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기쁨 - 제1장
2014년 1월 16일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번역: 박동호 신부 | editor@catholicnews.co.kr
항상 새로운 기쁨, 나눠야 할 기쁨
교황 프란치스코의 사도적 권고 <복음의 기쁨> 번역문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서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11월 26일 발표한 사도적 권고 <복음의 기쁨> 번역문을 연재한다. 이 번역문은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박동호 신부가 개인적으로 번역한 것이다. 좀더 공적인 번역문은 한국천주교 주교회의의 번역문 출간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편집자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도적 권고
‘복음의 기쁨’
APOSTOLIC EXHORTATION
EVANGELII GAUDIUM
OF THE HOLY FATHER
FRANCIS
오늘날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는 것에 관해, 주교, 성직자, 봉헌생활자, 그리고 평신도에게...
1.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사람의 삶과 마음을 채워줍니다. 그분께서 주신 구원을 받아들인 사람은 죄와 공허함과 외로움에서 해방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라면 기쁨은 끊임없이 솟아납니다. 이 사도적 권고에서 저는 교회가 걸어야 할 새 길을 제시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복음화가 이 기쁨으로 가득 찬 새로운 장을 용감하게 열어가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I. 항상 새로운 기쁨, 나눠야 할 기쁨
2. 오늘날 소비주의가 휩쓸고 있는 심각한 위험은 자기만족의 탐욕스러운 마음에서 나오는 황폐함과 번뇌, 가벼운 쾌락에 대한 무절제한 추구, 그리고 무뎌진 양심입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자신만의 이익과 관심에만 몰두할 때마다, 다른 이들을 위한 자리, 사회적 약자를 위한 자리가 그의 마음에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듣지 않습니다. 하느님 사랑이라는 고요한 기쁨을 더 이상 느끼지 않습니다. 선한 일을 하려는 열망은 사라집니다. 이는 믿는 사람들에게도 실질적인 위험이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걸려 넘어지고 후회하고, 분노하고 냉담해집니다. 이것은 결코 존엄하고 충만한 삶을 사는 길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성심에서 나온 성령 안에서 사는 삶도 아닙니다.
3. 저는 이 순간 모든 곳의 모든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와 새롭게 또 인격적으로 만나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그분이 모든 그리스도인을 만날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주기를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매일 그렇게 해주기를 청합니다. 누구도 이 초대가 특정인에게만 해당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누구도 예외 없이 당신의 기쁨을 가져다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분을 만나려는 모든 사람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다가갈 때마다 우리는 그분이 이미 거기서 팔을 벌린 채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예수님께 “주님, 저는 스스로 속아 넘어갔습니다. 저는 수없이 당신의 사랑을 멀리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다시 있습니다. 당신과의 계약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저에게는 당신이 계셔야 합니다. 저를 다시 구원해주십시오. 주님 저를 다시 당신 구원의 품에 받아주십시오” 하고 말씀드릴 때입니다. 우리가 버림을 받을 때마다 그분께 돌아가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저는 다시 이렇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절대로 지치지 않고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그분의 자비를 찾는데 지치는 것은 바로 우리입니다.”라고. “일곱 번씩 일흔 번”(마태 18,22)이라도 서로 용서하라고 말씀하신 그리스도께서 그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일곱 번씩 일흔 번 용서하셨습니다. 수도 없이 반복해서 그분은 우리를 당신 어깨에 태우셨습니다. 누구도 이 무한하고 변함없는 사랑이 주신 존엄함을 우리에게서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며 오히려 항상 우리의 기쁨을 회복시킬 수 있는 이 사랑으로 그분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 머리를 들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해주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에서 도망치지 맙시다. 결코 포기하지 맙시다. 분명히 그렇게 합시다. 그분의 생명 말고는 아무것도 우리를 재촉하지 못하게 합시다. 그것만이 우리를 나서게 합시다.
4. 구약성경은 구원의 기쁨이 메시아 시대에 충만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기다리는 메시야를 기뻐하며 환호했습니다. “당신은 민족들을 많게 하시고, 기쁨을 크게 하십니다.”(9,3) 이사야 예언자는 시온에 있는 이들에게 노래를 부르며 나가서 그분을 만나라고 권고했습니다. “시온 주민들아 소리 높여 환호하여라!”(12,6) 예언자는 제단에서 이미 그분을 만난 이들에게 그 소식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라고 했습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시온아 높은 산으로 올라가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예루살렘아 너의 목소리를 한껏 높여라.”(40,9) 모든 창조물은 구원의 기쁨을 나눕니다.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 산들아, 기뻐 소리쳐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가엾이 여기셨다.”(49,13)
즈카리야 예언자는 주님의 날을 고대하며 “겸손하고 나귀를 타고” 오시는 왕을 환호하라고 부릅니다. “딸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딸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승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9,9)
아마도 가장 감동적인 초대는 스바니야 예언자일 것입니다. 그는 구원의 기쁨을 기념하면서 백성에게 하느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저는 다음의 구절을 읽을 때마다 전율을 느낍니다.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다.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 축제의 날인 양 그렇게 하시리라.”(3,17)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매일, 일상에서, 체험하는 기쁨, 우리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사랑스러운 초대에 응답하는 기쁨입니다. “얘야, 네가 가진 모든 것으로 자신을 잘 보살피고... 그날의 행복(즐거움)을 마다하지 말아라.”(집회 14:11, 14) 이런 말씀에서 부모 사랑이 얼마나 부드럽게 울려 퍼지고 있습니까!
5. 그리스도의 십자가 영광으로 빛나는 복음은 끊임없이 우리를 기쁨으로 초대합니다. 몇 가지 예만 들어도 충분합니다. “기뻐하라!”는 천사가 마리아에게 한 인사말입니다.(루카 1,28)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 요한은 태중에서 기뻐 뛰놀았습니다.(루카 1,41 참조) 마리아는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뜁니다.”(루카 1,47)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명을 시작했을 때 요한은 “그래서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요한 3,29)고 외쳤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스스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였습니다.(루카 10,21)
그분의 메시지는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1) 우리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그분의 넘치는 마음을 마시고 있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약속했습니다. “너희는 울며 비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요한 16,20) 그리고 그분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기뻐하였습니다.”(요한 20,20)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첫 그리스도인들이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었습니다.”(사도행전 2,26) 제자들이 갈 때마다 “큰 기쁨이 넘쳤습니다.”(8,8) 제자들은 박해를 당할 때조차도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13,52) 세례를 받은 내시는 “기뻐하며 제 갈 길을 갔습니다.”(8,39), 바오로를 가둔 간수와 “온 집안은 하느님을 믿게 된 것을 함께 기뻐하였습니다.”(16,34) 무엇 때문에 이 기쁨의 물결에 합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6. 그리스도인 가운데 부활이 없는 사순시기처럼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물론 저는 기쁨이 인생에서 항상 같은 방식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압니다. 특히 심각한 어려움에 처한 시기에는 그렇습니다. 기쁨이 익숙해지고 변하기는 하지만 항상 인내합니다. 이는 빛의 서광처럼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다했을 때 우리가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때 나타납니다.
