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한강이 “문학작품을 읽고 쓰는 일은 필연적으로 생명을 파괴하는 모든 행위에 반대하는 일”이라고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을 밝혔다.
한강은 10일(현지시간) 스톡홀름 시청 ‘블루홀’에서 열린 2024 노벨상 시상식 연회에서 “가장 어두운 밤에도 언어는 우리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묻고, 언어는 이 행성에 사는 사람의 관점에서 상상하기를 고집하며, 언어는 우리를 서로 연결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아래는 한강의 수상 연설 전문이다.
“폐하, 전하, 그리고 신사 숙녀 여러분”
저는 여덟 살 때의 날을 기억합니다. 오후 산수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 갑자기 하늘이 터져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비가 너무 심해서 20여 명의 아이가 건물 처마 밑에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길 건너편에도 비슷한 건물이 었고, 그 처마 밑으로 또 다른 작은 군중이 보였습니다.
마치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습니다.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며, 축축함이 팔과 종아리를 적시자 갑자기 이해가 되었습니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저와 함께 서 있는 모든 사람, 그리고 저 건너편에 있는 모든 사람이 제각각 "나"로서 살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저와 마찬가지로 이 비를 보고 있었습니다. 제 얼굴에 묻은 축축함을 그들도 느꼈습니다. 경이로움의 순간이었고, 수많은 1인칭 관점을 경험한 것입니다.
읽고 쓰는 데 보낸 시간을 돌이켜보면, 나는 이 경이로운 순간을 거듭거듭 되살렸습니다. 언어의 실을 따라 다른 마음의 깊은 곳으로, 또 다른 내면과의 만남으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시급한 질문이 있고, 그 실에 맡기고, 다른 자아에 보냅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알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태어난 이유. 고통과 사랑이 존재하는 이유. 이러한 질문은 수천 년 동안 문학에서 제기되어 왔으며 오늘날에도 계속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잠시 머무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무슨 일이 있어도 인간으로 남는 것이 얼마나 어려울까요? 가장 어두운 밤에는 우리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묻는 언어가 있습니다. 이 행성에 사는 사람들과 생명체의 1인칭 관점으로 상상하는 것을 고집합니다.
우리를 서로 연결하는 언어입니다. 이 언어를 다루는 문학은 필연적으로 일종의 체온을 유지합니다. 마찬가지로 필연적으로 문학을 읽고 쓰는 작업은 생명을 파괴하는 모든 행위에 반대합니다. 저는 문학을 위한 이 상의 의미를 여러분과 함께 여기 서서 공유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옮긴이 주:
1. 스톡홀름 현지 중계방송을 보면, 한강은 위 한글 원문을 바탕으로 하여 영어로 연설했다. 그런가 하면 이색적 장면이 펼쳐지기도 했다. 사회를 본 스웨덴 대학생은 한국의 딸 한강을 소개하면서 또렷또렷한 한국어로 "수상자 한강을 소개하여 영광"이라 말하면서 발언대 앞으로 이끌었다.
2. 아래 글은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이 알려진 며칠 후. 그러니까 지난 10월 12일 쯤 울산의대 주철현 교수가 인터넽에 올렸던 글의 일부다. 지금 읽어봐도 여전히 큰 울림을 주는 명문이다. 하지만 전문이 너무 길고 현학적인 대목이 적지 않아 "문명의 힘, 문화의 힘"이란 소제목 중 일부를 발췌해 싣는다.
우리에겐 노벨 문학상이 훨씬 더 가치가 있다.
과학기술은 백년의 상품, 문화는 천년의 상품
노벨 문학상에는 언어 장벽이 존재한다. 인도-유럽어족 이외의 언어로 쓰인 작품은 번역 필터링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우리 문학을 세계에 알리기 위한 노력은 있었지만 별 성과는 없었다. 작품을 먼저 선정하고 번역을 의뢰하는 순서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문화 상품에는 이런 탑다운 접근이 통하지 않는다. 우리와 세계의 관점에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에겐 평범한 한글이, 외국인에게는 아름다운 조형으로 보인다. 이를 반영한 발상의 전환으로, 외국에서 먼저 작품을 선택하고 나서 번역을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그 초기 성과가 2015년 출판된 한강의 ‘채식주의자’ 영문판이다. 다양한 작품에서 경쟁력이 있는 것의 자연 선택을 유도한 것은, 다양성과 적자생존으로 진행되는 생물 진화와 유사하다. 이는 관료주의가 문화적 다양성을 억누르고 방향을 통제하면 안되는 이유를 잘 보여준다. 또한 올바른 선택이 가능할 정도로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의 저변이 넓어졌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세계화 시대에 공산품을 더 싸게, 더 효율적으로 생산하는 경쟁은 개미지옥이다. 기술 수준이 상향 평준화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화는 상품에 이야기를 연결해 부가 가치를 추가한다. 명품 지갑에 넣는다고 돈이 불어나지 않는다. 명품 차를 탄다고 하늘을 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일반 공산품과 동일한 기능의 명품을 위해 사람들은 줄을 선다. 물질에 이유를 부여하는 문화의 힘 때문이다. 문명이 상품을 만든다면, 문화는 선택을 부채질한다. 빵이 없으면 살 수 없지만, 빵만으로도 살 수도 없는 존재가 사람이다. 우리가 빵만 보고 달려오는 동안 세계는 우리 문화를 쳐다보고 있었다. 옷을 적시는 가랑비처럼 문화는 사람의 마음에 스며든다. 공산품은 십년의 상품이고, 과학 기술이 백년의 상품이라면, 문화는 천년의 상품이다.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문화는 배부른 소리로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문화는 책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것도, 음악을 듣고 가사를 음미하는 것도, 친구와 어울리고 수다를 떠는 것도 문화 생활이다. 소통과 공감으로 어울리는 삶 자체가 문화다. 그런데 소통의 가장 큰 함정은 ’소통했다는 착각‘이다. 소통은 강제가 아니라 이해다. 한강은 우리가 우리의 상처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묻는다. 예전 산업 고도 성장기에 우리의 유일한 자원은 사람이라고 강조하였다. 이때 사람은 시키는 일을 열심히 하는 자본을 의미했다. 이제 문화 강국의 인재는 어울려 사는 재미를 아는 사람이다. 우리가 이뤄낸 문명 발전을 보고 세계는 한강의 기적이라 말하였다. 이제 우리 문화에 대해서도 한강의 기적을 말할 그날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