의 불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였습니다. 그분은 죽음과 부활로써 우리에게 아버지의 무한한 자비를 보여주시고 전하십니다. 교리교사의 입술에서는 다음의 첫째 선포가 끊임없이 울려 펴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분은 당신을 구원하기 위해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분은 당신을 비추고 당신에게 힘을 불어넣어주고, 당신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매일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
이것이 첫째 선포인 것은 그것이 처음에는 존재하고, 그 후에 잊어지거나 다른 더 중요한 것으로 대치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중심 선포이기 때문에 질적인 의미에서 첫 째 선포인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방법으로 반드시 자꾸 들어야하는 선포, 우리가 교리 교육 전 과정에 걸쳐 이런 저런 방법으로 반드시 밝혀야 하는 선포, 어떤 수준이든 어떤 순간이든 선포해야 할 것이기에 ‘첫째’ 선포인 것입니다.(126) 그 때문에도, “사제는 - 다른 모든 교회 구성원처럼 - 그 자신 끊임없이 복음화 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계속 성장해야만 합니다.”
165. 우리는 교리교육을 통해서 케리그마 보다 더 “확실한” 무엇으로 인도하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처음의 그 선포보다 더 확실하고, 심오하고, 분명하고, 의미가 있으며 지혜로 가득한 것은 없습니다. 모든 그리스도교 교육은 케리그마를 더 깊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교리교육의 활동은 언제나 케리그마를 밝게 비추고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교리교육이 다루는 모든 의미를 보다 완전하게 이해하도록 해줍니다. 케리그마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무한함을 향한 열망에 부응하는 메시지입니다. 케리그마가 중심이라는 것은 오늘날 가장 필요한 요소들을 강조합니다.
교리교육은 오늘날 가장 필요한 것이 인간의 도덕적 종교적 의무 이전에 하느님 구원의 사랑임을 드러내야 합니다. 교리교육은 진리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자극해야 합니다. 교리 교육은 기쁨, 격려, 생생함, 그리고 조화의 균형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것들에 대한 가르침은 때로는 복음적이라기보다는 철학적인 몇 가지 교의 정도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에게 메시지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즉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에게는 접근가능성, 대화준비성, 인내, 심판하지 않는 따뜻함과 환대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166. 최근 수십 년 동안 발전한 교리교육의 다른 측면은 신비를 전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전체 공동체를 포함해서 체험이 점진적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이 하나이고, 그리스도교의 시작을 드러낸 전례의 표지들을 새롭게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많은 규범과 프로그램들이 신비를 전하는 데에 있어서 쇄신 작업과 관련해서 아직까지 충분하게 검토되지 못했습니다. 신비를 전하는 데에 있어서 쇄신은 교육에 대한 각 공동체의 식별에 기초해서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 있습니다. 교리교육은 말씀의 선포 가운데 하나이며, 항상 그 말씀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적합한 배경에 따른 호소력 있는 제시, 설득력 있는 표상과 기호 사용, 폭넓은 성장과정의 주입, 그리고 모든 인간적 요소를 듣고 응답하는 공동의 여정 안에 통합시키는 것도 필요합니다.
167. 교리교육의 모든 형태는 “아름다움의 길”을 잘 따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이 옳고 참된 무엇일 뿐만 아니라,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삶이 아름다운 무엇이며, 삶을 새로운 광채와 심오한 기쁨으로 채울 수 있는 것임을 보여준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참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모든 것은 주님이신 예수님과 조우하는 길이라고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학적 상대주의를 계발하는 것과는 무관합니다. 미학적 상대주의는 진리, 선, 그리고 미 사이의 불가분 유대를 가볍게 여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조우는 미에 대해 새롭게 존중하는 것입니다. 즉 미를 인간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하나의 수단으로 존중하고, 미를 부활하신 그리스도라는 진리와 선이 인간의 마음 속에서 빛나게 할 수 있는 수단으로 존중합니다.