저는 무거운 고통의 짐을 견뎌야 하는 사람들의 슬픔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천천히 그리고 천천히 그렇지만 확실히 우리는 믿음의 기쁨이 조용하지만 튼튼한 신뢰를 되살리도록 해야만 합니다. “당신께서 이 몸을 평화 밖으로 내치시어 저는 행복을 잊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내 마음에 새겨 나는 희망하네. 주님의 자애는 다함이 없고 그분의 자비는 끝이 없어 아침마다 새롭다네. 당신의 신의는 크기도 합니다... 주님의 구원을 잠자코 기다림이 좋다네.”(애가 3:17, 21-23, 26)
7. 때때로 우리는 핑계 거리와 불만거리를 찾으려는 유혹을 겪습니다. 마치 수많은 조건들이 충족된다면 분명히 행복할 수 있다는 듯이 행동합니다. 어느 정도 이는 우리의 “기술 사회가 즐거움을 많게 하는데 성공했으나, 기쁨을 낳기는 힘들다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제 생애에서 가장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기쁨을 저는 내세울 것이 거의 없는 사회적 약자들에게서 보았습니다.
저는 직업적 의무에 시달리는 가운데에서도 초연함과 단순함을 갖고 신앙에 충실한 이들이 보여주는 진정한 기쁨도 생각합니다. 그 모든 기쁨의 예들은 그 나름대로 하느님의 사랑에서 흘러온 것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당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저는 복음의 핵심을 우리에게 소개한 베네딕토 16세의 다음의 말을 반복해서 말씀드립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윤리적 선택의 결과나 사상의 선택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삶에 새로운 지평과 결정적 방향을 주는 어떤 사건, 어떤 사람과 조우하는 것이다.”
8. 하느님의 사랑은 풍요로운 친교로 열매를 맺는데, 오로지 이 하느님 사랑과의 만남 덕분에 우리는 편협함과 자기몰두로부터 해방됩니다. 우리가 인간적인 것을 넘어설 때, 우리가 완전한 진리를 얻을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때, 우리는 비로소 완전한 존재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화를 위한 우리의 모든 노력의 영감과 원천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우리 인생의 의미를 살리는 사랑을 받아들였다면, 그 사랑을 다른 이들과 나눌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청춘
II. 즐겁고 위로를 주는 기쁨인 복음화
9. 선함은 언제나 널리 퍼지려고 합니다. 선함과 진리에 대한 참된 체험은 그 본성상 우리 안에서 자라려고 합니다. 그리고 심오한 해방을 체험한 사람은 누구나 다른 이들의 요구에 보다 민감해집니다. 선이 확장되는 것처럼, 선은 뿌리를 박고 발전합니다. 만일 우리가 존엄하고 완전한 생명에로 나아가길 바란다면, 다른 이들에게 다가가 그들에게 좋은 것을 찾아야만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 바오로의 말씀은 전혀 놀랍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2코린토 5:14)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1코린토 9:16) 우리를 참되게 체험하면 본성상 사랑은 우리 안에서 커지려고 합니다.
10. 복음은 우리에게 보다 높은 차원, 그러면서 결코 모자라지 않는 삶을 살 기회를 줍니다. “생명은 포기함으로써 자랍니다. 생명은 안락함과 고립됨으로써 약해집니다. 실재로 생명을 가장 잘 누리는 사람은 땅에서의 안전을 떠나 다른 이들에게 생명을 전하는 사명으로 흥분하는 사람들입니다.” 교회가 복음화의 임무를 맡기려고 그리스도인을 부를 때, 교회는 단지 인격적으로 참된 완성을 가져오는 원천을 가리킬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 원천에서 “우리는 심오한 법칙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다른 이들에게 생명을 건네주기 위해 생명을 바치는 만큼 얻을 수 있고 성숙해진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파견(mission)이 의미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장례식에서 금세 돌아온 사람처럼 보이지 맙시다. 우리의 열정을 다시 찾고 불사릅시다. “우리가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을 때조차도 복음을 전하는 것은 즐겁고 위로를 주는 기쁨입니다.... 때로는 번뇌하며, 때로는 희망을 갖고 나아갈 길을 찾고 있는 오늘날 세상이 낙심하거나, 의기소침하거나, 참을성 없거나 불안한 복음전파자로부터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기쁨을 받아들인 복음의 사목자, 열정으로 그 삶이 빛나는 복음의 사목자로부터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영원한 새로움
11. 복음선포(preaching)의 쇄신은 냉담한 사람이나 미지근한 사람은 물론 신자들에게 신앙이 주는 새로운 기쁨을 얻게 하고, 복음화 작업이 주는 결실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복음선포의 핵심은 항상 같을 것입니다. 즉 당신의 위대한 사랑을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내신 하느님께서 나이에 관계없이 끊임없이 당신의 자녀들을 새롭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이사야 40,31)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복음”(묵시록 14,6)이십니다. 그분은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십니다.”(히브리 13,8) 그러나 그분의 풍요로움과 아름다움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분은 영원한 청춘이시며 새로움의 원천이십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깊은 풍요와 지혜와 지식”(로마 11:33)을 항상 찬미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성요한은 “하느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부함은 너무 깊어서, 또 너무 넓어서, 우리 영혼이 아무리 많이 알게 된다 하더라도, 항상 그 안으로 파고들 수 있습니다.”(7)고 했습니다. 이레네오 성인은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모든 새로움을 갖고 오셨습니다.”(8)고 했습니다. 이 새로움으로 그분은 항상 우리의 삶과 우리 공동체를 새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비록 그리스도교 메시지가 어둠과 교회의 나약함의 시기에 놓여 있다고 하더라도, 그 메시지는 결코 수명을 다하여 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가두려 했던 활기 없는 범주들을 뚫고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창조력으로 우리를 끊임없이 놀라게 하십니다. 우리가 원천이신 그분께 돌아가려고만 한다면, 그리고 복음의 본래 신선함을 되찾으려고만 한다면, 새로운 길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오늘날 이 세상을 위해 창조의 새로운 길들이 다양한 표현 양식으로, 새로운 의미를 갖는 표지와 언어들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참된 복음화는 항상 “새로운” 형태를 갖습니다.
