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06-03-08 [양희창 문화저널]에서 펌.
2. 글쓴이는 양희창 - 제천 간디학교 교장 / 대안교육연대 상임운영회 위원장
“샘, 어디 가서 우리들 행복하다고 뻥 치지 마세요. 무척 힘들거든요.” “교육과정이 대안적으로 짜여져 있고 아이들은 일반학교 아이들에 비해 훨씬 자유롭게 생활한다고 이야기하려고 하시죠? 그러시면 안 되죠, 샘은 이렇게 힘든 기숙사 생활 해 본 적 있으세요? 돼지우리 같은 곳에서 꼴 보기 싫은 아이들과 하루 종일 살아본 적 있냐구요?” “공부를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대학을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뭐 분명한 게 있어야지,”
대안교육을 시작한 지 수 년이 흐르면서 즐거움 이상으로 고민도 깊어갑니다. 이 땅에 대안교육이 왜 필요한지 되짚게 되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는 학교라는 제도에 대한 본질적인 성찰을 아니 할 수 없게 되지요. 학교가 필요한 건가? 아니면 대안교육이 무얼 할 수 있고 무얼 하려는 걸까? 첫 마음으로 돌아가서 열정과 포부를 갖고 학교 문을 열 때를 생각하면 그 동기는 비교적 단순하였던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행복한 학교를 만들어 주고 싶었지요. 더 이상 공부하는 기계가 되어 자신을 잃어버리고 욕심의 도구가 되지 않도록 보살피고 싶었고 배움이 각자에게 맞는 즐거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지요.
또 하나는 학교에서 함께 만들어보고 싶은 이상들이 있었습니다. 가령 생태적인 삶이라든가 봉사적인 삶, 또는 평화나 사랑에 대한 가치 추구 같은 것들이 학교 문화 속에, 배움 속에 녹아들기를 원했고 입시중심의 교육을 벗어나 우리가 함께 가꾸어야 할 것들을 찾아 나가는 공동체 교육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꿈꾸는 대로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졸업생들이 자주 찾아오는 편인데 심각하게 질문을 던지기도 합니다. “대안교육이 이런 식으로 가면 저처럼 사회에서 방황하는 아이들도 많이 나올 거예요. 이제는 대안교육이 학교에서만 옳은 소리를 하고 가르칠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어떤 방식으로 사회 속에서 구현될 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들이 필요한 것 같아요.”
맞는 말입니다. 외로운 섬 안에서는 나름대로 행복하고 자신감도 얻었는데 막상 세상에서 부딪히다 보니 대안적인 삶을 배우지는 못했구나 하는 아쉬움을 갖게 되는 거지요. 초기에는 그저 자유를 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던 아이들이었지만 지금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대안학교들이 이 사회 전체를 바라보고 그에 맞는 가치를 제시하고 적절한 대안을 제시하지 않으면 더 이상 대안학교라고 할 수 없는 시대가 온 겁니다. 이제 대안학교들은 각 학교마다의 색깔을 분명히 하고 새로운 전망을 내 놓을 때가 되었습니다. 좋아 보이는 프로그램을 이것저것 섞어서 하기보다는 어느 한 가지라도 분명하게 드러내어야 하고, 어떤 사람을 기르고 싶다는 교육이념이 보다 선명해져서 흔들리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사회가 불안할수록 학교에 대한 부모들의 기대는 현실적인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가시적인 것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대안학교에 아이들을 보내는 부모들조차도 인성교육 뿐 아니라 입시교육도 제대로 해 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가지시기도 하구요, 또 충분히 그럴 수밖에 없는 학력사회의 벽을 저희들도 실감하게 됩니다. 하지만 대안교육이 또 다른 수월성 교육의 일환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러한 우려를 하게 되는 것은 대안학교의 제도화에 따른 여러 가지 부작용이 일어날 것 같은 조짐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내년부터는 대안학교라는 명칭으로 정식 인가를 받은 학교들이 나올 것 같은데 그 스펙트럼이 너무나 복잡 다양하여 무엇이 과연 대안학교인지 알 수가 없게 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어쩌면 무늬만 대안학교이지 실제로는 온 종일 입시교육만 하는 학교도 생겨날 것이고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학원들이 대안학교 진영으로 대거 몰려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적당하게 인성교육을 한다고 표방하면서 다른 교육을 펼치는 것을 근원적으로 막을 길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재 어렵게 대안교육을 이끌어왔던 학교들은 분명한 철학을 가지고 내공을 든든히 하지 않으면 어떻게 판도가 변화할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제도화는 스스로 경직되는 위험성도 또한 지니고 있습니다. 교사의 입장에서 보면 인가받지 않았을 때 보다 안정 지향적이고 변화를 싫어하는 모습을 더 많이 갖게 될 수 있다는 겁니다. 학교가 유연하지 못하여 교육과정이 시대에 뒤떨어지게 되어도 좀처럼 변화하지 않으려고 하고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려 하기보다는 교사중심으로 흐르려고 할 때 더 이상 대안학교는 대안학교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 것입니다.
“정말, 이거 대안학교 맞아? 도대체 사랑과 자발성이 뭐야? 사랑의 교육이라고 해 놓고 샘들은 소리나 지르고 자발성은 무슨 얼어 죽을 놈의 자발성, 하고 싶은 것 마음대로 하라고 하고선 은근히 압력 넣고 온갖 규칙 만들어 아무것도 못하게 하면서,” “답답한 일상의 연속이고 무얼 해 보고 싶어도 이런 촌구석에서 뭘 할 수가 있어야지, 시설이라곤 딱딱한 의자에 낡은 칠판 밖에 없으니.”
대안학교들이 점점 알려지면서 사회적 인정을 받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나 그와 함께 대안학교의 허상들도 속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대안교육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교사들의 한계, 청소년들의 욕구들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열악한 교육환경, 철학을 문화로 만드는 작업의 부진함과 사회와 연결된 고리 역할에 대한 부족한 인식 등, 이제 겨우 걸음마 단계를 벗어난 철부지 대안교육이 걸어가야 할 길이 까마득하기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들은 희망을 갖습니다. 아니 희망을 갖는 것이 교육의 본질이라고 보기에 만약 희망을 갖지 못한다면 대안교육은 하지 않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는 겁니다. 절망적인 상황만큼이나 희망도 부풀어 오릅니다. 요즈음 ‘대안적인 삶을 위한 교육’이 대안교육이라고 생각하고 그 실현가능성을 꿈꾸고 살아가는 것이 버겁기도 하지만 가슴 설레는 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이 아이들이 제대로 성장하여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역이 될 수 있고 비록 가난하게 살고 힘들게 산다 할지라도 사는 게 행복하다고 느끼며 그 행복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우리도 행복할까요? 이번 학기에 간디학교 첫 졸업생이 우리 학교의 영어교사가 되어 우리와 함께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대안교육을 받은 제자들이 학교를 접수하는 되는 첫 발걸음을 디디게 된 거지요.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대안교육은 끊임없이 대안을 찾아 함께 만들어가는 교육이어야 합니다. 이거 대안교육 맞아? 반문하면서 세상과 단절되지 아니하고 깊이 호흡하며 생명의 몸짓을 계속 펼쳐가는 배움의 장이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