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기쁨 - 제2장
제2장
위기에 처한 공동의 헌신
50. 복음화와 관련된 기본적인 물음을 다루기 전에 우리가 살고 노동해야 할 환경을 간략하게 다루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실질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처치 방법을 수반하지 않는 “진단의 과잉”이란 말을 자주 듣습니다. 우리는 불편부당하고 치료적인 방법을 채택함으로써 현실 문제를 다루는 순수한 사회학적 분석의 도움을 언제나 제대로 받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여기서 제가 제시하고 싶은 것은 복음적 식별에서 훨씬 중요한 것일 텐데, 선교에 나서는 제자가 취하는 이 접근은 “성령의 힘과 빛으로 육성되는” 접근입니다.
51. 현실을 자세하고 완전하게 분석하는 것이 교황의 임무는 아니지만, 저는 모든 공동체가 “시대의 징표를 무엇보다도 꼼꼼하게 탐구하기”를 권고합니다. 이것은 사실 막중한 책임입니다. 실제 어떤 현실을 효과적으로 다루지 않는다면 비인간화의 과정을 밟을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다시 되돌리기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것이 하느님의 계획과 충돌하는 것인지 분명하게 구별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선한 정신의 움직임을 선택하고 악한 정신의 움직임을 거부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저는 보편적 교도권의 여러 문헌들이 다양하게 분석한 것들뿐만 아니라, 지역과 대륙의 주교들이 제시한 것까지도 승인합니다. 이 교황권고에서 저는 사목적 전망에서 교회선교를 쇄신하는 추진력을 약화시키거나 제한할 수 있는 몇 몇 요소들을 간략하게라도 살펴볼 것을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하느님 백성의 존엄함과 생활을 위협하기 때문에, 혹은 교회의 기구들과 교회의 복음화 사업들에 직접 관련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I. 오늘날 세상의 도전들
52. 우리 시대 인류는 많은 분야에서 이루어진 진보에서 보듯이 역사의 전환점을 맞고 있습니다. 의료, 교육, 정보통신 같은 분야에서 인간의 복지를 증진시키는 일들을 칭송할 수밖에 없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대다수의 현대인이 하루하루 겨우 살고 있으며,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수많은 질병이 퍼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두려움과 절망에 사로잡혀 비틀거리고 있습니다. 이른바 부유한 나라에서도 그렇습니다. 삶의 기쁨은 수시로 사라집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존중이 없어지고 폭력은 기세를 올립니다.
불평등은 점점 더 또렷해집니다. 그것은 일종의 생존 투쟁입니다. 그것도 인간이 존엄성을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상태에서 치러지는 것입니다. 이런 전대미문의 변화는 과학과 기술 분야에서 양적, 질적으로 집중적인 발전을 이루어졌고, 그 발전된 과학과 기술을 자연과 생명 분야에 즉각적으로 적용함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지식과 정보의 시대에 살고 있는데, 그것은 새로운 권력, 곧 특정할 수 없는 종류의 권력을 이끌어냈습니다.
배제의 경제를 거부합시다
53.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은 인간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분명한 한계를 제시한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는 배제와 불평등의 경제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해야만 합니다. 그 같은 경제는 사람을 죽입니다. 어떻게 나이 든 노숙자의 죽음은 뉴스가 되지 않으면서, 주식시장이 2포인트 하락한 것은 뉴스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이것은 배제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는데, 다른 한편에선 음식을 버리는 상황에서,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서 있을 수 있습니까? 이것은 불평등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오늘날 모든 것은 경쟁과 적자생존의 법칙을 따릅니다. 이 법칙에 따르면 힘 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을 희생시켜서 살아갑니다. 그 결과로 대다수의 사람이 배제되고 주변화 되고 맙니다. 노동도 못하고, 가능성도 없고, 벗어날 수단도 없이 말입니다.
인간은 자신을 사용하고 버려도 되는 소비재로 여겨집니다. 우리는 “버릴 수 있는”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이 문화가 퍼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착취와 억압에 관한 문화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것입니다. 배제된 이들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일부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배제된 이들은 사회의 하층민이나 그 변두리 사람이나, 공민권을 빼앗긴 사람들이 아니지만, 그들은 더 이상 사회의 한 부분조차 되지 못합니다. 배제된 이들은 “착취를 당한 ”사람들이 아니라 버려진 사람들이며, “쓰다 남은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54. 이런 맥락에서 어떤 이들은 낙수이론을 계속해서 옹호하고 있습니다. 이 낙수 이론은 자유시장으로 이루어진 경제성장이 세상에 더 큰 정의와 포용을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견해는 사실로 입증된 적이 결코 없습니다. 오히려 경제 권력으로 무장한 이들의 선심과 지금의 경제 시스템을 신성시하는 작업들에 대해 조악하고 순진한 신뢰를 보이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는 동안 배제된 이들은 여전히 기다리고만 있을 뿐입니다. 다른 이들을 배제하는 생활 방식을 유지하는 것이, 혹은 이기적 이상에 몰두하는 것이 바로 무관심의 세계화를 발전시킨 것입니다.
거의 모두가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이,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에 아무런 동정심도 느끼지 못하게 되었고, 다른 사람의 고통에 눈물을 흘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마치 이 모든 것이 내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책임이라는 듯이 말입니다. 번영의 문화는 우리를 죽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시장이 새로운 것을 내놓으면 전율합니다. 그러는 동안 아무런 기회도 갖지 못하여 망연자실하며 사는 사람들은 단순한 구경꾼으로 전락합니다. 물론 그들은 우리에게 아무런 감정도 일으키지 못합니다.
돈이라는 새로운 우상을 거부합시다
55. 이런 상황을 일으킨 원인 가운데 하나를 사람이 돈과 맺은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돈이 우리 자신과 사회를 지배하는 것을 조용히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금융 위기가 인간이 으뜸임을 부정하는 인간의 위기에서 비롯된 것임을 간과합니다. 황금 송아지를 경배하던 과거(탈출 32:1-35)가 무자비한, 그러나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등장했습니다. 이는 돈이라는 우상으로, 참된 인간적 목적을 갖고 있지 않은 비인간적인 경제의 독재로 나타납니다. 금융과 경제에 영향을 주고 있는 전 세계적 위기는 그 경제적 불균형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인간에 대한 무관심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람을 단지 무엇인가 필요한 존재, 곧 소비가 필요한 존재로 환원시키고 있습니다.
56. 소수의 소득이 증대되는 동안, 행복한 소수가 즐기는 번영에 비추어, 대다수의 사람의 소득격차는 더 벌어집니다. 이 불균형은 시장과 금융투자의 의 절대자율을 옹호하는 이데올로기들의 결과입니다. 따라서 이 이데올로기들은 공동선의 불침번이 되라는 임무를 맡고 있는 국가의 권리, 즉 어떤 형태로든 시장과 금융을 통제할 수 있는 권리의 행사를 거부합니다. 그럼으로써 보이지도 않는, 그러나 실질적인 새로운 독재자가 나타났는데, 이 독재자는 일방적으로 그리고 임의로 그 법칙과 규칙을 강요합니다. 부채와 대부이자의 누적 역시 각 나라의 경제 잠재력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하게 하며, 시민들이 실재 구매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여기에다 광범위한 부패와 자기 잇속만 차리는 탈세도 더해야 하는데, 이는 전 지구적 차원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권력과 소유에의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수익을 늘일 수만 있다면 자연처럼 훼손하기 쉬운 것은 무엇이든 먹어치우는 이런 시스템에서, 신성한 것이 되어버린 시장의 이익 앞에서 모든 것은 무력해지고, 시장의 이익이 유일한 규칙이 되어버립니다.
봉사하기는커녕 지배하는 금융 제도는 거부합시다
57. 이런 태도의 배경에는 윤리의 거부, 그리고 하느님의 거부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윤리는 비웃어도 되는 조롱거리쯤으로 간주됩니다. 윤리는 지나치게 인간적인 것, 곧 생산적이지 않은 것으로 간주됩니다. 왜냐하면 윤리는 돈과 권력을 상대적인 것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윤리가 이런 현상을 인격을 실추시키고 상황을 조작한다고 단죄하기 때문에, 윤리를 위협으로 느낄 뿐입니다. 실제로, 윤리는 시장의 범주를 벗어난 어떤 헌신적인 응답을 요구하시는 하느님께로 인도합니다.