12. 이 사명이 분명히 커다란 관대함을 요구하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어떤 개인의 영웅적 행위라고 보는 것은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명은 우리가 보고 이해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뛰어넘는 주님의 으뜸이며 가장 위대한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첫째 복음 선포자이시며 가장 위대한 복음 선포자”이십니다. 복음화의 모든 활동에서 첫째는 항상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셔서 당신과 협력하게 하셨고, 당신 성령의 힘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진짜 새로움은 하느님 자신이 직접 가져오시고, 수많은 방법으로 불러일으키고, 재촉하고, 인도하고 그리고 수행하시는 그 새로움입니다. 교회의 생활은 항상 하느님께서 주도권을 가지셨음을, 즉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1요한 4,19)는 것을, 그분만이 “자라게 하신다”(1코린토 3,7)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어야 합니다. 너무 어렵고 힘들어서 우리 인생 전부를 바쳐야 하는 그 임무에서도 우리가 기쁨의 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같은 확신 때문입니다.
13. 이 사명이 갖는 새로움을 마치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면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살아있는 역사에 대한 망각과 분리를 가져오는 것으로 보아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기억은 이스라엘의 기억 그 자체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것으로서, 우리가 “새로운 명령(신명)”이라 불러도 되는 우리 신앙의 어떤 차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교회가 매일 기념하는 것으로서, 그리고 깊게 참여해야 할, 그분 파스카의 사건인 성찬례(Eucharist)를 남겼습니다.(루카 22,19 참조) 복음화활동의 기쁨은 언제나 이 고마운 기념에서 나타납니다. 이는 우리가 끊임없이 탄원해야 할 은총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마음을 울렸던 순간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요한 1,39) 예수님과 함께, 이 기념이 “큰 구름같이 많은 증인들을”(히브리 12,1) 우리에게 선사합니다. 우리는 큰 기쁨을 갖고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인 신자들을 기억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일러 준 여러분의 지도자들을 기억하십시오.”(히브리 13,7).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보통 사람으로서 우리와 비슷하며 우리에게 생명의 신앙을 소개했습니다. “나는 그대 안에 있는 진실한 믿음을 기억합니다. 먼저 그대의 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에우니케에게 깃들어 있던 그 믿음을.”(2티모테오 1,5) 믿는 이들은 본질적으로 “기억하는 사람”입니다.
복음화, 예수 배척한 이들도 배제하지 않는다
III. 신앙의 전달을 위한 새로운 복음화
14. 시대의 징표를 우리와 함께 읽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성령의 재촉을 경청한 제13차 주교 시노드 총회가 ‘신앙의 전달을 위한 새로운 복음화’란 주제를 토의하기 위해 2012년 9월7일부터 28일까지 열렸습니다. 시노드는 새로운 복음화가 모든 이에게 제시한 일종의 호출이라는 것과 세 가지 주요한 배경들에서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재확인했습니다.
첫째로, ‘일반 사목 직무’(ordinary pastoral ministry)의 영역입니다. 이는 “성령의 불로 타오르며 공동체 예배에 규칙적으로 참여하며 영원한 생명의 빵과 그분의 말씀으로 성장하기 위해 주님의 날에 모인 신자들의 마음을 뜨겁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범주에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지만 진실하고 깊은 믿음을 간직하고 있는 다른 신앙인들도 포함시킬 수 있습니다. 일반 사목 직무는 신자들이 일상생활에서 하느님의 사랑에 보다 더 완전하게 응답할 수 있도록 영적 성장을 도우려 합니다.
두 번째 영역은 “세례 성사가 요구하는 것을 따르고 있지 않은 신자들”입니다. 교회와 의미 있는 관계를 갖고 있지 않으며, 신앙이 주는 위로를 더 이상 체험하지 않는 이들입니다. 교회는 그들 마음에서 신앙의 기쁨이 되살아나서 복음에 헌신하는 회심이 이루어지도록 어머니의 심정으로 도우려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복음화가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거나 항상 그분을 배척한 이들에게 복음을 가르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잊을 수 없습니다.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은 아주 조용하게 하느님을 찾고 있는데, 이들은 그분의 얼굴을 보고 싶어합니다. 하다못해 고대 그리스도교 전통을 갖고 있는 지역에서도 그렇습니다. 이들 모두는 복음을 받아들일 권리를 갖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도 배제하지 않고 복음을 전파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 일을 수행하는 것이 우리에게 새로운 임무가 부여된 것처럼 보이기보다, 자기들의 기쁨을 나누려는 사람처럼, 아름다운 지평선을 가리키는 사람처럼, 맛있는 잔칫상에 다른 사람을 초대하는 사람처럼 보여야만 합니다. 교회의 성장은 그들을 개종 시켜서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이루어집니다.
15.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리스도와 떨어져 있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추진력을 떨어뜨리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 하면 이것이 교회의 첫 번째 임무이기 때문입니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오늘의 선교 활동은 여전히 교회에 가장 큰 도전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교 과업은 여전히 가장 중요한 것이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우리는 선교 활동이 “교회의 모든 활동에 있어서 모범이 된다는 것”을 인정할 것입니다.
라틴 아메리카의 주교들은 우리가 “우리 교회 건물에서 조용하게 수동적으로 기다릴 수 없습니다.”고, 그리고 우리는 “오로지 유지하기만 하는 선교 직무에서 벗어나 분명하게 선교하는 사목 직무로 나아가야 합니다.”고 밝혔습니다. 교회에게는 이 과업이야말로 항상 무한한 기쁨의 원천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루카 15:7)
이 권고의 범위와 경계
16. 저는 시노드 교부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 권고를 쓰게 되어서 행복했습니다. 그럼으로써 저는 시노드가 기울인 노력의 풍부한 결실을 거두어들이고 있습니다. 게다가 저는 많은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했으며 복음화라는 교회의 일에 관한 이 특별한 부분에 대해 저만의 관심을 표현하려 했습니다. 오늘날 복음화와 관련한 문제들은 수도 없이 많으며, 이 자리에서 논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더 많은 성찰과 연구가 요청되는 그 많은 문제들을 탐구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저는 교회와 세상에 영향을 주는 모든 문제에 대해 교도권이 결정적이거나 확정된 언어로 제시해야만 한다고 믿지도 않습니다. 각 지역에서 떠오르는 모든 문제를 식별하는 데 있어서 교황이 지역의 주교들의 자리를 차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건전한 “탈중앙화”가 추진될 필요가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17. 이 자리에서 저는 복음화의 새로운 국면에 처해 있는 전체 교회를 안내하고 격려하는 몇 가지 지침을 제시하기로 했습니다. 생명력과 열정을 갖는 복음화를 위해서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그리고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인류의 빛>의 가르침에 기초해서, 저는 여러 주제 가운데 다음과 같은 문제에 관해 충분히 토론하기로 결정했습니다.
