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올릴까 말까 여러 번 망설이다가 조금쯤은 에라 모르겠다 하는 마음으로 올립니다.
적어도 글의 행간에서 목에 힘 주려거나 폼 잡으려는 의도는 없기에 그렇지요.
근데 망설임은 어디서 올까요? 넓게 보면 일종의 반성이죠. 불현듯 돌아보면 너무 말이 많았구나 하는 자괴감 같은 것이랄까. 흐흐 헌데 세속의 때에 찌들은 사람인지라 재미는 있어요^^. 지난 주일 저녁도 그랬거든요.
임희승, 이장근, 정호철님과 함께 나눈 엄청 수준 높은 얘기가 그런 예입니다. 망가(만화) 얘기.
일본 만화가 미야자끼의 작품세계, <센 이치로의 행방불명>이라든가 <공각기동대>. 그런가 하면 '쌍팔년도' 울 나라 청소년들을 불면의 밤으로 내몰았던 산호의 <라이파이>, 추동성의 <짱구박사> 짜자잔~. 그리고 건너 뛰어 지금의 허영만, 이현세, 방학기의 그림들이 그런 축에 들죠. 아무튼 신자회장님이 이 날도 결론을 잘 내주시더군요. "아니 이거 음악이면 음악, 거기에다가 이젠 만화까지? 으응, 만화도 배운 사람들의 필독서군."
회장님, 날라리니까 그럴 거예요.
한편 그럼 이런 현상을 한마디로 풀이한다면?
모이자. 근데 모여서 어흠~하면서 점잔만 빼지 말자.
신나게 '족발' 경기하자. 곁엔 경쾌한 기타가 있다. "우린 모두 사랑 받기에 태어난 사람"이다.
좋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린 대화가 고프다!'
이 날 목련나무 아랫마당이 점점 깜깜해지는 시각, 마침 집으로 가려는지 조상철군이 보였다.
대충 아래와 같이 몇 마디를 주고 받았다.
"오늘 같은 날도 많은 분들의 숨은 손길을 느낀다. 그 중 청년회의 봉사도 아름답다. 준비과정이나 뒷처리가 장난이 아닐 테니까. 쥐에프에스의 ' 1일 비누팔이 소녀들'도 그렇고." 그리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헌데 이러한 봉사와 자선의 이미지 너머 거기서 좀 더 나간다고 할까 난 '무릎이 깨지는' 젊은이들이 참 좋아. 주체적으로 사고하고 때론 분노하면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패기 같은 것 말야." 상철이가 이내 받는다. 순간 휘리릭~소리가 들린다. 다름 아닌 상철이의 머리가 회전하는 소리.
"그런데 트렌드라는 게 있지 않을까요. 예전과는 다른 거죠." 으흠~ 나도 질 새라 머리를 돌려봤다. 내가 틀렸는지도 모르겠다. 헌데 머릿속엔 월드컵과 붉은 악마들이 순간 떠올랐다. 그리곤 얼마 전 홈피와 <비둘기>지에 내가 끄적거렸던 글들이 생각났다. 이때 상철은 혹시 그 잡문들과 화자를 연결짓지 않았을까...
"추세를 얘기하단 말이지. 좋아. 인정해야겠지. 말인즉슨 그런 추세를 외면한다거나 높은 자리에서 훈계하겠다는 건 아니고. 바로 그 추세를 생각해 보자는 거지." 그 다음 나는 서태지와 IMF 사태의 예를 들었다. 상철, 이 친구 추가발언에 인색했다. 선문답하려나. 계속해 본다.
만약 내 짐작이 그다지 틀리지 않는다면 좋은 주제가 아니었던가 한다. 그리고 아래의 몇 가지 단상은 오래 전부터 생각했던 그러한 주제의 연장선 위에 걸려 있다. 초점을 잡기가 힘들지만 어디까지나 조상철군이 가리켰음직한 추세와 '젊은이다운' 주체적 사유란 걸 생각해 본다는 뜻에서. 그리고 방만한 일반론에서라기보단 되도록 동대문교회로 한정하여 짧고 분명하게.
실제로도 그렇고 마음 속으로 나이와 세대에 과다한 의미를 두는 것만 같다. 동시대인들만이 공유한 이른바 문화적 코드가 있으리라. 그러나 정말 우리는 세대에 따라 그렇게도 다른 것일까? 쉽게 말해 젊은이들은 그토록 싱싱하고 반면에 나이 들면 꽉 막혀버리는가. 재미 있게도 나는 차이보단 오히려 닮은꼴이 더 보인다. 차이라 해도 곰곰히 보면 변별력이 그리 뛰어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막연한 심리적 경계일 뿐 확실하게 공유하였을 문화적 정체성이란 게 실상 모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솔직한 이유라면 귀찮거나 재미가 없거나 싫거나 하는 취향의 문제일 뿐이다. 정말이다. 나이는 숫자일 뿐이다.