시장의 범주가 절대화될 때 하느님은 오직 통제할 수 없는 그 무엇, 경영할 수 없는 그 무엇, 위험하기까지 한 그 무엇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완전한 자기실현과 모든 형태의 노예화로부터의 자유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윤리(비 이데올로기적인 윤리)는 시장이 균형과 보다 인간적인 질서를 가질 수 있게 해줍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저는 금융 전문가들과 정치 지도자들이 고대 현인의 격언을 명심하기를 바랍니다. “자기의 부를 이웃과 나누지 않는 것은 그들의 것을 훔치는 것이며, 그들의 생계를 빼앗는 것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부는 나만의 것이 아니라 그들이 것이다.”
58. 윤리적인 요소들을 고려하여 금융 개혁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것은 정치지도자들의 접근방법에 대한 확실한 변화를 요구합니다. 저는 정치지도자들이 결단력을 갖고, 또 미래를 바라보며 이 도전에 응답하기를 촉구합니다. 물론 각각의 경우가 갖는 특성을 무시하지 않아야 합니다. 돈이란 인간에게 봉사해야지 절대로 지배해서는 안 됩니다! 교황은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똑 같이 사랑합니다. 그러나 교황에게는 부자는 반드시 가난한 사람을 돕고, 존중하며,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사람에게 환기시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관대한 연대를 권고합니다. 저는 경제와 금융이 인간을 위한 윤리적 접근으로 돌아올 것을 권고합니다.
폭력을 양산하는 불평등을 거부합니다
59. 오늘날 우리는 많은 곳에서 보다 더 큰 안전을 요구하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에서 그리고 백성 사이의 불평등과 배제가 없어지지 않으면, 폭력을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가난한 이들 가운데 더 가난한 백성들이 폭력을 휘두른다는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평등한 기회가 없다면, 이러한 다양한 형태의 공격과 갈등은 증가하기 좋은 토양을 만나고 결국에는 폭발할 것입니다. 어떤 사회든 - 지역, 대륙, 지구 차원이든 - 과격한 그룹에게 여지를 남겨둔다면, 어떠한 정치 프로그램이나 사법부나 감시 시스템에 쏟는 정치적 자원도 안정을 확실하게 보장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불평등이 시스템에서 제외된 사람들의 폭력적 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경제 시스템이 그 뿌리부터 부당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선이 확산되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악을 묵인하는 것 역시 그 악영향을 확산시켜 어떤 정치적 사회적 시스템도, 그것이 아무리 견고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소리 나지 않게 붕괴시키고 맙니다. 만일 모든 행동이 그런 결과를 가져온다면, 한 사회의 제도화된 악은 지속적인 해체와 죽음의 가능성을 갖습니다.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의 기초가 될 수 없는 것은 부당한 사회구조들로 구체화된 악입니다. 우리는 소위 “역사의 종말”(지금이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시장 자유주의로 역사가 완성되었다는 의미의)과는 거리가 멉니다. 왜냐하면 지속가능하고 평화로운 발전의 조건들은 아직 적절하게 구체화되고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60. 오늘날 경제 메카니즘은 터무니없는 소비를 촉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평등과 고삐 풀린 소비주의는 사회조직에 겹겹이 해를 끼치고 있습니다. 불평등은 궁극적으로 폭력을 낳습니다. 무력에 의존하는 그 폭력은 해결할 수도, 해결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무력에 의존하는 폭력은 안전에 대한 기대에 한껏 부풀어 있는 사람들에게 거짓 희망만 제공할 뿐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해결책을 마련하기는커녕 무기와 폭력이 새로우면서도 보다 더 심각한 갈등을 유발하고 있음을 보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가난한 나라와 더 가난한 나라들이 겪는 어려움에 대해 그들을 비난하는 것으로 스스로 만족합니다. 검증되지 않는 일반화에 빠짐으로써 그들은 그 나라들을 안정시킬 수 있는 “교육”이 해결책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모든 것은 주변으로 내몰린 이들을 오히려 분통터지게 하는 것입니다. 많은 나라에서 - 그 나라의 정부들, 기업들, 기구들에서 - 그 지도자들의 정치 이념이 어떤 것이든, 뿌리 깊고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부패를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문화의 도전
61. 우리가 현재 발생하고 있는 다양한 도전을 외면하지 않고 맞서려 할 때 복음도 전해야 합니다. 이 도전들은 종교 자유에 대한 분명한 공격이나 그리스도인에 대한 새로운 박해의 형태를 띠기도 합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종교 탄압과 박해가 증오와 폭력의 수준까지 이르렀습니다. 많은 지역에서 보이고 있는 광범위한 무관심과 상대주의가 더 큰 문제입니다. 무관심과 상대주의는 전체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나는 이데올로기의 위기와 환멸에 깊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뿐만 아니라 사회조직 전체에 해를 끼칩니다. 한 문화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만의 주관적 진리를 갖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시민들은 개인적인 성취와 인간적 욕망을 뛰어넘는 공동의 계획을 만들어 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인정해야만 합니다.
62. 오늘날 주류 문화에서는 외적인 것, 즉각적인 것, 가시적인 것, 빠른 것, 표피적인 것, 그리고 잠정적인 것을 우선합니다. 실질적인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밀려납니다. 많은 나라에서 세계화는, 경제적으로 발전했지만 윤리적으로는 쇠약해져버린 다른 문화를 쫓아서, 그 고유의 문화적 토대를 급속하게 해체한다는 것, 사상과 행동 양식을 무너뜨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여러 대륙에서 열린 시노드에서 주교들이 제기한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의 주교들은 수년 전 회칙 <사회적 관심>을 인용해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습니다. 아프리카 나라들을 “기계의 한 부품, 거대한 바퀴의 톱니”로 만들려는 시도가 빈번하게 이루지고 있습니다. 또 주교들은 “이것은 사회 홍보의 영역에서도 일어나는 문제로서, 대개 북반부에 있는 센터들에 의해서 운영이 되기 때문에 이러한 국가들(아프리카의 국가들)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을뿐더러, 그 국가들이 처한 문제 또는 그들의 문화적 특질에 관해서도 합당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고 지적했습니다. 같은 취지로, 아시아의 주교들도 “아시아 문화를 향해 다가온 외부의 영향을 주목하였다. 대중매체에 과도하게 노출된 결과로 새로운 행동 양식이 나타나고 있다.... 그 결과 미디어와 오락 산업의 부정적 측면이 전통적 가치들, 특히 혼인의 신성함과 가정의 안정성을 위협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63. 오늘날 많은 사람에게 새로운 종교운동의 확산은 가톨릭 신앙에 도전이 됩니다. 그 가운데 어떤 것은 근본주의가 되려하고, 어떤 것은 하느님이 없는 영성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물질주의, 소비주의, 그리고 개인주의 사회에 대한 인간적 반작용입니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빈곤에 처한 사람들과 사회 주변으로 밀려난 사람들의 약점을 이용하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사실 인간적으로 큰 고통 속에서 겨우 살아가면서 즉각적인 문제 해결책을 찾고 있습니다.