a) 교회의 선교 범위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회의 개혁(reform)
b) 사목 활동가들이 직면한 유혹들
c) 교회, 복음을 전하는 하느님 백성 전체로서의 교회
d) 강론과 그 준비
e)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을 포함하는 문제
f) 사회에서 평화와 대화
g) 사명을 위한 영적 동기들
18. 저는 이런 주제들을 충분히 다루었습니다. 때로는 지나치다고 생각할 정도로 자세히 다루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완전한 글을 제공하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단순히 오늘날 교회의 사명에 있어서 중요하고 실질적인 함의를 드러내려는 방법으로서 그렇게 한 것일 뿐입니다. 중요하고 실질적인 이 함의들은 복음화의 특정 스타일을 구체화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여러분이 수행하는 모든 활동에 이를 채택하기를 요청합니다. 이런 방법으로 우리는 매일 노력을 기울이면서 성경의 권고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필리비 4:4)
제 1 장
교회의 선교 변형
19. 복음화는 예수님의 선교 명령에 순종하면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오 28:19-20) 이 구절에서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모든 시대 모든 장소에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당신을 따르는 이들을 파견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에 대한 믿음이 지구 곳곳에 퍼질 수 있도록 말입니다.
I. 길을 나서는 교회
20.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께서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 “길을 나서라”고 얼마나 재촉하시는지 끊임없이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은 새 땅으로 가라는 부르심을 받습니다.(창세기 12:1-3 참조) 모세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습니다. “가거라. 내가 너를 보낸다.”(탈출기 3:10) 약속한 땅으로 백성을 데리고 가라(탈출기 3:17)는 부르심입니다. 예레미야에게 하느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가 보내면 누구에게나 가야 한다.”(예레미야 1:7) 오늘날 “가서 제자로 삼아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변화무쌍한 시나리오를 갖고, 또 복음화라는 교회의 새로운 사명에 대한 전혀 새로운 도전으로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울림은 우리 모두를 이 새로운 선교적 ‘외출’에 참여하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각 그리스도인과 모든 공동체가 주님께서 가리키는 길을 반드시 식별해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편안한 지역에서 나와서 복음의 빛이 필요한 모든 “변방”에 가기 위해 길을 나서라고 부르시고, 우리는 여기에 복종해야만 합니다.
21. 제자들의 공동체를 활기차게 하는 복음의 기쁨은 선교의 기쁨입니다. 일흔 두 제자는 그들이 사명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기쁨을 느꼈습니다.(루카 10:17 참조) 예수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즐거웠을 때, 그리고 아버지께서 가난하고 작은이들에게 당신을 드러내신 것을 찬미할 때 기쁨을 느끼셨습니다.(루카 10:21 참조) 오순절에 사도들이 “저마다 자기 지방 말로” 가르치는 것을 듣고 첫 그리스도인들은 놀라며 이 기쁨을 느꼈습니다. 이 기쁨은 복음이 선포되었으며 결실을 맺고 있다는 표징입니다. 그러나 길을 나서는 것, 우리 자신 속에 갇혀 있지 않고 밖으로 나가 계속해서 좋은 씨앗을 뿌려야 하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러 떠나온 것이다.”(마르코 1:38) 일단 어떤 곳에 씨앗이 뿌려지면,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설명하려고, 혹은 더 많은 기적을 베풀려고 머물지 않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그분을 다른 이웃 고을을 향해 길을 떠나도록 하십니다.
22. 하느님의 말씀이 갖는 능력은 예측할 수 없습니다. 복음은 일단 뿌려지면 농부가 잘 때조차도 저절로 자라는 씨앗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마르코 4:26-29) 교회는 이를 말씀이 갖는 감당할 수 없는 자유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말씀은 그것이 우리의 계산과 생각을 뛰어넘어 말씀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23. 교회가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은 함께 여행한다는 것입니다. “친교와 사명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스승의 모범에 충실히 따르면서, 오늘의 교회가 두려움이나 거리낌이나 망설임 없이 길을 나서서 모든 곳의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가르치는 것은 진실로 중요합니다. 복음의 기쁨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누구도 배제될 수 없습니다. 베들레헴의 목자들에게 천사가 선포한 것은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전한다.”(루카 2:10)는 것이었습니다. 묵시록은 “땅에서 사는 사람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언어권과 백성에게 선포할 영원한 복음”을 이야기합니다.
첫발을 내딛고, 속하고 지지하며, 열매를 맺고 즐거워합니다.
24. “길을 나서는” 교회는 첫발을 내딛고, 그들에게 속하며 지지하고, 열매를 맺고 즐거워하는 선교하는 제자 공동체입니다. 복음화 하는 공동체는 주님께서 주도하십니다.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요한 4:19 참조) 그래서 우리가 앞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그 공동체는 과감하게 먼저 움직이며, 다른 이들에게 다가 가고, 버림받은 이들을 찾아 나서며, 사거리에 서 있다가 내버려진 이들을 환영합니다. 그 같은 공동체는 끊임없이 자비심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이 자비심은 아버지의 한량없는 자비의 힘을 체험한 결실이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힘을 내서 첫발을 내딛읍시다. 그리고 그 안으로 들어갑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 안에 들어가셨고, 당신 자신 스스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무릎을 꿇고 그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에게 “이것을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요한 13:17)고 하십니다. 복음화 공동체는 말과 행동으로 사람들의 일상으로 들어갑니다.
복음화 공동체는 분리된 것을 이어줍니다. 필요하다면 기꺼이 자신을 낮춥니다. 그리고 다른 이에게 고통 받는 그리스도의 몸을 쓰다듬으면서 인간생명을 끌어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양의 냄새”가 나고, 양들은 기꺼이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려합니다. 복음화 공동체는 지지합니다. 사람들과 항상 나란히 걷습니다. 그 길이 아무리 어렵고 먼 길이 될지라도 말입니다.
