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과 생존경쟁의 법칙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출처-2014년 6월 28일 <경향신문>)
“자유, 불평등, 최적자생존과 부자유, 평등, 부적자생존. 전자가 사회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최고의 구성원들만을 남기게 될 것이다. 반면 후자는 사회를 하향평준화시키고 최악의 구성원들만을 남기게 될 것이다.”
20세기 초 윌리엄 그레이엄 섬너라는 미국의 사회학자가 1910년에 했던 말이다. 섬너는 또한 “이런 생존투쟁의 결과로 인해 발생하는 불평등한 결과에 대해 개탄할 필요는 없다”고 못을 박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약자가 도태되고 강자가 살아남는 것은 “자격과 능력에 맞춰 부를 소유하고 즐길 수 있는 자유”의 혜택이고 이런 과정이 바로 “전적으로 중립적인 자연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섬너는 영국의 사회진화론자인 허버트 스펜서의 이론을 수용해서 경쟁을 생존의 필수조건으로 받아들였다. 섬너와 같은 생각은 대학의 울타리 안에 한정되지 않았다. 미국 경제를 성장시켰다고 일컬어지는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나 대부호 존 록펠러도 “미국의 아름다움이라는 장미는 처음에 자신을 감싸고 있던 봉오리들을 성장과정에서 희생함으로써 보는 이들의 찬사를 받는 것”이라면서 섬너와 같은 최적자생존의 경쟁논리를 처세술의 원리로 삼았다. 미국의 자본가들은 단순히 부만 축적한 것이 아니라, 사회진화론에 기초해서 삶의 규범을 새롭게 제시하는 역할을 했다. 이들이 내세운 규범이 바로 오늘날 ‘벤처정신’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도전의식’이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도전’일까. 바로 최적자를 가리는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도전’이다. 이런 사고방식에 따르면 생존경쟁이 일어나는 영역은 전방위적이다. 과거에 시장을 매개로 전문성의 협업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사회진보의 동력으로 받아들여졌다면, 섬너의 사회진화론은 경쟁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제거하는 것이 사회를 진화시킬 수 있는 길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경쟁을 통한 ‘자연 선택의 법칙’이 제대로 작동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강박관념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이미 100년이나 지난 주장이지만, 비슷한 논리를 한국에서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논란을 거듭했던 문창극 전 총리 지명자의 발언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사퇴의 변에서도 그는 ‘신앙에 따라 말을 한 것이 무슨 잘못인가’라고 반문하면서 끝내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일제를 옹호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신앙고백을 했을 뿐이기 때문에 억울하다는 것이다. 자진사퇴하긴 했지만 문 전 지명자는 여전히 그 이유를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이런 문 전 지명자의 생각을 지지하는 역사학자까지 있는 마당이니 이 문제를 단순하게 개인의 역사의식 결여로 결론 내리기도 어려운 것 같다.
과연 문 전 지명자의 발언에 문제가 없었는가. 전체 강연 동영상을 보면 문 전 지명자는 수차례 윤치호의 글을 인용하고 있다. 윤치호가 누구인가. 친일파라는 대답이 가장 쉽다. 친일파인 윤치호를 인용했기에 그 발언이 친일 옹호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윤치호를 친일로 이끈 세계관이다. 윤치호야말로 당시 섬너와 같은 사회학자가 활동하던 미국에서 사회진화론을 접했던 구한말 지식인 중 한 명이었다. 그에게 역사는 최적자생존을 위한 냉혹한 우승열패의 경쟁이었다. 문 전 지명자가 인용한, 그 조선인의 게으름을 통탄했던 윤치호의 진술이야말로 사회를 철저하게 경쟁의 논리로 보는 관점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일제강점의 역사는 말 그대로 생존경쟁에서 패배한 약자에게 주어진 시련으로 비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문 전 지명자가 강연에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명명한 것과 윤치호가 생각한 생존경쟁의 법칙은 그렇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문 전 지명자의 생각이 맞다면 약자가 경쟁에서 도태되어서 시련을 겪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연연할 필요가 없어진다. 오히려 시련은 누구의 책임 문제가 아니라 모두가 겪어야 하는 자연스러운 문제가 되어버린다. 가난한 이들은 게으르고 나태해서 시련을 겪는 것이지 정부가 잘못해서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이런 논리에 따르면 계급격차는 경쟁사회에서 필연적이고 불평등은 최적자생존의 결과이기 때문에 문제 될 것이 없다. 과연 이런 주장을 ‘신앙’의 문제라고 보는 것이 합당할까. 오히려 경쟁사회를 부추기는 세속의 논리가 종교의 논리로 둔갑한 것은 아닌지 되새겨봐야 할 것이다.
