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또래가 고등학생이던 1970년대 중반 가을은 ‘문학의 밤’이 유행처럼 번질 때였습니다. 어지간한 교회는 모두 문학의 밤을 개최하였고 그 교회에 다니는 친구들의 초청을 받아 문학의 밤에 가고는 했습니다. 문학의 밤은 70년대의 문화 유행이었고 또래의 문화교류였습니다.
우리도 문학의 밤을 하기로 했습니다. 첫 번째 '성지의 밤'을 하게 된
것입니다. 교회 규모도 작고 선배층이 두텁지 못해서 뭘 준비하고 어떻게 준비하는 것인지 하는 것이 별로 없어서 또래들이
모여 토론을 해가면서 준비했습니다. 맨땅에 헤딩한다는 말이 딱 맞는 경우였습니다. 문학의 밤 이름을 정해야 하는데 논의 끝에 학생회의 이름인 성지학생회를 사용해서 ‘성지의 밤’으로 결정했습니다.
명색이 문학의 밤이니 만치 문학적 내용의 준비도 준비이지만 어디서 진행할지 장소도 정해야 했습니다. 위의 성당에서
하든지 밑의 지하실에서 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문제는 첫 번째 하는 문학의 밤이라 친구들이
얼마나 와줄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성당에서 개최했다가 빈 자리가 많으면 마음에 상처가
될 것 같아서 밑에서 하기로 했습니다.
업무를 나누었습니다. 업무를 나누기는 했어도 학생회 회원이 몇 명
되지 않아서 내 일 네 일 구분 없이 서로 도와가면서 진행했습니다. 음악을 맡은 친구는 동네 레코드가게에
가서 약간의 돈을 주고 배경음악으로 사용할 곡들을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해왔습니다. 조명을 맡은 친구는
검은 도화지에 구멍을 뚫고 빨간색, 노란색, 초록색, 파란색 등 여러 가지 색의 셀로판 종이를 붙여서 조명을 준비했습니다. 환등기 필름 프레임에도 다양한 색깔의 셀로판 종이를 붙였습니다. 구멍도 동그란 것, 별 모양인 것 등 다양하게 만들었습니다.
초대장을 만들고 순서지도 만들었습니다. 교회에서 주보 만들 때 사용하는
속칭 ‘가리방’이라는 이름의 도구를 사용해서 프린트하는 것이었는데 학생회 회원들이 둘러앉아서 철필로 긁은 후 롤러에 잉크를 묻혀 밀어서 프린트했습니다.
처음 해보는 문학의 밤이고 경험 있는 선배들의 전수가 있는 것도 아니기에 준비가 충분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연기를 하면 어떨까, 올해는 하지 말고 내년에 하면 어떨까
하는 논의도 했지만 그냥 진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참 용감한 학생들이었습니다.
드디어 제1회 성지의 밤을 하는 날. 성당에 있는 긴의자를 지하실로 운반했습니다. 사실 운반이라기 보다는 우겨 넣은 수준이었습니다. 무대가 되는 앞쪽에
커튼을 치고 그 커튼 뒤 한 켠에 음악을 맡은 친구가 카세트 테이프가 든 커다란 카세트를 앞에 놓고 음악을 공급했습니다. 뒤쪽에서는 조명을 맡은 친구가 환등기와 조명기를 조작했습니다. 당일에
교회 어른 몇 분도 오셨을텐데 교회 다닌지 얼마 안되는 저로서는 어느 분이 오셨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 첫 번째 성지의 밤에서 저는 조용분(프리스카)라는 친구와 함께 남녀 공동 사회를 맡았습니다. 그리고 그 날 저녁은 제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제 삶을 구분 짓는 기준이 여럿 있겠습니다만 가장 중요한 구분은 제1회 성지의 밤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것입니다. 성지의 밤에서 사회를
맡기 전까지는 전혀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서 얘기를 해본 적이 없습니다. 학급에서 반장이지만
그 학급의 모두는 아는 얼굴입니다. 그저 열 명 남짓 모이는 학생회이지만 이 또한 모두 아는 얼굴입니다. 그런데 성지의 밤 사회를 맡으면서 그날 처음 만나는 수 십명 앞에서 말을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대단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날의 경험이 바탕이 되어 그 후로는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나중에는 여러 사람 앞에서 레크리에이션을 진행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정신없이 준비한 제1회 성지의 밤이 정신 없이 끝난 1년 후 제2회 성지의 밤을 준비할 때에는 해본 경험이 있어서 조금
수월했습니다. 내방객 동원에 자신이 붙은 우리는 제2회 성지의
밤을 성당에서 진행하였습니다. 성당에서 준비한 두 번째 성지의 밤에서도 준비한 자리가 손님으로 모두 차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제2회 성지의 밤 이후로는 계속해서 성당에서 개최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성지의 밤을 개최하던 때가 10월 이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 정말이지 눈부시게 아름다운
시절이었습니다. 비록 지금 우리는 여러 곳에 흩어져 있지만 이즈음에는 '그 때의 그 친구들도 우리들의 그 멋진 시절을 기억하고 있겠지?'하고 생각해보고는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