복음화 공동체는 사도적 인내와 끈기 있는 전망에 익숙합니다. 복음화는 대부분 시간의 제약 없이 인내심을 가져야 이루어집니다. 주님의 선물에 충실한 복음화 공동체는 열매를 맺습니다. 복음화 공동체는 항상 열매에 관심을 갖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공동체가 풍성한 열매를 맺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은 씨앗이 싹 트는 것을 보면 푸념하지도 들뜨지 않습니다. 그는 말씀이 특정 상황에서 몸이 되어 새 생명의 결실을 내도록 길을 찾습니다. 그 결실이 아무리 불완전하거나 미흡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말입니다.
제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려는 출발선에 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순교조차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목표는 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 받아들여지고 그 해방과 쇄신의 힘이 드러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복음화 공동체는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그 공동체는 항상 즐거워하는 법을 압니다. 그 공동체는 모든 작은 승리도 기념합니다. 복음화의 과업에서 한 걸음이라도 나간다면 그 때마다 기념합니다. 기쁨의 복음화는 전례에서 아름다움이 됩니다. 전례는 선을 전파하려는 우리들이 매일 관심을 갖는 분야입니다. 교회는 복음화하며 전례의 아름다움을 통해서 스스로 복음화 됩니다. 전례는 복음화를 기념하는 일이며, 또한 새로워진 교회가 자기를 내어주는 원천입니다.
II. 사목 활동과 전환
25. 저는 오늘날의 문헌들이 과거와 같은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빨리 잊혀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제가 이 자리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실용적인 의의와 중요한 결과를 갖는다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저는 모든 공동체가 사목에서 또 선교에서 지금처럼 남아있지 않고 전환의 길을 따라 걷는데 필요한 노력을 다하길 희망합니다. “단순한 경영”은 더 이상 충분할 수 없습니다. 전 세계에 어디든지 우리는 “항상 파견의 상태”에 있어야 합니다.
26. 바오로 6세는 쇄신을 심화시키라고, 또한 쇄신이 개인들뿐만 아니라 전체 교회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라고 초대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우리를 자극하는 기념비적인 텍스트로 돌아갑시다.
“교회는 통찰의 눈으로 자신의 안을 바라봐야 합니다. 교회의 신비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생생하고 또렷한 교회의 자기 인식은 마땅히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거룩하고 흠 없는 신부로서 바라보고 사랑하시는 교회의 이상적 모습(에페소 5:27)과 오늘날 세상에 보여주고 있는 교회의 실제 모습을 비교할 수 있게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교회가 지체하지 않고 용맹하게 쇄신의 길에 나서게 하는 원천입니다. 교회의 구성원들이 지닌 결점들을 교정하려는 투쟁, 그리고 교회 자신을 교회의 모범이신 그리스도에 비추어 검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의 전환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충실성에서 나오는 끊임없는 자기 쇄신에 대한 개방성으로 제시했습니다.
“교회의 모든 쇄신은 본질적으로 교회 소명에 충실성의 증대에 있다. 나그네 길에 있는 교회는 그 자체로서 또 인간적인 지상의 제도로서 언제나 필요한 이 개혁을 끊임없이 계속하도록 그리스도께 부름 받고 있습니다.”
복음화에 기울이는 노력을 방해할 수 있는 교회의 구조들이 있다. 좋은 구조들이라 하더라도 끊임없이 이것을 유지하고 평가하는 생명력이 있을 때야 비로소 이 구조가 우리에게 도움이 됩니다. 새로운 생명과 참된 복음 정신과 “부르심에 대한 충실성”이 교회에 없다면, 어떠한 새로운 구조들도 곧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미룰 수 없는 교회 쇄신
27. 저는 “선교의 선택”을 꿈꾸고 있습니다. 즉 모든 것을 변형시킬 수 있는 선교를 위한 자극 말입니다. 교회의 관습, 행동방식, 시간과 일정, 언어와 구조가 교회의 자기 보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날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 적합하게 길을 열어줄 수 있는 그런 변형을 꿈꾸고 있습니다. 사목의 전환이 요구하는 구조의 쇄신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조들을 보다 사명 지향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 모든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일상적인 사목 활동을 보다 포괄적이고 개방적으로 만들려는 노력, 사목 활동가들에게 쉼 없이 길을 나서게 하려는 열망을 불러일으키는 노력, 그리고 이런 방법으로 예수님께서 당신의 벗으로 부르신 모든 사람으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는 노력으로 말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오세아니아의 주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쇄신이 교회의 내부로 향하려는 미끼에 걸려들지 않으려면 그 목표로서 사명(mission)을 가져야만 한다.”
28. 본당은 구시대의 제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본당은 엄청난 유연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당은 사목자와 공동체의 개방성과 선교의 창조성에 따라서 매우 다른 경로를 취할 수 있습니다. 본당이 복음화를 위한 유일한 제도는 아니지만, 만일 자기 쇄신과 끊임없는 적응을 할 수 있다면, 본당은 계속해서 “그 자녀들의 가정들 한 가운데서 살아 있는 교회”(26)가 됩니다. 이것은 본당 사람들의 생활과 가정을 만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만나지 않거나 혹은 선택된 몇 사람끼리의 폐쇄된 무리에 불과한 불필요한 제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당은 특정 지역에 존재하는 교회입니다. 본당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그리스도교 생활의 성장을 위해, 대화와 선포와 사랑의 확장과, 경신례와 기념을 위한 환경입니다. 모든 활동에서 본당은 그 구성원들을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훈련시키고 격려합니다. 공동체 중의 공동체이며, 목마른 사람이 그 여정 중에 물을 마시는 거룩한 곳이며, 선교 활동의 중심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본당을 검토하고 새롭게 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본당을 사람들에게 더 가깝게 만들고, 본당을 살아있는 친교와 참여의 장으로 만들고, 본당을 철저하게 사명 지향적인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29. 다른 교회 기구들, 기초 공동체들, 작은 공동체들, 사회운동들, 그리고 연합체들은 교회를 풍요롭게 하는 원천입니다. 성령께서는 서로 다른 영역과 분야를 복음화 하기 위해 이들을 자라게 한다. 그것들은 자주 복음화를 위한 새로운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교회를 새롭게 하는 세상과 대화할 새로운 힘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풍요로움을 갖고 있는 지역 본당과 결합하고, 지역 교회(a particular Church)의 전반적 사목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그들에게도 유익하다는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통합은 우리가 복음에만 혹은 교회에만 집중하지 않도록 막아줄 것이며, 뿌리가 없는 단자들이 되는 것을 막아줄 것이다.
