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만 개의 공화국을 위하여
장정일 (소설가) | webmaster@sisain.co.kr
(출처-2014년 8월2일 <시사인> 359호 68, 69면)
인도에는 곳곳에 ‘간디 동상’이 서 있다. 지폐에 간디의 초상이 인쇄돼 있기도 하다. 하지만 <간디의 ‘위험한’ 평화헌법>을 쓴 C. 더글러스 러미스는 요란한 인도의 간디 숭배가 실은 간디를 부인하기 위한 속임수라고 말한다.
한 국가의 창설이나 개선은 위대한 한 사람의 지도 밑에서가 아니라면 불가능하다. 이것이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밑바탕에 깔려 있는 강력한 전제다. 그런 뜻에서 20세기는 가히 마키아벨리의 세기였다. 터키의 무스타파 케말,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 베트남의 호찌민, 쿠바의 카스트로 등은 항시 그 나라의 역사와 함께 호명된다. 그들은 새로운 나라를 건설한 뒤, 하나같이 그 나라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그 대열에 들지 못한 사람으로는 고작 중국의 쑨원과 인도의 모한다스 간디를 꼽을 수 있다.
인도 도시 곳곳에는 간디의 동상이 서 있다. 또 가장 작은 10루피(약 171원)에서부터 가장 큰 1000루피(약 1만7100원)에 이르는 여섯 종류의 인도 지폐에는 한결같이 그의 초상이 인쇄되어 있다. 이런 현상만 본다면 인도의 지배자였던 대영제국을 축출할 때 간디가 보여주었던 탁월한 지도력과 숭고한 정신은 인도인의 가슴이나 국가 통치의 원리로 생생히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C. 더글러스 러미스의 <간디의 ‘위험한’ 평화헌법>(녹색평론사, 2014)은, 겉으로는 요란한 인도인의 간디 숭배가 실은 그를 효과적으로 부인하기 위한 속임수라고 말한다. 인도인들은 간디의 가르침이 그들을 불편하게 하기 때문에 그 내용으로부터 도망가기 위한 수단으로 간디를 ‘성인’으로 추어올리고, 그 사상을 평범한 사람들과는 관계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이지영 그림
간디가 세계 최강의 대영제국을 물리칠 때 사용한 유일한 무기는 스와라지(자치)와 비협력·비폭력·불복종이었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스와라지를 영국의 인도 지배에 대한 인도인의 자치 청원 정도로 알고 있었다. 말하자면 간디의 스와라지 운동을 일제강점기에 있었던 우리나라 자치주의자들의 그것과 동일시한 것이다. 그러나 간디의 스와라지는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얻어내기 위해 거쳐야 하는 단계적 전술도 아니었고, 식민 본국으로부터 자치령을 획득하는 선에서 식민 현실을 수긍하자는 논리는 더더욱 아니었다. 간디의 스와라지는 ‘인도에는 70만 개의 마을이 있고, 70만 개의 공화국이 있다’라는 그의 주장 그대로,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70만 개의 공화국이 고스란히 인도로 전환되는 것이었다.
힌두교도는 자주 ‘아힘사 파라모 다르마(비폭력이 가장 높은 법)’라는 경구를 외우지만, 힌두교는 비폭력에 대한 뚜렷한 확신을 갖고 있지 않다. 힌두교가 워낙 다양한 판본의 수많은 경전과 여러 신을 포함하기 때문에 그 가운데는 호전적인 신도 어엿이 존재한다. 반면 간디가 속했던 자이나교는 동물 희생 제의에 반기를 들면서 초기·정통 힌두교에서 분리된 종파다. 간디의 비협력·비폭력·불복종 사상은 생명을 살상해서는 안 된다는 자이나교의 핵심 교리에 레프 톨스토이와 헨리 데이비드 소로로부터 받은 영향이 더해지고, 영국 헌법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깊어진 것이다. 변호사이기도 했던 그는 영국 헌법은 영국인이 싸워서 쟁취한 권리와 자유가 제도화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국민의 청원 활동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개선되지 않는다면 “거기에 굴종적으로 따르는 것은 영국 헌법 정신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간디의 ‘위험한’ 평화헌법>
C. 더글러스 러미스 지음 김종철 옮김
녹색평론사 펴냄
스와라지가 영국으로부터 인도의 자치권을 빼앗아오는 것이 아니라 중앙집중화된 모든 국가권력으로부터의 자치였듯이, 간디의 비폭력 투쟁 역시 대영제국에 대응하기 위해 차용된 시한부 전술이 아니었다. 그의 비폭력 신념은 영국으로부터 독립된 뒤에도 인도는 결코 군대를 보유해서는 안 된다고 할 정도로 철저한 것이었다. 국가는 본질적으로 폭력적인 조직이며 비폭력적인 국가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간디는 그 해결책으로 “‘국가’가 아닌, ‘국가’와는 근원적으로 다른 정치 형태”를 구축하고자 했다. 그것이 개개의 마을이 하나씩의 국가인 스와라지다.