일정부분 독특함이 없지는 않지만, 이런 종교운동은 개인주의적 문화가 팽배한 곳에서 세속적 이성주의자들이 만들어놓은 진공상태를 채워주게 됩니다. 만일 세례를 받은 이들 가운데 일부가 교회에 대한 소속감을 갖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 본당이나 공동체의 구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을 환영하지 않는 분위기 때문에 그럴 수 있음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혹은 단순하건 복잡하건 사람들의 삶의 문제를 다루면서 관료주의적 태도를 가졌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습니다. 많은 곳에서 행정적 접근이 사목적 접근을 압도합니다. 복음화 활동은 제쳐두고 대신 성사를 관리하는 것에만 집중하는 것도 그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64. 세속화(secularization) 과정은 신앙과 교회를 사적이며 인간적인 영역으로 축소시키려 합니다. 더 나아가, 초월적인 것을 철저하게 거부함으로써 세속화 과정은 윤리의 타락을 가져오고, 개인과 집단의 죄의식을 약화시키며, 상대주의를 키웁니다. 이런 것들은 전체적으로 방향감각의 상실로 이어집니다. 특히 변화에 민감한 사춘기와 청년기에 그렇습니다. 미국 주교들이 올바르게 지적한 것처럼, 교회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객관적 도덕규범을 주장하지만, “우리 문화에서 교회의 이 가르침이 부당하다고, 즉 기본 인권에 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주장은, 모순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보통 개인의 권리를 절대시하는 신념과 결합된, 도덕 상대주의의 형태에서 나타납니다. 이런 시각에서는 교회가 특정한 편견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개인의 자유에 간섭하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우리는 정보에 따라 움직이는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사회는 우리에게 데이터를 퍼붓고 있습니다. 모든 정보는 그 중요성에서 동등한 것으로 취급됩니다. 그리고 이는 도덕적 통찰 영역에서 현저한 가벼움을 가져왔습니다. 이에 대응해서 우리는 비판적 사고를 가르치고, 성숙한 도덕적 가치의 발전을 격려하는 교육을 제공해야 합니다.
65.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세속주의의 물결에도 불구하고, 많은 나라에서, 여론은 그리스도 신자가 소수에 불과한 나라에서조차, 가톨릭교회를 신뢰할 수 있는 제도 가운데 하나로 여기고 있습니다. 가톨릭교회를 가장 힘든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그들과의 연대 때문에 믿을 수 있는 제도 가운데 하나로 여기고 있습니다. 교회는 평화, 사회의 조화, 토지와 생명 수호, 인권과 사회적 권리 등에 영향을 주는 문제들의 답을 찾는데 있어서 중재자로서 항상 행동했습니다. 그리고 전 세계의 가톨릭 학교와 대학들이 얼마나 좋은 일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매우 좋은 일입니다. 그렇지만 어려움도 있습니다. 인간의 존엄함과 공동선에 관한 신념에 충실해서 어떤 문제를 일으켰음에도 여론에 그다지 호응을 받지 못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우리의 이 충실성을 알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66. 가정은 심각한 문화적 위기를 체험하고 있습니다. 모든 공동체와 사회적 유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의 경우, 이 유대의 약화는 특별히 심각합니다. 가정은 사회의 기초 세포이며, 차이점을 갖고 있지만 서로에게 속한 다른 이들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은 부모가 자기 자녀들에게 신앙을 전수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혼인을 마음만 먹으면 수정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구축할 수 있는 것쯤으로, 단순히 감성적 만족을 위한 형식쯤으로 여기려 합니다. 그러나 혼인이 사회에 기여하는 불가결한 요소는 남녀의 감정이나 일시적 요구를 초월한다. 프랑스의 주교들이 가르친 것처럼, 혼인은, “그 정의상 덧없는, 사랑의 감정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배우자가 서로 완전한 생명의 친교를 맺는다는 것을 의무로 받아들인다는 데에서” 생기는 것이다.
67. 오늘날 세계화된 포스트모던 시대의 개인주의는 인격적 관계가 갖는 안정성과 발전을 약화시키며, 가족의 유대를 왜곡하는 생활태도를 선호합니다. 그러나 친교는 인간 상호 인격적 유대를 치유하고, 증진하고, 강화시킵니다.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사이의 관계는 이 친교를 요구하고 촉진합니다. 사목 활동은 이 점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특히 일부 나라에서, 여러 형태의 전쟁과 갈등이 새롭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다른 이들을 존경하고, 상처를 치유하고, 중개하고, 관계를 강화하고, 그리고 “서로 남의 짐을 져 주”려는 확고부동한 뜻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고상한 목표를 추구하고 권리들을 수호하려는 여러 다양한 단체들이 생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이 사회와 문화의 발전에 기여하려는 열망을 갖고 있다는 표지입니다.
신앙의 토착화에의 도전들
68. 어떤 민족의 - 대부분 서구에 있는 - 그리스도교적 토대는 하나의 실재입니다. 이곳에서는, 특별히 가장 궁핍한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참된 그리스도교적 인본주의가 갖고 있는 가치들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우리가 성령이 씨를 뿌리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지만 다양한 방법으로 그들의 신앙을 표현하고, 다른 이들과 연대하는 곳이 있습니다. 그 경우에 그곳에는 참된 그리스도교적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성령의 자유롭고 무제한적인 활동에 대한 신뢰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이는 통상적인 “말씀의 씨”를 인정하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의 씨는 참된 그리스도교 신앙과 관련이 있는데, 참된 그리스도교 신앙은 교회와의 관계를 드러내는 고유의 표현과 수단을 갖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특색으로 하는 문화가 갖는 막중함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현대 세속주의의 맹공이 있기 전에, 복음화된 문화는 그 한계를 갖고 있음에도 단순히 신자들의 숫자를 합하는 것 이상의 더 많은 자원을 갖고 있습니다. 복음화된 대중문화는 보다 공정하고 믿음이 가는 사회의 발전을 촉진할 수 있는 연대와 신앙의 가치를 포함하고 있으며, 훌륭하다고 인정할만한 특별한 지혜를 갖고 있습니다.
69. 복음을 토착화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문화들을 복음화 시켜야 합니다. 가톨릭의 전통을 갖고 있는 나라들에서, 문화의 복음화는 이미 존재하는 풍부함을 촉진하고, 기르고, 강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종교적 전통을 갖고 있는 나라들이나 철저하게 세속화된 나라들에서, 문화의 복음화는 문화를 복음화하기 위한 새로운 과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이는 장기적 계획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각 문화와 사회 그룹은 정화와 성장이 필요합니다. 가톨릭 신자들의 대중문화에서도 복음으로 치유해야 할 결함을 볼 수 있습니다. 남성우월주의, 알코올 의존증, 가정폭력, 저조한 미사참여, 마술로 이어지는 운명론적 혹은 미신적 생각등을 그 결함의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대중적 경건함은 그 자체로 이런 결함들로부터의 해방과 치유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70. 때때로 그리스도교적 경건함이 갖는 힘을 강조하기보다는 특정 그룹의 전통과 외적 표현을 더 강조하는 경우도, 혹은 다른 모든 것을 대신하려는 사사로운 계시로 추정되는 것을 더 강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개인적이며 감성적인 신앙생활을 반영하는 예배를 드리는 그리스도교 같은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된 ‘대중적 경건함’에 부합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사회의 진보나 평신도의 양성에는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은 채, 이런 외적 표현을 보급합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 그들은 경제적 이익이나 다른 이에 대한 권력을 취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최근 수 십 년 동안 가톨릭교회가 젊은이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하는 데 실패했음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가톨릭 전통에 환멸을 느끼며 더 이상 공감하지 않는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점점 더 많은 부모들이 그 자녀들에게 세례를 받게 해주지 않으며,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른 신앙 공동체를 향한 분명한 이탈(exodus)도 있습니다. 이런 실패 원인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가정 안에서 대화할 기회의 부족, 소통 매체의 영향, 상대주의의 주관주의, 시장을 먹여 살리는 무절제한 소비주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목적 배려의 결여, 환영하는 분위기를 갖고 있지 못한 교회 기구들, 종교 다원주의 시대에서 신앙적 충실성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점 따위가 포함됩니다.
도시문화에서 오는 도전들
71. 새로운 예루살렘, 거룩한 도시(묵시록 21:2-4)는 모든 인류가 가야할 목표입니다. 하느님의 계시가 인류와 역사의 완성이 도시에서 실현된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 호기심을 끕니다. 우리는 도시의 가정에, 도시의 거리와 광장에 계시는 하느님을 보는, 신앙의 시선으로 우리 도시들을 관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현존은 개인이나 그룹이 자기 생활에서 용기와 의미를 찾으려는 진지한 노력을 동반합니다. 그분은 우리들 가운데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들 가운데서 연대, 형제애, 그리고 선과 진리와 정의를 향한 열망을 키우십니다. 이 현존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고 드러내야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진실한 마음으로 찾는 사람에게서 숨지 않으십니다. 비록 그들이 불투명하고 투박한 태도로 모호하게 그분을 찾더라도 말입니다.