30. 관할 주교가 이끄는 가톨릭교회로서 각 지역 교회도 마찬가지로 선교의 전환을 이루어야 합니다. 지역 교회는 복음화의 제1의 주체입니다. 왜냐하면 지역 교회는 어떤 특정 지역에 있는 하나의 교회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며, 그 지역 교회 안에서 “하나이며,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온 그리스도의 교회가 진정으로 현존하고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지역 교회는 특정 지역에 구체화된 교회로서, 그리스도께서 주신 구원의 모든 수단을 갖추고 있지만, 지역적 특성을 갖는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전달되는 지역교회의 기쁨은 그분을 모르는 곳에 그분을 전파하려는 관심으로, 동시에 새로운 사회문화적 배경을 갖는 곳이나 자기 지역의 변두리로 끊임없이 길을 나섬으로써 드러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빛과 생명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나 지역교회는 그곳에 기꺼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선교 정신에 집중하여 활발히 결실을 맺기 위해, 저는 각 지역교회가 식별, 정화, 그리고 개혁의 적절한 과정을 밟기를 권고합니다.
31. 주교는 믿는 이들이 한 마음 한 영혼이었던 초대 그리스도 공동체의 이상을 따라서(사도행전 4,32 참조), 항상 자기 교구 안에서 이 선교의 친교를 발전시켜야만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주교는 자기 백성 앞에 나서서 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그들의 희망을 살려야 합니다. 때로는, 단순히 그들 가운데 겸손하고 자비로운 존재로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그들 가운데 뒤처지는 사람을 도우며 뒤를 따라야 합니다. 혹은 과감히 새로운 길로 접어드는 그들을 따라야 합니다. 역동적이며 개방적이며 선교적인 친교를 촉진해야 하는 사명에 따라, 그는 교회법이 제시하는 참여의 방법들과 다른 형태의 사목의 대화를 촉진하고 발전시켜야 합니다. 이 때 그는 그가 듣고 싶어 하는 것을 말하는 이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참여 과정의 주요 목적이 교회의 조직이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오히려 모든 이에게 다가가려는 선교의 열정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32. 제가 다른 이들에게 요구하는 것을 저 자신도 실천해야 마땅하기 때문에, 저 역시 교황권의 전환에 대해서 생각해야만 할 것입니다. 로마의 주교로서 저의 직무에 대해 제안한 것들을 개방적으로 검토할 것입니다. 그 제안들은 저의 직무 수행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직무에 부여하려 하셨던 의미에 보다 충실한 것이 되도록, 또한 오늘날의 복음화의 필요성에 보다 충실한 것이 되도록 하는 것들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수위권이 그 사명에 핵심적인 것임을 부정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새로운 상황에 개방되어 있는 수위권 행사 방법을” 찾는데 도움을 청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그다지 진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교황직과 보편교회의 중앙구조들 역시 사목 전환(pastoral conversion)의 요청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초기 총대주교좌 교회들(the ancient patriarchal Churches)과 마찬가지로 주교회의들(episcopal conferences)이 “단체정신(합의체적 정신 collegial spirit)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여러 많은 실질적 방법에 기여할” 위치에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이런 바람은 온전하게 실현되지 않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교회의의 법률적 지위가 아직은 충분히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주교회의의 법률적 지위를 교의의 권위(doctrinal authority)를 포함해서 구체적인 직권을 가진 주체로 볼 수 있는 정도로까지는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과도한 중앙 집중화는 도움을 주기보다 교회의 생활과 교회의 선교 확대를 복잡하게 합니다.
33. 선교의 핵심에서 사목 직무는 “우리는 이미 그런 식으로 다 했어”하고 말하는 자기만족의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저는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공동체에서 복음화의 목표, 구조, 스타일과 방법을 다시 생각하는 이 과업에서 과감하고 창의적이기를 바랍니다. 목표를 성취하는 수단을 자치적으로 찾지 않고 세운 목표는 필연적으로 환상임이 드러날 것입니다. 저는 모든 사람이 이 문헌에서 제시한 지침을 두려움이나 거리낌 없이, 그리고 용감하게 그리고 활발하게 적용하기를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현명하고 현실적인 사목적 식별 속에서 특히 주교들의 지도를 따라서 서로 형제로서 자매로서 서로 의지하며 행하는 것입니다.
'자비'는 복음의 핵심
III. 복음의 핵심에서부터
34. 우리가 모든 것을 선교에 맞춘다면, 그것은 메시지를 소통하는 방법에도 영향을 줄 것입니다. 인스턴트 커뮤니케이션과 때때로 편견을 갖는 미디어 보도를 볼 수 있는 오늘날, 우리가 전파하는 메시지는 왜곡되거나 부수적 측면에 환원될 위험이 아주 큽니다. 그런 식으로 교회의 도덕적 가르침이 본래적 의미가 담긴 맥락에서 벗어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전파하는 메시지가 부수적인 것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이 부수적인 것은 그리스도의 메시지 핵심을 담고 있지도, 전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우리는 현실적이 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청중이 우리가 말하는 것의 배경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다고 간주해서는 안 됩니다. 혹은, 복음의 핵심은 우리가 말하는 것에 의미, 아름다움, 매력을 부여하는데, 청중이 우리가 말하는 것을 그 복음의 핵심과 연결시킬 수 있다고 간주해서는 안 됩니다.
35. 선교 스타일에서 사목 직무는 수많은 교의를 집요하게 토막 내서 전달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누구도 배제하거나 제외하지 않고 모든 이에게 실질적으로 다가갈 선교 스타일과 사목 목표를 채택한다면, 메시지는 본질적인 것에 집중해야만 합니다. 메시지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웅장하며, 가장 매력 있으며, 동시에 가장 필요한 것에 집중해야만 합니다. 메시지는 알기 쉬워야 합니다. 메시지는 그 깊이와 진리를 놓치지 않으면서, 무엇보다도 강력하고 설득력이 있어야 합니다.
