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도올 김용옥이 EBS의 인터넷 방송에서 요한복음을 강의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 강의를 묶은 "요한복음 강해"란 그의 책도 이미 시중에 나왔다고 한다. 이 책은 학생들에게 영어교재로서 가르치려는 목적에서 썼다고 한다. 관심이 안 갈 수 없었다. 그리하여 며칠 사이 인터넽을 대충 훑어봤다. 한 누리꾼(네티즌)은 도올의 "요한복음 강의가 몰고 올 논쟁의 폭풍우"를 걱정하고 있었다. 금방 짐작이 간다. 이를테면 <한기총>이라든가 특정 종교집단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인 듯하다. 아닌게 아니라 말들이 무성하긴 하다. 그러나 둘러 본 결과는 조금 싱거웠다. 도올의 주장이든 그에 대한 대응논리이든 별로 새로운 게 없다는 인상을 받았으니까. 게다가 우리나라의 성서학자라든가 사계의 권위자들이 이 논쟁에 참여하고 있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성서를 환하게 꿰뚫어 본 다음 이것이다 하고 제시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을 것이다. 아니 쉽지 않은 게 아니라 위험이 따른다고 봐야 한다. 꼭 신앙의 빛이나 믿음의 세계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우선 개개인에게 켜켜이 쌓인 의식의 더께가 그렇다. 그리고 어떤 주장이든 애초 투명한 논리란 기대하기 어렵다. 사회적 그물망에서 자유로운 해석이란 게 있을 런지도 의문이기 때문이다. 도올은 요즘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알려진 유명인. 그 점을 차치하고라도 그는 내게도 낯설지 않다. 80년대 중반부터 그가 쓴 책은 거의 빼놓지 않고 본 편이다. 그가 등장한 티브이 방송도 한때 꽤나 청취했다.
뭉뚱그려 말한다면 나는 도올에 우호적이다. 그런 취지에서 몇 번 사이버 공간에 글을 올렸던 적도 있다. 허나 그렇다고 비판의 지점이 없는 건 아니다. 넓게 표현하면 요즘의 그는 대중을 위한 계몽의 전령사 역할에 만족한 학자로 비친다. 물론 여기에는 긍적적인 면이 분명히 있을 게다. 하면서도 보다 깊은 학문의 본령에선 자꾸 멀어지는 듯해 아쉬움이 크다. 따라서 이처럼 뜨겁게 달아오르는 '도올 현상'을 뒤집으면 우리사회의 지적 천박성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한편 성서는 여전히 버거운 텍스트. 모른다고 보는 게 정직하다. 하여 내가 바라는 것은 원론에 머문다. 곧 생산적 논쟁을 향한 '믿음'과도 같은 성질. 이건 도올 주장의 정합성을 떠나서라도 가능한 질문이다. 비판이란, 제 눈의 '들보'를 모른 채 상대방의 '티'를 파헤치려는 칼날이 아니다. 진정한 비판은 생산적이며 긍정을 낳는다. 이럴 때 비판은 썩지 않게 하는 소금과도 같다. 소금은 오히려 상처를 치유하지 않는가. 어짜피 사람의 인식은 유한하다. 인식의 지평을 넓힌다면 반석 같은 믿음에는 해로운가. 나날이 새로와지려는 노력도 자기성찰(비판)의 다른 말이 아닐까. 과연 어느 한 집단이 텍스트 해석에 대한 권위를 독점할 수 있을까. 논쟁을 통하여 성서해석이 보다 풍요로워질 수는 없는가. 말하자면 봄날 온갖 꽃이 활짝 피듯이.
이번 도올의 발언 가운데 대부분의 논객들도 주목하지 않은 점이 있는 듯싶다. 요한복음 강의와 관련하여 도올은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인류의 위대한 3대 지혜서를 고르라면 성경과 노자의 도덕경 그리고 불교의 금강경이다."
이 경우, 성경이 하느님 말씀의 기록임에도 불구하고 지존의 위치에 올리지 않아 불만족스런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성경에는 인류의 여러 문명이 오롯이 교감하고 있다. 칼 야스퍼스란 독일 철학자는 일찍이 멋드러진 통찰을 남겼다. "기원전 5세기는 바로 우리 인류의 운명의 세기"라고. 고오타마 싯탈타, 공자, 노자가 이 무렵 태어났고 5백년 후에는 예수님이 이 땅에 나셨다. 모든 사안을 꼭 우열로 가르려는 마음의 기제 - 이것은 대개 편견을 강화하는 데 큰 몫을 한다.
결론 삼아 말한다면 나는 '도올 현상'을 이렇게 읽고 싶다.
객관적으로 접근하고 주체적으로 해석하여 보편을 획득하기.
잘 믿기 위해 제대로 알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