72. 도시에서는 시골과는 다르게, 생활에 있어서 종교적 차원이 여러 생활태도로 나타납니다. 도시의 일상생활 리듬은 장소와 사람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도시의 일상생활에서 사람들은 빈번하게 생존을 위해 투쟁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투쟁에는 생명에 대한 깊은 이해를 담고 있습니다. 또 생명에 대한 깊은 이해는 종종 심오한 종교적 감각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 주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의 갈증을 풀어주기 위한 우물가에서 나눈 대화처럼(요한 4:1-15), 우리 역시 (도시의 사람들과) 대화하기 위해서, 이 점을 보다 자세하게 검토해야 합니다.
73. 새로운 문화들이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것도 그리스도인들이 의미를 만들어내고 또 해석하는 일을 더 이상 하지 못하는 곳에서 말입니다. 대신 그리스도인이 이 문화에서 새로운 언어, 기호, 메시지와 패러다임을 취하는데, 이 새로운 언어와 기호, 그리고 메시지와 패러다임은 그리스도인 생활에 새로운 접근법을 제시합니다. 그렇지만 종종 이 새로운 접근법은 예수님의 복음과 대립하기도 합니다. 완전히 새로운 문화가 생겼으며, 도시에서 꾸준히 성장하고 있습니다. 시노드는 오늘날 이렇게 넓은 지역에서 발생한 변화와 그 변화가 만들어낸 문화가 새로운 복음화를 위한 우선적 현장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기도와 친교를 가져다 주는 혁신적인 공간을 상상하도록 부추깁니다. 도시 주민에게 보다 의미가 있고, 도시 주민의 마음을 살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 상상합니다. 매체의 영향을 통해, 도시 지역은 동일한 문화적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그 변화들은 도시의 생활 방식도 뚜렷하게 바꾸고 있습니다.
74. 하느님과 다른 사람,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세상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방식에 빛을 비출 수 있고, 핵심적인 가치들을 불러일으키는 복음화가 요청됩니다. 새로운 이야기방식과 패러다임이 형성되고 있는 곳에 다가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 도시의 깊숙한 영혼에 가져가야 합니다. 도시들은 여러 문화를 갖고 있습니다. 규모가 큰 도시에서는 공동의 상상력과 삶에 대한 꿈을 공유하는 그룹들 안에서 연결망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인간적 상호작용이 생겨납니다.
새로운 문화들과 비가시적 도시들이 그 안에 있습니다. 다양한 하위문화들이 공존합니다. 그리고 종종 분리와 폭력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다루기 어려운 대화를 위해 봉사해야만 합니다. 한편으로는 개인적 생활과 가정생활을 발전시키는데 필요한 수단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비 시민” “반쪽 시민” 그리고 “여분의 도시 사람들”도 많습니다. 도시는 일종의 영구적 유동성을 만들어냅니다. 왜냐하면, 도시는 그 거주민에게 수없는 가능성을 제공하면서도, 많은 사람에게 삶의 완전한 발전을 가로막는 특정한 장애물을 주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명암은 고통스러운 아픔을 가져옵니다. 세상의 많은 지역에서, 많은 도시는 수천의 군중이 자유와 정치 영역의 권리와 정의와 다양한 것을 요구하는 군중의 시위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시위는 무력으로도 잠재울 수 없을 것입니다.
75. 우리는 도시에서 인신매매, 마약거래, 소수자에 대한 폭력과 착취, 노인과 영아의 유기, 다양한 형태의 부패와 범죄행위가 벌어지고 있음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동시에 교류와 연대의 공간이 될 수 있는 곳이 빈번하게 소외와 상호불신의 공간이 됩니다. 주택과 단지는 서로를 결합하고 통합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격리되어 보호하기 위해 건설됩니다. 복음 선포는 이 같은 환경에서 인간의 존엄을 회복하는 데 있어서 기반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우리 도시들에 생명의 풍부함을 부어주시려 하기 때문입니다.(요한 10:10 참조)
복음은 통합되고 온전한 인간적 생활을 제시합니다. 이 인간적 생활이야말로 도시가 앓는 질병에 가장 좋은 치료약입니다. 비록 단일하고 확실한 어떤 한 복음화 프로그램이 이 복잡한 현실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은 인정해야만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문화와 모든 도시에서 인간적 생활을 충만하게 살고, 복음의 증인이라는 누룩으로서 모든 도전에 응하는 것은 우리를 더 좋은 그리스도인으로 만들 것이며, 우리가 사는 도시에서 결실을 맺을 것입니다.
II. 사목활동가들이 직면한 유혹들
76. 저는 교회를 위해서, 그리고 교회 안에서 헌신적으로 일하시는 분들에게 무한한 고마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주교로부터 시작해서 가장 겸손하게 숨어서 봉사하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사목활동가의 그 많은 활동들을 길게 논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보다 저는 우리 모두가 오늘날 세계화된 문화 속에서 직면할 수밖에 없는 도전에 대해서 성찰하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날 세상에서 교회가 기여하고 있는 것이 대단히 많다는 것을 밝혀둡니다. 그것이 정의롭습니다. 우리의 죄에 대해, 그리고 수많은 교회의 사람들이 범한 죄에 대해 우리는 고통과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 부끄러움과 고통 때문에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사랑을 실천하며 자신의 삶을 내어놓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수많은 사람을 치유하거나, 임시병원에서 평화로운 죽음을 돕습니다. 그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빈곤한 지역에서 다양한 의존(중독)의 포로가 된 사람들에게는 선물입니다. 그들은 어린이들과 젊은이들의 교육에 헌신합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이 잊고 있는 노인을 돌봅니다. 그들은 적대적인 환경에서도 가치를 소통시킬 길을 모색합니다. 그들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께서 불러일으키신 무한한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헌신합니다. 저는 자신의 생활과 시간을 즐겁게 희생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보여준 아름다운 모범에 대해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저의 이기심을 극복하고 저 자신을 보다 완전히 내놓으려는 노력에 있어서 저를 지탱해주고 위로해줍니다.
77. 그러나 이 시대의 자녀로서 우리 모두는 어떤 식으로든 오늘날 세계화된 문화의 영향을 받습니다. 이 문화는 나름의 가치와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하면서도, 우리를 제한하고, 익숙하게 하고, 그리고 궁극적으로 해를 끼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사목 활동가들이 도움과 치유를 받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공간은 “선한 것과 아름다운 것을 향한 개인적 사회적 결정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새롭게 하는 곳, 가장 심오한 물음과 일상의 관심을 공유하는 곳, 우리의 생활 자체와 경험을 복음의 빛으로 깊이 있게 식별하는 곳”을 말합니다. 동시에 저는 사목 활동가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몇 가지 특별한 유혹에 대해서도 주목하고 싶습니다.
선교 영성이라는 도전에 응답합시다
78. 오늘날 우리는 축성된 사목자를 포함해서 많은 사목 활동가한테서 자신의 개인적 자유와 안락함에 대한 무절제한 관심을 보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마치 자신이 하는 일이 자신의 신원의 일부가 아닌 것처럼, 즉 자신의 생활에 덧붙여진 것쯤으로 보게됩니다. 동시에 이들은 영성생활을 다른 사람과의 만남, 세상과 관계 맺기, 혹은 복음화를 위한 열정을 촉진하지는 않는, 단지 특별한 위로를 주는 경건한 실천 정도로 여깁니다. 그 결과, 복음화를 위해 일하는 많은 사람들한테서, 비록 그들이 기도할지라도, 극도의 개인주의, 정체성의 위기와 열정의 소멸을 볼 수 있습니다. 극도의 개인주의, 정체성의 위기, 그리고 열정의 소멸은 서로를 키우는 악입니다.