만일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말한 대로, 우리가 아름다운 것만 사랑한다면, 절대미의 계시이신 강생하신 아드님은 최상으로 사랑할 만한 분이며, 우리를 당신 사랑의 유대 속으로 끌어들이십니다. 그래서 ‘아름다움의 길’로 교육하는 것은 우리가 신앙을 전수하려는 노력의 일부여야 합니다. 각 개별 교회는 복음화에 있어 새로운 “비유의 언어”로 신앙을 전달하기 위해 과거의 유산 위에 기초하면서 현대의 광범위하고 다양한 표현양식을 얹은 예술의 이용을 장려해야 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표징과 표상, 말씀을 소통하고 구체화하는 세상, 그리고 다른 문화 배경에서 존중받는 다양한 형태의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일에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그것들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눈에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데 전통적인 것이 아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특별히 매력적이라 한다면, 그것들 역시 과감하게 찾아내야 합니다.
168. 교리교육의 도덕적 요소는 복음이 갖는 생명의 길에 대한 충실성에 있어 성장을 촉진합니다. 이 도덕적 요소는 지혜의 삶, 자기 목표를 달성하는 삶, 그리고 자신을 풍요롭게 하는 삶이 얼마나 매력적이며 이상적인 것인지를 반복해서 강조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런 긍정적 메시지의 빛 속에서는 도덕적 삶을 위험에 빠뜨리는 죄악을 배척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는 불길한 예언을 하는 전문가, 온갖 위험과 일탈을 들춰내는 완고한 재판관이 아닙니다. 그보다 우리는 의욕을 돋우는 제안을 전하는 기쁜 심부름꾼, 복음에 충실한 삶에서 빛을 발하는 선과 미의 수호자여야만 합니다.
성장 과정에서의 인격적 동반
169. 역설적으로 익명성 때문에 힘들어 하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의 삶의 세세한 것에 집착하는 문화에서, 부끄러움을 모르고 병적인 호기심에 집착하는 문화에서, 교회는 필요할 때마다 다른 사람을 보다 더 교감하면서 자세하게 살펴봐야만 합니다. 이 세상에서 성품을 받은 교역자와 다른 사목 활동가는 그리스도의 친밀함과 그의 인격적 시선의 향기를 선사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모든 사람에게 - 사제, 수도자와 평신도 - 이런 “동반의 예술”을 전수해야 할 것입니다. “동반의 예술”은 다른 사람이 서 있는 거룩한 땅에서 신발을 벗는 법을 가르칩니다.(탈출기 3,5 참조) 이 동반하는 걸음걸이는 그리스도교 생활 안에서 치유하고, 해방하며, 성장을 장려하는 우리의 친밀함과 우리의 따뜻한 시선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확고하고 안정된 것이어야 합니다.
170. 자명한 것 같지만, 영적 동반은 다른 이들을 하느님께 더 가까이 인도해야 합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참된 자유를 누립니다. 어떤 이들은 하느님을 피할 수 있다면 자유로워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실존적으로 고아, 무력한 사람, 오갈 데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자기 주변만 맴돌며 아무 곳에도 가지 않음으로써, 순례자가 되는 것, 떠돌이가 되는 것을 그만둡니다. 만일 그들의 지기몰두를 지지하는 어떤 치료 같은 것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아버지께로 향하는 순례가 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들과의 동반은 역효과를 낳을 것입니다.