36. 계시된 모든 진리들은 같은 거룩한 원천에서 나오며, 같은 신앙심으로 믿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진리들 가운데 어떤 것은 복음의 핵심을 직접 표현하는데 좀 더 중요합니다. 그 가운데 가장 빛나는 것은 돌아가시고, 이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히 드러난 하느님이 구원하시는 사랑의 아름다움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가톨릭 교리의 여러 진리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와 이루는 관계는 서로 다르므로, 진리의 서열, 또는 ‘위계’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이는 교회의 도덕적 가르침을 포함한 교회의 모든 가르침에 대해서, 그리고 신앙의 도그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37.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교회의 도덕적 가르침은 덕목들 사이에, 그리고 그 덕에서 나오는 행동들 사이에 그 나름의 ‘위계’가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갈라디아 5,6)입니다. 이웃을 향한 사랑의 행동들은 성령의 내적 은총을 가장 완벽하게 겉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새 법(the New Law)의 기초는 성령의 은총 안에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에서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토마스는 그래서 외적 행동과 관련해서, 덕목 가운데 ‘자비’야말로 가장 위대한 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자비는 그 자체로 덕목 가운데 가장 위대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덕들은 자비를 중심으로 움직이며, 무엇보다도 그 덕들의 부족함을 메워주기 때문입니다. 그 자비를 통해 그분의 전능하심이 가장 위대하게 드러납니다.”
38. 공의회의 가르침에서 사목적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공의회의 가르침은 교회의 오랜 신념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첫째, 복음을 가르칠 때 균형감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이는 어떤 주제를 빈번하게 다루는지, 가르침에서 그 주제를 얼마나 강조하는 지에서 드러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전례주년에서 어떤 본당 사제가 절제를 열 번 말하지만, 사랑이나 정의를 두세 번만 말한다면 불균형이 나타나고, 엄밀하게는 복음을 가르치거나 교리를 가르칠 때 가장 많이 제시되어야 할 그런 덕(사랑과 정의)을 간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총보다는 법에 대해서, 그리스도보다는 교회에 대해서, 하느님의 말씀보다는 교황에 대해서 더 많이 이야기할 때 똑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39. 덕목 사이에는 유기적 일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적 이상에서 그 어떤 덕도 제외될 수 없음과 같이 어떤 진리라도 부정되어서는 안 됩니다. 복음 메시지가 갖는 통합성은 해체되어서는 안 됩니다. 게다가 각 진리는 그리스도교 메시지가 갖는 조화로운 전체성에 결합됐을 때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모든 진리들은 중요하며 서로를 밝게 비춰줍니다.
가르침이 복음에 충실할 때, 특정 진리들이 중심을 차지하는 것은 분명해집니다. 또 이 때 그리스도교 도덕이 단순히 스토아 철학의 한 형태도, 자기 부정도, 단순한 실천 철학도, 혹은 죄와 거짓의 목록도 아님이 분명해집니다. 그 모든 것 이전에, 복음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사랑의 하느님께 응답하도록, 다른 사람에게서 하느님을 보라고, 다른 사람의 선익을 찾아 길을 나서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이 초대를 모호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 모든 덕들은 사랑의 이 응답에 봉사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 초대가 강하게 그리고 매력적으로 빛나지 않으면, 교회의 가르침의 체계는 사상누각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에게는 가장 큰 위기입니다. 이는 가르치는 것이 자칫 복음이 아니라 특정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교의적 관점 혹은 도덕관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메시지는 그 신선함을 잃을 위험이 있을 것이며, “복음의 향기”가 더 이상 나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는 안전지대 벗어나 거리의 흙을 신발에 묻혀야
IV. 인간적 한계로 구체화되는 사명
40. 교회는 그 자체로 선교하는 제자입니다. 교회는 계시된 말씀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그리고 진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성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서 주석가들과 신학자들의 임무는 “교회의 판단이 성숙해지도록” 돕는 것입니다. 다른 학문도 고유한 방법으로 이 일을 돕습니다. 예를 들어 사회과학에 관해서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런 연구를 높이 평가하는데, 그 학문은 “교회의 가르치는 사명에 도움이 되는 구체적인 사항들을 이끌어내는 것을” 돕는다고 하였습니다.
교회 내부에서도 수많은 주제들을 연구하고 자유롭게 성찰하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철학 사조, 신학 사조, 사목실천 사조들은 존중과 사랑의 정신으로 성령에 의해 조화를 이룬다면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 갖는 그 풍부함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을 인도하고 아무런 해석의 여지도 남기지 않는 단일한 교리체계를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바람직하지도 않으며 혼란을 야기하는 것으로 비칠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 그 같은 다양성이야말로 소진될 수 없는 복음의 풍요로움이 갖는 다른 모습들을 드러내고 발전시키는데 기여합니다.
41. 동시에, 오늘날 빠르고 광범위한 문화적 변화 속에서, 우리는 변치 않는 진리들을 새로움을 갖고 나타나는 언어로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합니다. “신앙의 보고는 하나입니다. ... 그러나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신앙인들이 완전히 정통적인 언어로 들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복음과 거리가 먼 어떤 것을 취할 때가 있습니다. 이는 그 언어들 사이에 말하고 이해하고 표현하는 방법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생깁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인류에 관한 진리를 소통하려는 거룩한 의도를 갖고, 때로는 거짓 신이나 실제로는 그리스도교적인 것이 아닌 인간적 이상을 신앙인들에게 줍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그 실체를 전하는 데에는 실패하면서 어떤 공식적 표현에만 매달립니다. 그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절대로 잊지 맙시다. “진리는 다른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습니다. 이런 표현 양식의 쇄신은 현대인에게 변치 않는 의미를 갖는 복음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 됩니다.”
42. 이 모든 것이 복음을 가르치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복음이 갖는 아름다움을 모든 사람이 분명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를 바란다면 말입니다. 물론 교회의 가르침을 모든 사람에게 쉽게 이해시키고 납득시킬 수는 없을 것입니다. 신앙은 언제나 십자가의 그 어떤 것으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즉 신앙은 분명히 불명료함을 갖습니다. 그러나 이 불명료함이 우리 신앙에 동의하는 이들이 갖는 확고함을 손상시키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명료한 이성과 논증을 넘어 ‘사랑’이라 불리는 누이가 됩니다. 우리는 모든 종교적 가르침이 궁극적으로 가르치는 사람의 삶에서 드러난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르치는 사람의 삶은 언행일치와 사랑과 증언으로 사람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의를 불러일으킵니다.
43. 교회의 지속적 식별 과정에서, 교회는 어떤 관습이 복음의 핵심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보게 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비록 역사적으로 뿌리가 깊다고 하더라도, 더 이상 적절하게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 어떤 것은 아름다운 것일 수 있지만, 복음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더 이상 기여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주저하지 말고 재검토해야 합니다.