79. 때때로 우리의 미디어 문화와 일부 지성계는 교회의 메시지와 관련해서 냉소주의와 회의주의를 유포시킵니다. 그 때문에 많은 사목 활동가들은, 비록 그들이 기도할지라도, 일종의 열등감 콤플렉스를 갖게 되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그리스도인 정체성과 신념을 숨기거나 상대화합니다. 이것은 악순환합니다. 그들은 결국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와 관련해서 불행해집니다. 그들은 자신의 복음화 사명에 공감하지 않으며, 이는 자신의 헌신을 약화시킵니다. 그들은 결국 다른 모든 사람처럼 되려는 집착 때문에 사명이 갖는 기쁨을 억누르고, 다른 사람도 갖고 있는 것을 가지려합니다. 따라서 그들의 복음화 활동은 억지로 하는 것이 되고, 거의 힘을 쓰지 않으며, 극히 제한된 시간만 여기에 할애합니다.
80. 사목 활동가들은 그렇게 (실천적) 상대주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상대주의에 빠진 그들의 영성이나 사고방식의 스타일이 무엇이든, 상대주의는 교조적 상대주의보다 더 위험하기까지 합니다. 이 상대주의는 자신의 삶의 방식을 형성하는 깊은 마음의 결정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 실천적 상대주의는 마치 하느님이 계시지 않다는 듯이 행동하고, 가난한 사람이 존재하지 않다는 듯이 결정하고, 다른 이들이 존재하지 않다는 듯이 목표를 세우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이 존재하지 않다는 듯이 활동하는 것입니다.
교리와 영성에 대한 확실한 신념을 분명하게 갖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사명을 수행할 때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건네주기보다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재정적 안전, 권력에의 욕망, 현세의 영광을 찾는 생활태도에 빠지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이는 두드러진 현상입니다. 우리 스스로 선교의 열정을 빼앗기지 않도록 합시다.
이기심과 영적 나태를 거부합시다
81. 세상에 소금과 빛을 가져다 줄 선교의 활력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할 때, 많은 평신도들은 자기가 사도의 일 가운데 상당부분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 두려워하고, 자기의 자유로운 시간을 할애해야 할 책임에서 벗어나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몇 해 동안 교리교육에 기꺼이 매진할 뜻을 갖고 있는 훈련된 본당 교리교사를 찾는 것이 오늘날 매우 어렵습니다. 더군다나 자신의 자유로운 시간을 지키는 데에만 사로잡힌 사제들도 생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주로 자기의 개인적 자유만을 지키려 하는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복음화 과업이 우리를 불러 사명을 부여하고, 우리를 그것으로 채우고, 열매를 맺게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기쁘게 응답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마치 위험한 독인 것처럼 치부됩니다. 어떤 이들은 이 사명에 자신을 온전히 내어놓는 것을 거부하고, 그럼으로써 결국 무기력하고 나태한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82. 문제는 과도한 활동이 아닙니다. 오히려 적합한 동기도 없고, 그 활동을 통하여 자신을 기쁘게 하는 영성이 없이, 잘못 수행하는 활동이 문제입니다. 그렇게 되면 일은 필요이상으로 힘들어지고, 때로는 질병을 불러오기도 합니다. 그것은 만족스럽고 행복한 피곤함과는 거리가 멀고, 긴장, 부담, 불만, 그리고 결국에는 감당할 수 없는 피로가 됩니다.
이렇게 나태한 사목을 불러오는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비현실적인 계획에 몰두하고, 자기가 합리적으로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만족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 일이 제대로 이루어질 때까지 인내심을 갖지 않아서 그렇게 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모든 일이 하늘에서 떨어지기를 바랍니다. 몇 가지 계획에만 집착하거나 부질없는 성공을 꿈꾸어서 그렇게 되는 이들도 있습니다. 사람들과 직접 만나지 않음으로써 자기의 일을 비인격화시키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여정보다는 지도에 더 큰 관심을 기울입니다. 기다릴 수 없기 때문에 나태해지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생활의 리듬을 지배하고 싶어 합니다. 즉각적인 결과에 집착하는 시대에, 사목활동가가 불일치, 가능한 실패, 비판, 곧 십자가의 낌새를 견딘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83. 그렇게 해서 이 모든 것을 갖춘 거대한 실타래가 그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교회의 일상생활에서 ‘잿빛 실용주의’가 그것입니다. 그 속에서 모든 일이 정상으로 진행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신앙은 그 힘을 잃고 소심해집니다.” 일종의 무덤의 심리가 발전하고 교회를 천천히 박물관의 미라로 바꾸어 버립니다. 그들은 현실, 교회, 그리고 스스로에게 환멸을 느끼는 가운데, 희망을 잃은 채 무기력한 우울함에 빠져드는 유혹을 체험합니다. 이 무기력한 우울은 “죄악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으로서 그들의 마음을 지배합니다. 빛을 발하고 생명을 전해야 하지만, 결국 어두움과 내적 싫증만을 만들어내는 그런 일에 사로잡히고, 천천히 사도직을 향한 모든 열정을 소비하고 맙니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하면서, 저는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리 스스로 복음의 기쁨을 빼앗기지 않도록 합시다.
헛된 염세주의를 거부합시다
84. 복음의 기쁨은 결코 누구도 혹은 어떤 것도 우리에게서 빼앗을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요한 16,22 참조) 세상의 죄악이, 그리고 교회의 죄악이 우리의 헌신과 열정을 약화시키는 핑계가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오히려 그 죄악을 우리의 성장을 도울 수 있는 도전으로 바라봅시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어둠 속에서 항상 비추는 성령의 빛을 볼 수 있습니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다.”(로마 5,20)는 것을 절대로 잊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물에서 어떻게 포도주가 나오는지, 어떻게 잡초 속에서 밀이 자라는지를 식별하라는 도전을 받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연지 50년이 되었습니다. 우리 시대는 순진한 낙관론과는 거리가 멀고, 여러 어려움에 힘겨워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보다 강해진 우리의 현실주의가 결코 성령과 성령의 풍부함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의미로, 우리는 다시 복자 요한 23세가 1962년 10월12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막일에 하신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정말 유감스럽게도, 때로는 우리는 신중함과 기준을 갖고 있지 않지만 열정를 불태우는 백성의 소리를 들어야만 합니다. 오늘날 백성은 파괴와 변명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치 세상의 종말이 임박했다는 듯이 항상 참화만을 예견하고 있는 파멸의 예언자들과 달라야만 한다고 느낍니다. 이 시대에 하느님의 섭리는 인간관계의 새로운 질서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이 새로운 인간질서는, 인간의 노력으로 그리고 모든 예상을 뛰어 넘어서, 탁월하고 측량할 수 없는 하느님 계획의 완성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계획안에서는 모든 것은, 하다못해 인간의 방해까지도, 교회에 보다 큰 선익이 될 것입니다.”
85. 열의와 대담함을 질식시키는 보다 심각한 유혹 가운데 하나는 패배주의입니다. 패배주의는 흠을 잡고 환멸을 느끼는 염세주의로, “음침한 성격의 사람”으로 만듭니다. 승리를 온전히 확신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도 전투에 나설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자신감 없이 출발한다면, 우리는 이미 전투에서 반쯤 진 것이며, 우리는 재능을 묻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스럽지만 우리 자신의 나약함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주님께서 바오로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음을 마음에 새기며, 굴복하지 않고 전진해야 합니다.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토 12:9)
그리스도인의 승리는 항상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는 동시에 승리의 표지로서, 악의 공격 앞에서도 진취적인 부드러움은 낳습니다. 패배주의라는 악령은 때가 되지도 않았는데도 밀과 잡초를 분리시키려는 유혹의 형제입니다.