간디가 독립 선포식에 참석하지 않았던 이유
국가의 본질은 폭력이라고 간파했던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간디는 서양 정치사상에 정통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생애 중에 일어났던 러시아혁명과 레닌에 대해 몰랐을 리 없다. 레닌과 간디는 정부를 밑에서부터 전복시키기 위해 비협력에 의지했던 공통점이 있다. 폭력혁명이라고 알려진 러시아혁명도 알고 보면 노동자의 파업과 군인의 탈영과 같은 비협력에서 혁명이 시작됐다. 두 사람의 차이점은 레닌이 대중의 비협력으로 대항 조직을 형성한 뒤 군사 행동을 통해 새로운 국가권력을 창출했다면, 비폭력으로 일관했던 간디는 국가권력을 해체한 자리에 국가를 대신한 새로운 사회를 제안한 점이다.
대한민국보다 2년 늦은 1947년 8월15일, 인도는 약 190년에 이르는 영국의 식민 지배를 청산했다. 하지만 국민회의를 이끌면서 인도 독립의 구심점 구실을 했던 간디는 독립 선포식장에도 제헌의회에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는 독립과 함께 국민회의 지도자들이 각자의 마을로 돌아가 스와라지를 완성하기를 희망했고, 군대 창설을 금지하는 헌법안을 만들었다. 이때부터 대다수 인도 지도자들과 군대가 있는 ‘보통 국가’를 바라는 국민들은 간디가 어서 죽거나 조용히 사라지기를 바랐다. 그의 암살은 예고되어 있었으나 아무도 막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에 ‘묵인암살’이라는 어색한 용어마저 탄생했다.
자치나 자립으로 번역되는 힌디어(語) 스와라지는 정치적 독립만 아니라 경제적 자립, 문화적 자립, 사상적·정신적 자립을 함께 아우른다. 식민지를 국제관계가 아닌 국내 문제로 보았던 간디는 마을 사람들이 중앙권력으로부터 스와라지를 획득하지 않는 한, 어떤 인도인도 독립했다고 말할 수 없다고 여겼다. 오늘날의 시점에서는 스와라지를 바탕으로 군대가 없는 나라를 구상했던 간디의 헌법안이 비현실적이고 실현 불가능하게 보이지만, 인도가 대영제국으로부터 막 독립할 당시에는 국민회의가 선택한 헌법안이 오히려 인도의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C. 더글러스 러미스는 미국에서 정치사상을 전공하고 일본의 대학에서 오랫동안 교편을 잡았다. 그러면서 일본 평화헌법을 연구했던 그는 2009년에 출간된 이 책에서 전쟁을 금지한 일본 헌법 제9조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예견 아닌 예견을 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일본은 제9조가 아니더라도 이미 국가가 사회를 세부까지 감시·관리하는 경찰제도·감금제도·사형제도를 갖추고 있는 보통 국가다. 이런 보통 국가가 헌법 속에 전쟁 금지 조항을 채택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최근에 일본은 해석 개헌으로 이 모순을 해소했다. 마을이 축소되고 도시화가 이루어진 현대 사회에서는 시민사회의 배양과 활발한 시민운동이 국가권력에 맞서는 새로운 스와라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