동시에 교회는 당대에 분명히 실효성이 있었지만 백성의 생활을 형성하고 지도하는데 더 이상 유용성을 갖지 않는 그런 규칙이나 규정을 갖고 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하느님 백성에게 주신 규정들은 “매우 적다”고 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그는 후대에 교회가 연이어 내놓은 이용한 규정들은 “신자들의 삶에 짐이 되지 않도록”, 그리고 우리의 종교가 봉사의 형태가 되도록 절제되어야만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가 반드시 자유로워지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수세기 전에 하신 이 경고는 오늘날 정말로 시의적절한 것입니다. 교회의 개혁과 모든 이에게 다가갈 수 있는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개혁을 숙고할 때 반드시 이 점이 그 기준의 하나가 되어야만 합니다.
44. 더구나 신앙이나 하느님을 향한 여정에서 형제자매로 동행하는 목자와 교우들은 <가톨릭교회 교리서>가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어떤 행동에 대한 인책성(引責性)과 책임은 무지, 부주의, 폭력, 공포, 습관, 무절제한 감정과 그 외에 정신적 사회적 요인들 때문에 줄어들거나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복음적 이상을 손상하지 않으면서, 목자와 교우들은 인내와 자비를 갖고 인격적 성장에 동행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인격적 성장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사제들에게 저는 고해소가 고문실이 아니라, 우리가 최선을 다하도록 자극하는 주님의 자비를 만나는 곳임을 환기시키고 싶습니다. 인간이 갖는 많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한 걸음만 더 나가갑시다. 그것이 겉으로는 질서정연해 보이면서 어떤 어려움도 직면하지 않으며 지내는 일상보다 더욱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릴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이 주는 매력과 위안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 사랑은 모든 사람 안에 신비롭게 활동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사랑은 사람들의 업적과 실패를 훌쩍 뛰어넘습니다.
45. 우리는 복음화의 과업이 언어와 환경의 제약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복음화의 과업은 구체적인 환경에서 복음의 진리를 효과적으로 소통시키는 길을 찾습니다. 물론 언제나 완전하지는 않을지라도 복음의 진리와 선함과 빛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선교의 마음은 이 한계를 아는 것이며, 스스로 “약한 이에게 약한 사람이... 모든 이에게 모든 것”(1코린토 9:22)이 되는 것입니다. 선교의 마음은 결코 스스로를 가두어서도, 자기의 안전지대로 피해서도, 완고함과 방어책을 채택해서도 안 됩니다. 선교의 마음은 복음을 나름대로 이해하고, 성령의 길을 식별하면서 성장한다는 것을 인정하며, 그래서 항상 좋은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비록 그 과정 중에 신발에 거리의 흙이 묻더라도 말입니다.
상처 입고 멍들고 먼지 묻은 교회
V. 열린 마음을 지닌 어머니
46. “길을 나서는” 교회는 그 문이 항상 열려 있는 교회입니다. 변방에 있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아무런 목적도 없이 세상으로 뛰쳐나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다른 이들을 보고 그들의 소리를 듣기 위해, 여기저기 달리는 것을 멈추고 길 위에서 비틀거리는 사람과 함께 하기 위해 우리의 열망을 잠시 내려놓고 천천히 가는 것이 더 좋습니다. 때로 우리는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처럼 되어야 합니다. 그는 아들이 돌아올 때 들어올 수 있도록 항상 문을 열어놓습니다.
47. 교회는 그 문이 항상 활짝 열려 있는 아버지의 집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개방성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표지는 우리 교회의 문들이 항상 열려 있어서 성령의 인도로 누군가 하느님을 찾기 위해 왔을 때 그가 문이 닫혀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닫혀 있어서는 안 되는 또 다른 문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교회의 생활에 어떤 식으로든 참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공동체의 일부가 되어야만 합니다. 성사의 문이 사소한 이유로 닫혀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는 그 자체로 “문”인 세례 성사의 경우 특히 그렇습니다. 성체성사가 성사생활의 완성이라 하더라도, 완전한 사람을 위한 상이 아니라 약한 사람을 위한 강력한 약이며 영양제입니다. 이런 신념은 우리가 뭐든지 과감함과 신중함으로 고려하라는 사목적 결론을 낳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은총의 촉진자라기보다는 은총의 심판자처럼 행동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요금 징수소가 아닙니다. 교회는 아버지의 집이며, 그곳에서 나름대로 문제를 갖고 있는 모든 이를 위한 곳입니다.
48. 만일 전체 교회가 이런 선교의 열망을 취한다면, 교회는 아무도 제외하지 않고 모든 이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먼저 가야합니까? 복음을 읽어보면 답은 분명합니다. 우리 친구들과 부유한 이웃보다는 오히려 가난하고 아픈 이들, 일상적으로 버림받고 무시당하는 사람들입니다. “너희에게 되갚을 수 없는 사람들”(루카 14:14)입니다. 이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이 메시지의 선명함을 약화시킬 수 있는 그 어떤 설명도 전혀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리고 항상 “가난한 사람은 복음의 우선적 수취인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유롭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곧 예수님께서 건설하시려 오신 하느님 나라의 표지입니다. 완곡하게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과 가난한 이들 사이에는 뗄 수 없는 유대가 있습니다.” 제발 그들을 버리지 마세요.
49. 길을 나섭시다. 그리고 모든 이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건네기 위해 나갑시다. 제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사제들과 교우들에게 자주 한 말을 이 자리를 빌어서 다시 온 교회에 말씀드립니다.
저는 갇혀있으면서 자기만의 안전에 몰두하는 건강하지 못한 그런 교회보다는 오히려 상처를 입고 멍들고 먼지 묻은 교회를 더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거리에서 당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떤 교회가 스스로 중심이 되려고 애쓰다가 결국 강박관념과 절차의 그물에 걸려버리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를 방해하고 우리의 양심을 괴롭히는 무엇인가 있다면, 그것은 그만큼 수많은 우리 형제자매가 그리스도와 우정을 나눔으로써 얻는 힘과 빛과 위로 없이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형제자매들이 자신을 지지하는 신앙 공동체 없이 살고 있다는 사실, 인생에서 목표와 의미 없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줄 뿐입니다.
저의 희망은 재가 되어버릴 두려움이 아닙니다. 거짓 안전감을 주는 구조들 안에, 우리를 무자비한 심판으로 만드는 규칙들 안에, 우리에게 편안함을 주는 습관들 안에 갇혀 있는 두려움이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주하는 사이에도 굶주린 사람들이 우리 문 앞에 서 있고, 예수님께서는 지치지 않고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르코 6,37)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데 말입니다. 그것만이 저의 두려움입니다.
돈이라는 우상, 경제권력의 독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