86. 어떤 곳에서는 분명히 영성의 “사막화”가 진행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 없이 사회를 건설하거나 혹은 그 그리스도교적 뿌리를 제거하려 한 결과입니다. 그런 곳에서는 “마치 과잉으로 착취되어 사막으로 변하고 있는 땅처럼, 그리스도교가 결실을 내지 못하고, 스스로 고갈되어가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그리스도교에 가하는 폭력적 반대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사랑하는 조국에서 자신의 신앙을 숨기도록 강요합니다. 이런 곳 역시 다른 형태의 고통스러운 사막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가정과 일터는 신앙을 보존하고 전달해야 할 곳입니다. 그럼에도 이 가정과 일터마저 메마른 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막 체험부터, 텅 빈 곳에서부터 우리는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는 믿는 사람이 갖는 기쁨을, 그 기쁨이 갖는 생생한 중요성을 다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막에서 우리는 삶에서 본질적인 것이 갖는 가치를 재발견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이 세상에는 종종 함축적으로 혹은 부정적으로 드러내는 하느님에 대한 갈망의 표징들, 인생의 궁극적 의미에 대한 갈망의 표지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리고 이 사막에서는, 모범된 삶으로 약속의 땅을 가리키고 그 희망을 이어가게 하는 신앙의 백성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이 마실 수 있는 살아있는 샘물이 되어야 합니다. 때때로 이것은 무거운 십자가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께서 자신을 생명을 주시는 물의 원천으로 우리에게 건네주신 것은 십자가에서입니다. 창에 찔린 옆구리에서였습니다. 그리므로 우리 스스로 희망을 빼앗기지 않도록 합시다!
그리스도께서 가져다주신 새로운 관계에 동의합시다
87. 오늘날 통신 수단과 네트워크는 유래 없는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이 시대에 우리는 함께 사는 “비법”, 어울리고 교류하는 “비법”, 서로 포용하고 지지하는 “비법”을 찾아내고 공유해야 할 도전에 직면했습니다. 혼돈스럽지만 참된 형제애의 체험, 연대의 행렬, 거룩한 순례가 될 수 있는 밀물에 발을 담구는 “비법”을 찾아내고 공유해야 하는 도전에 직면한 것입니다.
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 발생하는 더 많은 가능성은 모든 사람들이 교류하고 연대할 수 있는 더 많은 가능성을 줍니다. 만일 우리가 이 경로를 취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 만큼 좋을 것이며, 그 만큼 고통 따위를 누그러뜨릴 것이며, 그 만큼 자유롭게 하며 희망을 충족시킬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울타리에서 나와 다른 이들과 결합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유익합니다. 자기 안에 갇혀 있는 것은 ‘내재주의’라는 쓴 독약을 맛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류는 우리의 이기적 선택 때문에 악화될 것입니다.
88. 그리스도교의 이상은 의심, 습관적 불신, 우리만의 자유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 오늘날 세상이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는 모든 방어적 태도들을 극복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신의 자유가 주는 편안함으로 피하려 합니다. 혹은 복음이 갖고 있는 사회적 측면인 현실을 부정하면서 몇 몇 가까운 사람들 끼리만의 소규모 모임 속으로 피하려 합니다. 일부 사람들이 육체가 없고 십자가가 없는, 그런 순수하게 영적이기만 한 그리스도를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세련된 장치가 제공하고, 명령에 따라 켜고 끌 수 있는 시스템이나 스크린이 제공하는 인간적 상호 관계만을 원합니다.
그렇지만 복음은 위험을 무릅쓰고 끊임없이 다른 사람을, 우리에게는 도전이 되는 그들의 물리적 현실을, 그들의 고통과 탄원을, 친밀하고 지속적인 우리의 상호활동에 영향을 주는 그들의 기쁨을 직접 만나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육화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참된 신앙은 자기를 내어 주는 것,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는 것, 봉사하는 것, 다른 사람과 화해하는 것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은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의 순환에로 부르셨습니다.
89. 고립은 내재주의의 한 형태입니다. 이 고립은 하느님께서 자리잡을 수 없는 거짓 자율성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종교의 영역에서 고립은 해로운 자신만의 개인주의에 맞춘 영적 소비주의의 형태를 취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를 특징짓는 영성에 대한 요구와 거룩한 것에로의 회귀는 분명치 않은 현상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도전은 무신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많은 사람이 하느님을 갈망하는 것에 적합하게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고립의 길로 가면서 그 갈증을 풀지 않도록, 혹은 다른 이들에 관해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영혼이 육체에서 이탈한, 그런 예수로 자신의 갈증을 풀지 않도록 말입니다. 교회 안에서 이런 사람들이 자신에게 치유와 해방을 주고, 생명과 평화를 주는 영성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결국 자신의 생활을 참으로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지도 못하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지도 못하는 그런 다른 해결책에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90. 대중적 종교심의 참된 형태들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대중문화 속에 그리스도교 신앙이 구체화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그것들은 모호한 영적 힘이나 에너지와의 관계가 아니라, 성인들과 마리아, 그리고 그리스도와 하느님과 맺는 인격적 관계를 수반합니다. 그것들은 몸과 얼굴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단순히 도피주의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관계 맺기를 키웁니다. 우리 사회의 일부에서, 우리는 공동체 생활과는 전혀 무관한 “웰빙 영성”의 다양한 형태가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혹은 우리 형제자매에 대한 책임을 멀리하는 “번영의 신학”에, 혹은 자기중심성 이상이 아닌 자아감 없는 체험들에 사람들이 몰리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91. 한 가지 중요한 도전은 인격적이며 헌신적인 하느님과의 관계,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게 헌신하도록 하는 하느님과의 그런 관계에서 벗어나는 것은 절대로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도망치는 것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이 깊고 탄탄한 유대를 맺지 않은 채, 스스로 숨으려 하거나, 다른 이들과 거리를 두려 하거나,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조용히 훌쩍 떠나려 하거나, 혹은 이 임무에서 저 임무로 떠나려 할 때 빈번하게 발생합니다.
“다른 곳들을 꿈꾼다. 그리고 이곳저곳으로 떠돌아다닌다. 그러나 많은 이들을 꾀어낸다.”
그것은 마음을, 때로는 몸까지도 비틀거리게 하는 잘못된 처방입니다. 우리는 유일한 길은 다른 사람이 어떻게 올바른 태도로 다른 사람을 만나는지 배우는 것임을 인정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마음으로부터 저항감 없이 다른 사람들을 같은 길을 걷는 동료로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것을 말입니다. 더 나아가 그것은 다른 사람의 얼굴에서, 그들의 목소리에서, 그들의 탄식에서 예수님을 발견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당하게 공격을 당하거나 배은망덕한 일을 당할 때조차도, 형제애로 살겠다는 우리의 결정을 포기하지 않으며, 십자가의 예수님을 포용하면서 겪는 고통을 배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92. 실제 우리는 참된 치유를 발견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과 결합시키는 그 길은 우리를 쇠약하게 하는 대신에 치유하는데, 그 길은 바로 신비로운 형제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이웃의 거룩함을 보게 하는 것은, 모든 사람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에 마음을 열게 하는 것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하신 것처럼 다른 이들의 행복을 추구하게 하는 것은 바로 형제적 사랑입니다. 지금 여기서, 특히 우리가 “작은 양 떼”(루카 12,32)하고 할 때, 주님의 제자들은 땅의 소금으로, 세상의 빛인 공동체로 살아야만 합니다.(마태오 5,13-16 참조) 우리는 항상 복음에 충실하면서 새로운 삶의 길을 증언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공동체를 빼앗기지 않도록 합시다!
영적인 세속성을 거부합시다
93. 영적인 세속성은 경건함과 교회에 대한 사랑의 모습 속에까지 숨어 있는데, 이는 주님의 영광이 아니라 인간의 영광과 인간적 웰빙을 추구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바리사이들을 다음과 같이 질책하신 이유입니다.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을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요한 5,44)
이는 곧 “자기 것만 추구할 뿐 예수 그리스도의 것을 추구하지 않는”(필리비 2,21) 길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사람들과 그룹 속에 스며들어서 그 사람들과 그룹들에 의지하면서 여러 형태를 띠고 나타납니다. 그것은 정교하게 개발된 모습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항상 외적인 죄와 결합되는 것은 아닙니다. 죄를 범하지 않기 때문에 마치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교회에 스며들었다면, “단순히 도덕적인 다른 모든 세속성보다 정말로 훨씬 불길한 것이 될 것입니다.”