171. 그 어느 때보다 오늘날 우리한테는 타인과 동반하는 경험을 갖추고, 신중함과 이해심, 인내심과 성령께 순응하는 자세가 요구되는 과정에 정통한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들은 무리를 흩어버리려 하는 늑대로부터 양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듣는 기술을 습득해야 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듣는 것 이상입니다. 소통에서 듣는 것은 친밀함을 가능하게 하는 마음의 개방입니다. 이 친밀함 없이는 참된 영적 만남이 생길 수 없습니다. 들으면 바른 태도와 말을 찾을 수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그냥 방관자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그 같이 존중하고 공감하며 들음으로써만 참된 성장의 길로 들어설 수 있으며, 하느님의 사랑에 완전하게 응답하고, 그분이 우리 삶에 뿌리신 씨앗의 열매를 맺는 그런 그리스도교적 이상을 향한 열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누구나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가질 수 있으나, 그러면서 끈질긴 “불순한 성향” 때문에 덕목을 실천하는 데 머뭇거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의 뜻을 온전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덕목의 유기적 조화는 항상 그리고 필연적으로 ‘습관 속에’(in habitu) 존재합니다. 비록 어떤 형태의 조건이 그런 고결한 습관들의 ‘작동’을 방해할 수 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따라서 “백성이 한걸음씩 신비를 온전하게 취할 때까지 한걸음씩 인도할 교수법”이 필요합니다. 진정으로 자유롭고 책임감 있는 결정을 할 수 있는 성숙한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복자 피터 페이버는 “시간은 하느님의 사자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172. 다른 사람을 동반하는 사람은 각 사람이 처한 하느님 앞에서의 처지와 그분 은총 속에 있는 그의 삶이 ‘신비’라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누구도 이 신비들을 겉으로는 완전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복음은 다른 이의 행동으로 나타난 객관적인 악을 확인한 것을 기초로 해서, 그의 행동을 바로잡아 그가 성장하도록 도우라고 우리에게 말합니다.(마태오 18,15 참조) 그러나 그들의 책임과 유죄를 심판하지 말아야 합니다.(마태오 7,1; 루카 6,37 참조)
그렇게 훌륭하게 동반하는 사람은 절망이나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이 스스로 치유되도록, 스스로 씨름하도록, 스스로 십자가를 끌어안도록, 스스로 모든 과거를 뒤로 하고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전혀 새로운 길을 나서도록 초대합니다. 다른 이가 우리와 동반하며 우리를 돕는다는 인격적 체험과, 우리와 동반하는 그에게 개방하는 인격적 체험은 다른 사람에 대해 공감하고 인내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그 인격적 체험은 그들의 신뢰를 얻는 올바른 길을 찾도록 해줍니다. 또 우리가 마음을 열게 하고 성장할 준비를 갖추는 올바른 길도 가르쳐줍니다.
173. 진정한 영적 동반은 항상 복음화에 봉사한다는 배경에서 시작하고 발전합니다. 바오로와 티모테오와 티토의 관계는 그들의 사도적 활동 중에 이루어진 이 영적 동반과 양성의 좋은 예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각 도시에 머무르면서 “해야 할 남은 일을 정리하는”(티토 1:5; 1티모테오 1:3-5 참조) 사명을 맡긴 바오로는 그들에게 개인적 생활과 사목 활동에 관한 규칙도 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강제적 동반이나 독립된 자기실현 같은 것들과는 분명하게 구별됩니다. 선교의 제자들은 선교의 제자들을 동반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중심으로
174. 하느님 말씀은 오직 강론만 살찌게 하지 않습니다. 복음화 자체가 듣고, 묵상하고, 기념하고, 증언하는 그 말씀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성경은 복음화의 원천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속적으로 말씀을 듣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교회가 지속적으로 스스로 복음화 되려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교회가 복음화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이전보다 더 완전히 교회의 모든 활동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절대적입니다. 특별히 성찬례에서 듣고 기념해야 할 하느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을 키우고 내적으로 힘을 불어넣어주어, 일상생활에서 복음을 확실하게 증언할 수 있게 합니다. 이미 말씀과 성사를 대립시킨 옛 관행을 벗어난 지 상당히 오래되었습니다. 살아있으며 효력을 내는 그 말씀의 선포는 성사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것이며, 성사에서 그 말씀은 최대의 유효성을 달성합니다.
175. 성경 연구는 모든 믿는 이에게 열려 있는 문이어야 합니다. 계시된 말씀야말로 우리의 신앙을 전수하려는 모든 노력과 교리교육을 근본적으로 풍요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복음화를 위해서는 하느님 말씀과 친숙해져야 합니다. 복음화는 교구, 본당, 교회 단체들이 개별적으로 또 공동으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기를 장려하면서도, 진지하고 지속적인 성경연구의 기회를 제공할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맹목적으로 하느님을 찾지 않습니다. 혹은 그분이 먼저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맹목적으로 기다리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이미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아직 우리에게 계시되지 않은 것이 있어서 알아야 할 것이 남아있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계시된 말씀이라는 장엄한 보물을 받아들이도록 합시다.
출처:<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번역: 박동호 신부
서울대교구 신정동 성당,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