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택쥐페리의 「어린왕자」에서 어린왕자는 숫자를 좋아하는 어른들을 이상하게 바라봅니다. 누군가를 소개할 때 그 사람의 현재와 미래와 관련해, 좋아하는 것이, 꿈이 무엇인지를 물어보지 않고 과거와 관련된 숫자와 관련된 것을 물어보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이지요.
우리도 참으로 사람과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숫자와 관련된 것을 좋아합니다. 누군가를 소개 받을 때 묻는 말이 나이는 어떻게 돼?, 재산은 얼마나 돼?, 연봉은 얼마나 돼?, 학력은?, 어디살어? 등을 먼저 물어봅니다. 만나는 사람의 꿈이 뭔지, 희망이 뭔지, 무엇으로 인해 행복해 하는지, 아픔이 무엇인지는 궁금해 하지 않고 과거와 관련된 숫자와 그것과 관련한 평가를 중요시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를 통해 아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앎에서 안정된거 같은 기쁨을 누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앎은 숫자나 기록으로 표기되고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하고 결국 평가합니다.
반면 우리는 현재와 미래적인 믿는 것을 두려워 합니다. 사람과의 만남 속에서 우리는 믿고 만나는 것보다 앎을 통해 만납니다. 믿음 속에 자꾸 의심이 생기고 그 의심은 그 사람을 알려고 노력하고 그 앎은 대체적으로 실망으로 이어지고 결국 만남은 자신의 이해관계로만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성서에서 인간들은 알기를 원합니다. 하느님이 자신을 내보이시기 위해, 기적을 통해,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셨지만 인간은 항상 그분을 믿는 것보다 의심을 통한 앎을 원했기에 언제나 배반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이런 죄의 고리, 이런 모든 아픔을 없애버리기 위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결국 구원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성서에도 토마는 여전히 의심을 가지고 예수님을 알고자 합니다. 여전히 그리스도의 부활을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의심을 넘어선 하느님의 온전한 사랑의 은총으로서 우리를 구원 하신 것이기에 그의 의심은 보잘 것 없는 의심이 되었습니다. 배반하는 우리의 보잘 것 없는 존재와는 상관없는 하느님의 은총만으로 구원이 이뤄진 것입니다.
과학이 발달하고, 앎 지식 자체로서 정당한 가치를 부여하는 현대에서 이런 앎을 통한 기독교이해와 신앙은 언제나 의심받고, 결국 사랑의 힘을 믿지 못하고 인간과의 영적인 만남을 이루지 못한 체 자신과의 이해관계만으로 이어지고 맙니다.
우리에게 앎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앎에는 사랑이 존재해야 합니다. 미워하기 위해, 교만을 위해, 두려움 때문에 앎을 소중히 여긴다면 그것은 우상숭배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 바보 같은 믿음의 자체가 사랑을 향한 의지입니다. 믿음 자체가 사랑을 향한 의지가 될 수밖에 없음은 하느님의 은총으로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