94. 이 세속성은 서로 깊게 결합된 방법으로 불타오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영지주의의 매력, 곧 순전히 주관적인 신앙인데, 이는 자신을 위로해 주고 빛을 밝히기 위한 특정 체험이나 일군의 사상과 일단의 정보에만 관심을 둡니다. 그렇지만 결국 자신만의 생각과 느낌에 자신을 가두어버리고 맙니다.
다른 하나는, 특정 규칙을 준수하거나 과거의 특정 가톨릭 스타일에 철저하게 충실하기 때문에 우월감을 느끼고 자신의 힘만을 믿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자아 도취의 신펠라지오주의입니다. 이 경우 교리와 규칙에 충실한 것으로 보이지만, 대신 자아도취적이고 권위적인 엘리트 의식을 갖게 합니다. 복음화 대신에 다른 사람을 분석하고 분류합니다. 은총을 향하는 문을 여는 대신에 자신의 힘을 조사하고 검증하는 데 소진합니다.
이 두 경우에, 누구도 실제로는 예수 그리스도나 다른 사람에게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들은 인간중심의 내재론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를 혼합한 형태인 이 두 개의 세속성에서 참된 복음화의 추동력이 나타나기란 불가능합니다.
95. 이런 교활한 세속성은 여러 태도에서 분명히 나타납니다. 이 태도들은 서로 맞서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두가 똑 같이 “교회의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전례와, 교리, 교회의 특권에 여봐란 듯이 몰두하지만, 복음이 하느님의 충실한 백성에게 실제로 미치는 영향과 현 시대에 구체적으로 필요한 것에는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런 경우 교회의 생활은 박물관의 일부 혹은 선택된 소수의 재화 같은 것으로 전락되고 맙니다.
다른 경우, 이 영적인 세속성은 사회적 정치적 소득이 주는 매력 뒤에, 혹은 실용적인 일들을 관리할 수 있다는 그들의 자부심이 주는 매력 뒤에, 혹은, 자기에게만 도움이 되며 자아를 실현하는 프로그램에 대한 강박이 주는 매력 뒤에 숨어 있습니다. 그것은 보여주기 위한 관심으로 나타나며, 겉치장, 만남, 저녁식사와 연회로만 이루어지는 사회생활로 나타납니다. 그것은 경영, 통계, 계획과 평가에 몰두하는 기업가 정신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데, 그 수혜자는 물론 하느님 백성이 아니라 조직으로서 교회입니다. 여기에는 육화와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라는 그리스도의 흔적은 없습니다. 폐쇄된 엘리트 그룹이 형성될뿐입니다. 길을 나서고 멀리 있거나 그리스도를 갈망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찾지 않습니다. 복음적 열정 대신에 만족과 방종이라는 공허한 즐거움이 자리를 차지합니다.
96. 이런 식의 생각은 작은 권력에도 만족하는 사람들의 허영을 키우기도 합니다. 싸우기를 멈추지 않는 분대의 이등병이 되기보다는 패배한 부대의 장군이 되기를 바라는 그런 허영 말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대단한 사도적 계획을 꿈꿉니까! 패배한 장군처럼 얼마나 꼼꼼하게 계획을 세웁니까! 그렇지만 그것은 하나의 교회로서 우리의 역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는 희생과 희망, 매일의 투쟁과, “우리 이마의 땀”을 만들어내는 노동 속에서 출실하게 보낸 삶의 역사이기에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로 “이뤄야 할 일이 무엇인가”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스페인어로 이것을 “habriaqueismo”라고 부르는데, 높은 데에서 지시를 내리는 사목전문가와 영적 지도자처럼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끝없는 환상에 사로잡히고, 우리 백성이 겪는 어려움이나 실제적인 삶과 만나지 않습니다.
97. 이런 세속성에 빠진 사람은 위에서 그리고 멀리서 지켜보기만 합니다. 그들은 자기 형제자매가 예언하는 것을 배척합니다. 그들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을 불신합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실수를 끊임없이 지적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어떻게 보이는지에만 매달립니다. 그들의 마음은 오직 자신만의 내재성과 이익이라는 제한된 지평에만 열려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자신의 죄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않고, 진정한 용서를 향해 문을 열어놓지도 않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선한 것으로 가장된 엄청난 부패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의 울타리에서 나와 예수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추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헌신하는 사명을 유지함으로써, 그 같은 부패를 피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천박한 영적 사목적 장식을 갖고 있는 세속의 교회에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교회를 숨 막히게 하는 이 세속성은 오직 성령의 순수한 공기를 들이마심으로써만 치유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하느님을 잃어버린 외적인 광신 속에 숨은 교회의 자기중심성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십니다. 우리 스스로 복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합시다.
우리들 가운데서 서로 싸우는 것을 거부합시다
98. 하느님 백성 가운데에서, 그리고 교회의 여러 공동체 안에서 얼마나 많은 싸움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우리의 이웃 속에서 그리고 작업장에서,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조차 얼마나 많은 싸움이 질투와 시기 때문에 벌어집니까! 영적 세속성은 일부 그리스도인을 다른 그리스도인과 싸우게 합니다. 자신의 권력, 특권, 즐거움, 그리고 경제적 안전 추구에 방해가 된다고 말입니다. 어떤 이들은 더 큰 교회 공동체의 일부로 사는 것에 더 이상 만족하지 않고, “권력 중추부의 측근 그룹”을 만들어냄으로써 일종의 배타의 정신을 갖고 삽니다. 풍부한 다양성을 갖고 있는 전체 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대신에, 그들은 그 자체로 다르고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이런 저런 그룹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99. 우리의 세상은 전쟁과 폭력으로 찢어지고 있습니다. 사람을 나누는 광범위한 개인주의로 상처를 받고 있습니다. 개인주의는 자기만의 웰빙을 쫓아감으로써 사람을 서로 맞서게 하고 있습니다. 여러 나라에서 과거의 갈등과 분열이 재등장하고 있습니다. 저는 전 세계의 그리스도인이 그 공동체에서 형제적 친교라는 빛나고 매력적인 증거를 제시해줄 것을 특별히 요청합니다. 여러분이 서로를 얼마나 돌보는지, 여러분이 서로를 격려하고 동행하는지를 모든 사람이 보고 감탄케 합시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이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온 마음으로 아버지께 바친 기도입니다.
“그들이 모두 ... 우리 안에 ...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 그리하여 ...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요한 17,21)
질투라는 유혹을 경계하십시오! 우리 모두는 한 배를 타고 같은 항구를 향하고 있습니다! 각자가 갖고 있는 은사, 모두를 위한 그 은사에 기뻐하는 은총을 청합시다.
100. 역사의 분열 때문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우리의 이 용서와 화해로 부르는 초대를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가 그들의 고통을 무시하거나 그들의 기억을 포기하라고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진정으로 형제적 화해를 이룬 공동체를 실제로 보게 된다면, 그 증거가 빛나고 매력적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저는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 공동체가, 또 봉헌생활을 하는 사람조차 다양한 형태의 적개심, 분열, 중상, 비방, 뿌리 깊은 반목, 시기, 그리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특정 이념을 강요하는 것, 심지어는 분명히 마녀사냥으로 보이는 박해까지 견뎌야 하는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견뎌야 할 길이라면, 우리는 누구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하겠습니까?
101. 사랑의 법을 이해할 수 있도록 주님께 도움을 청합시다. 우리에게 사랑의 법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이 사랑의 법이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서로 사랑하도록 한다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바오로 사도는 우리 모두에게 권고했습니다.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로마 12,12) 그리고 다시 “낙심하지 말고 계속 좋은 일을 합시다.”(갈라디아 6,9) 우리 모두에게는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이 순간 아마 우리는 누군가에게 화가 나 있을 수 있습니다. 적어도 주님께 다음과 같이 말씀드립시다. “주님, 저는 이 사람에게, 또 저 사람에게 화가 납니다. 저는 그를 위해 기도합니다.” 내가 화를 내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사랑을 향해, 그리고 복음화 행위를 향해 내딛는 아름다운 발걸음입니다. 오늘 기도합시다! 우리 스스로 형제적 사랑이라는 이상을 빼앗기지 않도록 합시다!