유령의 프레임
최민영 미디어기획팀
(출처- 같은 날짜 같은 신문)
강력한 프레임은 마치 물처럼 세상 곳곳에 스며든다. 예로 사회사상가 제러미 리프킨은 “에너지 체제는 문명의 성격을 결정한다”고 저서 <3차 산업혁명>에서 주장한 바 있다. 석탄·석유·천연가스 같은 화석연료는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이용하려면 상당한 군사적 투자와 끊임없는 지정학적 관리”가 필요해서 “중앙집권형 하향식 지휘통제와 대량의 자본집중”이 요구된다. 이 같은 중앙집권형 에너지 인프라는 “경제의 다른 부문 전체에 기본 조건을 설정해주고, 나아가 부문 전체에 걸쳐 유사한 비즈니스 모델이 자리잡도록” 만든다. 석유문화는 현대 금융, 자동차, 건축, 통신에 모두 유사한 중앙집권형 프레임을 이식했다. 그래야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한국 정치에서 여전히 ‘일본 식민주의’가 프레임으로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계기는 문창극 총리 지명자가 자진사퇴하기 전까지 공개된 ‘신의 뜻’ 같은 발언들과 그에 대한 정치권의 반응에서였다. 일본의 식민통치가 남긴 ‘흔적’은 흔적이 아니었다. 1953년 제3차 한일회담 당시 일본 측 수석대표 구보다 간이치로의 “일본의 조선통치는 조선인에게 은혜를 베푼 점이 있다”는 망언이나 1979년 사쿠라다 다케시 게이단렌 회장의 “한국의 눈부신 경제발전은 과거 일본 식민지 시대의 훌륭한 교육 덕분이다. 36년간의 일본 통치의 공적은 한국에 근대적인 교육제도, 행정조직, 군사제도를 심어준 데 있다”는 발언과 맥락을 같이하는 건 아닌가. 현기증이 났다.
그 ‘36년’의 일본 통치 과정에서 한국인의 의식 프레임에 ‘황국신민주의’가 영향을 끼친 것 아닐까. 일본 식민통치 당시에 유효했던 통치방식을 이후의 정치가 답습했기 때문이다. 지도자 천황에 대한 절대복종을 국민들이 내면화하도록 교육한 일본의 군인칙유(1882년)와 교육칙어(1890년)는 박정희 군사정권 시대에 국민교육헌장(1968년)에 영향을 미쳤다. 만주국에서 일본이 실험한 중공업 중심의 전투적인 계획경제도 박정희 정권에서 재현됐다. 거대한 생명체인 국가의 이익을 위해 각 개인의 소중한 삶이 한낱 부품으로 동원되는 국가 중심의 문화도 따지고 보면 일본 식민지배 당시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여성을 ‘성 자원’으로 파악하고 ‘수집, 관리’한 것도 국가주의적 사고였는데, 우리는 축구 경기 해설에서도 여전히 사람을 부품으로 여기는 것처럼 ‘투입’ ‘보강’ ‘교체’ 같은 표현을 쓴다. 정치제도는 민주화를 이뤘지만, 우리의 깊은 무의식에는 여전히 ‘그 무엇’이 남아 있다.
과거 남과 북이 지도자를 우상화하는 독재정권 체제를 쌍둥이처럼 유지했던 것도 어쩌면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일본의 정치 체제에서 그 프레임을 가져온 것은 아닐까. ‘최고존엄’을 비판하는 것은 순종적 국민들의 ‘미덕’이 아니라며 거부반응을 보이는 것까지 닮았으니 말이다. 한국 사회가 “군대 갔다와야 사람 된다”는 헛된 만트라를 중얼거리는 것처럼 일본의 우익은 ‘사무라이 정신’을 통해서 일본이 거듭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오늘날 자위대에만이라도 참된 일본, 참된 일본인, 참된 무사의 정신이 남아 있기를 꿈꾸었다”며 할복한 일본의 작가 미시마 유키오의 말처럼.
과거는 어떻게든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다. 하지만 비판적인 자기분석 없이는 한 사회는 과거의 프레임 안에 갇힐 수밖에 없다. 달력의 숫자가 매일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순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새로운 ‘내일’을 사는 것은 나 개인, 그리고 한 사회의 의지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 구시대의 식민지 유물을 내 안에서 떨쳐내지 못한다면, 결국 어떤 진정한 변화도 어려운 것은 아닐까. 거대한 숙제를 마주한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