위와 거의 비슷한 연유에서다. 사회현상을 해석할 때도 이러한 편의주의적 분리와 배제가 작동한다. 마치 신문지면을 가르듯 정치, 경제, 사회, 문화는 칼 베듯이 나눠진 세계인 것만 같다. 그 네 가지는 그냥 그리하자고 나눈 기호에 불과하다. 따라서 구세대는 사회를 고민하면서 거리로 뛰쳐나갔었지만 저희 '신인류'는 어디까지나 문화적 감성이랍니다 라고 외치는 건 어쩌면 허상이다. 세상사 돌아가는 게 그렇듯 사람도 전일성을 향한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전일성엔 영육의 분리도 있을 리 없다.
그러한 전일성을 훼방놓는 건 무엇일까. 열등감, 아집, 성적 환상, 환경, 교육...뭐 세대적 감각도 끼일 법하다. 허나 요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게 있지 않을까. 그건 대중매체의 영향력이다. 그들은 후딱하면 세대론을 흘리며 예의 '전일성'의 눈을 가린다. 간혹 진정성을 보이는 경우에도 그 뒤를 봐야 한다. 왜냐하면 예외 없이 상업주의가 또아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되고 어떤 삶이 참다운가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다. 남의 나라 걸 베껴먹는 것도 그렇지만 결코 고민하지 않는다. 거꾸로 지극히 세련돼 보이기마저 한다. 갖다 붙이기도 잘한다. 칙칙한 패거리 외피를 벗고 우아한 솔로가 되라고. 그 우아함은 결국 덫이 되기 십상이다. 제 각각 다른 섬으로서의 소비형 인간. 과연 우리 인류와 지구가 언제까지 이 행복한 꿈을 유지시켜 줄까.
이 쯤에서 다른 나라를 떠올리면 어떨까. 시대는 포스트모던이며 잘못하면 이 물결에서 뒤처지니까. 예컨대 미국이나 일본 또는 유럽. 요점만 말하고 싶다. 이 말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요즘 그 나라들에서 얼마나 현재의 모습에 대해 치열하게 반성하는가를. 미국을 세운 ' 건국의 아버지들'의 이상도 그렇게 참을 수 없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우리나라 신문은 그런 추세는 잘 싣지도 않는다. 반면에 단골 메뉴는 거의 바뀌지 않는다. 성장 제일주의가 그렇고 세계 11대 경제대국,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한 나라라는 구호만큼 공허한 게 어디 있는가. 전일적으로 공부하기란 이런 어지러운 현상의 배후를 꿰뚫어 보는 힘을 뜻한다. 그런 힘을 비로소 지식이라 일컫지 않을까.
나는 성현들이나 예수님을 말하지 않겠다. 공부가 짧기 때문이다. 젊은이들 보고 무거운 얘기를 할 입장도 아니다. 허나 젊은이라면 무척 좋아하고 지금도 싱그러운 대학생들과도 자주 만나는 편이다. 위의 과제가 쉬울까? 어렵다. 그러나 이렇게 보면 어려운 것만도 아니다. 즉 열린 자세가 아름답다. 열어라 소통하라 솔직하게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 그것이 전일적 공부의 첫 문이자 '무릎이 깨지는' 아름다움이다. 열린 자세는 결코 이벤트에 머물지 않는다. 지향하는 곳은 브리핑 차트의 실적이 아니라 과정이다. 이벤트는 과정이 아니라 끊어진 하나의 행사로 그칠 뿐 곳간에 쌓이는 게 없다. 과정을 소중히 다루면 쌓이는 것이 있다. 우린 그걸 담론이라고 부른다.
오해하시지 말라. 조상철군이나 다른 젊은이들을 이렇다 저렇다 단정지을 생각은 전혀이며 근거 또한 그 어디에도 없다. 구체적으로 얘기하자. 옛 선배님들처럼 길거리로 나서라는 말은 물론 아니다. 꼭 성경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책읽기 모임만 해도 얼마나 좋은가. 이게 발전하면 포럼으로 이름 붙여도 된다. 가끔 청년회 회의에 '나이 든' 교우들의 특강은 어떨까. 마찬가지로 바오루 모임에 젊은이들의 특강 또한 신선하지 아니한가. 문화는 다면적이고 문제의식은 관심에서 싹튼다. 지역사회, 이를테면 용두동과 성공회의 연결지점도 훌륭한 고민거리 아닌가. 이웃나라 성공회와의 교류도 생각해봄직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