교회의 다른 도전들
102. 단순하게 말해서 평신도는 하느님 백성의 대다수를 차지합니다. 품을 받은 교역자는 소수이고, 그들 대다수는 하느님 백성에게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교회 안에서 평신도는 자신의 신원과 사명을 점점 더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까지는 충분하지는 않지만 수많은 평신도에게 의지할 수 있습니다. 이 평신도들은 공동체의식이 매우 강하며, 사랑의 실천과 교리교육, 신앙의 기념에 대단히 충실합니다. 동시에 평신도의 책임을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습니다.
세례와 견진에 기반을 둔 평신도의 책임은 모든 곳에서 같은 방식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꽤 많은 경우에 평신도들은 중요한 책임을 맡기에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는 평신도를 의사결정에서 배제하는 과도한 성직자 중심주의 때문에 평신도들이 행동하고 말할 수 있는 여지가 교회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많은 사람이 평신도 사도직에 몸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도직은 사회, 정치, 경제 영역에서 그리스도교적 가치를 상당 수준까지 침투시키는 일에는 충분히 반영되지 않고 있습니다. 평신도 사도직이 복음을 사회의 변형에 적용하는 데 쓰이지 않고, 대부분 사도적이 교회 안의 활동에 제한되어 있습니다. 평신도의 양성, 그리고 직업과 지성 생활의 복음화는 사목에 있어서 중요하고도 대표적인 도전입니다.
103. 교회는 여성이 남성보다 더 많이 갖고 있는 감수성, 직관, 다른 여러 탁월한 능력을 통해서 사회에 기여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저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여성의 특별한 배려심, 절대적이라 할 수는 없을지라도 모성애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그 특별한 배려를 생각합니다. 저는 많은 여성이 백성과 가정과 그룹을 인도하는 데, 그리고 신학적 성찰에 새롭게 기여하는 가운데, 사제들과 함께 사목의 책임을 공유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런 여성들이 교회 안에서 자신의 실재를 드러낼 수 있는 폭넓은 기회를 주어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성성은 사회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필요하다. 여성이 일터에서 일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 그리고 중요한 결정이 이루어지는 다른 여러 환경, 즉 교회와 사회조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104. 여성의 정당한 권리가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은 남성과 여성이 그 존엄성에서 평등하다는 확고한 신념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이는 교회가 가볍게 피해갈 수 없는 무겁고 도전적인 물음을 제기합니다. 사제직을 남성에게만 유보하고 있는 것은 성찬례로 자신을 내어주신 신랑 그리스도의 표지입니다. 이것은 토론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성사적 권한(sacramental power)과 일반 권한(power in general)을 지나치게 동일시한다면, 그것은 심각한 불화를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사적 권한을 말할 때, “우리는 존엄함이나 거룩함의 영역이 아니라 기능의 영역에 있습니다.” 직무 사제직은 예수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봉사하기 위해서 채택한 하나의 수단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귀한 존엄함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세례성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제를 (모든 은총의 주요 원천이며)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통합시킨 것(configuration)이 그를 다른 사람들 위에 세우려는 고양을 포함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서 기능들은 “상호간에 상대적 우월성을 있음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사실 마리아라는 한 여성이 주교들보다 더 중요한 분입니다. 직무 사제직의 기능이 “교계적”이라고 간주될 때조차 “그것이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성원들이 갖는 거룩함에 따라 배열된 것임”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직무 사제직의 핵심과 축은 지배를 의미하는 권력이 아니라 성체성사를 관리하는 힘입니다. 성체성사는 직무 사제직이 갖는 권위의 원천입니다. 그 권위는 항상 하느님의 백성에 대한 봉사입니다. 이 점은 목자들과 신학자들에게 커다란 도전이 됩니다. 왜냐하면 교회 생활의 다양한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의사결정에서 여성이 맡을 역할과 관련해서, 이 점이 무엇을 수반할 것인지를 보다 면밀하게 알아내야 할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105. 전통적인 방식의 청년 사목활동 역시 사회변화의 충격으로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종종 통상적인 구조 안에서 자신의 관심, 욕구, 문제, 그리고 상처에 대한 반응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어른으로서 우리는 그들의 목소리에 인내심을 갖고 듣는 것, 그들의 관심과 요구를 인정하는 것,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그들에게 말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압니다.
똑 같은 이유로, 교육 분야에서 기울이는 우리의 노력이 기대하는 결과를 내지 않습니다. 젊은이들의 연합과 운동이 일어나고 자라는 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라 볼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그들의 기대와 심오한 영성과 보다 실제적인 소속감 추구를 충족시킬 새로운 오솔길을 비추십니다. 그러나 이런 연합들이 교회의 전반적인 사목 노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106. 젊은이에게 접근하는 것이 항상 쉬운 일은 아니더라도, 두 영역에서는 상당한 진전이 이루어졌습니다. 공동체 전체가 젊은이를 교육하고 복음화 해야 한다는 자각과 젊은이들이 더 큰 리더십을 행사해야 한다는 시급한 요구가 그것입니다. 오늘날 상호 관계 맺기와 헌신에 위기를 맞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젊은이가 이 시대가 안고 있는 문제 앞에서 공동전선을 형성하고 있으며, 다양한 형태의 자발적인 사업과 활동을 펼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어떤 젊은이들은 자기 교구와 다른 지역에서 봉사그룹이나 선교단체의 구성원으로서 활동합니다. 젊은이들이 예수님을 모든 거리에, 모든 마을에, 지구 구석구석에 기쁘게 전하는 “거리의 선포자들”이 되는 것을 보는 것은 얼마나 아름답습니다!
107. 많은 곳에서 사제와 축성생활에서 성소 부족 문제를 겪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 공동체 안에서 사도적 열정이 없어서 사람을 열광하게 하고 끌어들이는 힘이 식은 탓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를 다른 이에게 소개하려는 생활과 열정과 욕망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참된 성소가 일어날 것입니다. 유별나게 헌신적이거나 기쁘게 생활하지 않는 사제가 있는 본당에서도, 형제적 생활과 공동체의 열정은 젊은이가 하느님과 복음의 가르침에 자신을 봉헌하려는 열망을 일깨울 수 있습니다. 그 같이 살아있는 공동체가 끊임없이 성소를 위해 기도하고, 공동체의 젊은이에게 특별한 축성의 길을 용감하게 제시한다면 말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성소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는 사제직 지망자들에 대한 보다 나은 선발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신학교는 그 동기가 특히 감정적 불안, 권력 추구, 인간적 명예, 혹은 경제적 풍요 따위와 관련되어 있다면 그 동기가 무엇이든 그 지망자를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108.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저는 완전한 진단을 제시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공동체를 초대해서 공동체와 그 이웃이 직면한 도전들을 알아내고, 제가 제시한 이러한 전망들을 풍요롭게 하고 완성해주기를 바랍니다. 저는 공동체들이 그렇게 하는 가운데, 우리가 시대의 징표를 읽으려 할 때마다 젊은이와 노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젊은이는 우리더러 희망을 새롭게 하고 확장하라고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류에게 새 방향을 제시하고, 우리에게 미래를 열어줍니다. 우리가 오늘날 세상에 생명을 주지 않는 관습과 구조에 더 이상 향수를 품고 거기에 머물지 않도록 말입니다.
109. 도전은 극복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현실주의자가 됩시다. 그러나 우리의 기쁨, 우리의 담대함, 우리의 희망으로 가득 찬 헌신을 잃지는 맙시다. 우리 스스로 선교의 활력을 빼앗기지 않도록 합시다.
출처: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번역: 박동호 신부
서울대교구 신정동 성당,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