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준명님의 꼬리말 고맙습니다. 꼬리말 속에 담긴 차준명님의 입장에 공감합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몇 군데 좀 더 적고 싶은 부분이 남는군요. 하여 서로 생각해보자는 뜻에서-
먼저 감성적 접근부터 해보겠습니다. 우선 논쟁이라면 우리나라 사람들 좋아하지 않지요. 뭔가 까탈스럽고 야박하게 느낀다고 할까요. 아니면 ‘무슨 억하심정에서 남을 깎아내리는감’한다거나. 좋게 본다 해도 학자들의 전유물처럼 대하지 않을까 합니다. 비슷한 뜻인데도 비판이라면 한술 더 뜨겠지요. 심지어 세상 둥글게 살지 못하는 편벽된 느낌이랄까.
그런데 이럴 땐 어떨런지요? 칸트가 썼다는 순수이성비판! 신앙의 교리는 여기서 한참 멀까요? '믿쑵니다’에서 나왔을까요? 필경 신학자들의 열띤 논쟁을 거치지 않았을 런지요. 일례로 기독인이 받아들이는 삼위일체도 아마 치열한 '학문적' 다툼에서 비켜난 채 탄생하진 않았을 겁니다. 살피건대 학자들의 연구공간에만 갇혀 있는 논리, 말을 바꾸면 투명한 논리란 허상이 아닌가 합니다. 게다가 중요한 건 해석엔 권력관계가 얽혀 들기 마련이지요. 또 권력은 썩기 쉽고요. 종교계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라고 믿습니다.
저는 도올을 역동적인 학자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이 독특한 학자는 지금까지 줄곧 매를 벌지요. 교계(불교, 기독교)이건 학계이건 까발리기만 하니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꽁쯔의 논어를 얘기하면서 잔뜩 핏대를 올려대니 거기에서 어느 누가 군자의 모습을 보겠습니까. 주장이나 논리 이전에 욕 먹기 십상이지요.
그러나 이건 꼭 도올을 두둔하려는 의도에서 하는 말만은 아닙니다. 즉 우리들은 훌륭한 분의 심상을 너무 고착된 모습에서 찾는 게 아닌가 해서죠. 깨달은 이나 존경 받는 스승을 일종의 박제된 모습에서 찾는 셈이랄까... 성인이라고 사시사철 인자한 미소만 지었겠습니까. 밥 먹고 병드는 건 그렇다 쳐도 고통에 일그러지고 분노하고 운 적은 없었을까요. 고통도 달리 보면 다아 '사랑'의 문제일 수가 있습니다.
그 다음, 아래 주제는 간단치 않을 겁니다. 약간 거창한 냄새를 풍기지만 계속 써보겠습니다.
이성-신앙, 과학-종교, 앎-믿음, 학문적 도구- 신앙의 꽃 교리.
좀더 실감나게 표현한다면 교리를 유창하게 해설하는 신학교수와 '일자무식’의 두메 산골 할머니가 간직한 신앙.
위 2개 낱말들은 넘어설 수 없는 대립항을 나타낼까요? 여기에서 좀 더 나아가 서로 돕는 관계로 볼 순 없을까요(서로 돕는 관계라고 보는 기독인들도 많다고 전 봅니다만). 또한 이를 ‘상식’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신앙을 지켜나가는 사람들이 있다면? 우리는 흔히 주위에서 믿음, 오로지 믿음만을 강조하는 사례를 많이 봅니다. 그 어떤 인간의 알량한 지식보다도 믿음이 더 높다고.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굳이 높낮이를 따지라면 저는 믿음보다 더 높은 게 있다고 봅니다. 그건 삶이 아닐까 합니다.
한편 잠깐 곁가지로, 김경재 교수님의 인터뷰 기사를 보셨을 줄 압니다. 도올 주장의 상당부분을 지지했지요. 게다가 한국의 루터나 칼뱅이라는 이름까지 나왔다더군요. 그러면서 “그 사람 물건”이라고 크게 평가했다지요. 이 분의 신학 계보를 든다면 다석 유영모, 애천 함석헌, 장공 김재준, 여해 강원룡, 늘봄 문익환으로 이어지지요. 우연인지 모두 제가 존경하는 분들인데 이 분들 견해라고 물론 다 무오류는 아닐 겝니다. 보십시오 김경재 교수를 비판하는 신학자가 또 나오지 않습니까. 얼마나 보기 좋습니까.
아주 잘 알려진 사실이면서도 모르는 분들이 많은 건데요 도올의 접근방법은 해석학에서 옵니다. 근데 이 해석학(또는 서지학)에 풍부한 토양을 제공한 건 다름 아닌 성경입니다. 알다시피 서양은 2000년 동안 그리스도교를 믿어왔지요. 우린 220여년이고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왜 이 해석학을 발전시켰을까요? 이 사실만 해도 뭔가 우리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주지 않을 런지요.
김용옥의 집안이나 신앙배경을 얘기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아마 불편하실 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를 '기독교인’으로 봅니다. 다만 제도권 밖에 있는 기독교인이라고나 할까요. 그렇다면 도올은 지금 남의 동네에 가서 감 내놔라 대추 내놔라 하는 게 아니겠지요. 곧 내부비판이 될 수도 있다는 거죠.
다시 감성적 접근인데요. 몇 년전 티브이 강의에 당시 생존해 계셨던 어머님이 나오셨지요. 그때 도올은 너부죽이 뭇사람들 앞에서 큰 절을 올리더군요. 아름답고 감동적이었어요. 도올은 늘 어머님을 존경한다고 말했지요. 근데 어머님은 그야말로 전 생애를 기독교에 바쳤던 분. 그토록 사랑하는 어머님이 지니셨던 종교를 아들이 몇 자 배웠다고 함부로 대할 리가 없다고 전 굳게 믿습니다.
박학다식을 넘어 도올이 보여주는 일종의 '광대기질'이 결코 유쾌한 것만은 아닙니다.
어쨌든 도올 하면 퍼뜩 한문이 떠오르지요. 도포자락이나 폼 나는 치잉빠오(청나라 의상)가 이런 이미지를 뒷받침하겠고요. 헌데 오로지 제 관찰입니다. 이 사람 젤 잘 하는 건 일어가 아닌가 합니다. 본인 말에 따르면 영어는 한국에서 두세 번째라고 하더군요. 그럼 첫 째는? 김우창 교수나 반기문. 영어는 이른바 종합적으로 그렇다는 말일 테고 말하기는 내가 볼 때 상대적으로 그리 최고수는 아닌 듯 합니다. 그 다음은 중국어를 잘 하지요. 라틴어와 헬라어는 읽을 줄 알고.
여기에 한문이 가세하는데 동양학, 동양학 하는 바람에 한문이 상대적으로 더욱 유명해지지 않았나 합니다. 왜 동양학일까요? 여기에서도 그의 진면목이랄까 주체적 고뇌를 읽을 수 있습니다. 결국 요약하자면 제가 도올에 주목하는 이유도 바로 그러한 주체적 고뇌에 있지요.
“내가 한국을 사랑하는 이유, 해월 최시형 선생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내 천추의 한은 다석 유영모를 만나볼 수 없다는 데 있다.”
“서양이 기독교를 버린다고 생각하는가? 우리가 기독교를 갖고 서양을 넘을 수 있다고 보는가? 절대 아닐 것이다. 그럼 우린 뭘 갖고 하나. 동양학 아닌가?”
도올 주장을 둘러싼 논쟁이 '전문가'들 사이에서 좀 더 깊어지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