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원생활 2007년 8월 3일자에서 펌.
2. 글쓴이는 이승환/임승수 기자(사진)
친환경 신부 정홍규
정홍규 신부는 성당에서 친환경 농산물장터도 열고, 생명 살리기 장승도 깎고, 종교 갈등 해소를 위한 108배도 한다. 이런 그를 두고 종교 근본주의자들은 삐딱이, 괴짜, 반골 등 정말 ‘삐딱한’ 말들을 다 갖다 붙이기도 했다. 진리를 죽이는 것은 편견과 고정관념과 낡은 질서다. 그는 시대의 공기 속에 살고 있다. 여름이 무르익고 있었다. 아지랑이가 흐물흐물 피어오르는 운동장 가를 에두른 버즘나무 잎사귀에 몇 방울 소나기가 듣다 지나가고, 산자락께서 피어오르는 뭉게구름 뒤로 파란 하늘이 드러나며 따가운 햇살이 내리쬔다.
오후의 나른함을 이기지 못한 듯 수련睡蓮이 봉우리를 닫는 연못가 호두나무 그늘 아래서는 발가벗은 꼬마들의 황토 염색이 한창이다. 서넛에 하나씩 황토물이 담긴 대야를 끼고 앉아 손바닥만 한 메리야스를 조물조물 비비다가 고운 황토 빛깔에 장난기가 동한 듯 서로의 몸에도 발라주는 아이들. 녹음에 묻힌 황토색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간들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몰려다닌다. 역시 아이들은 여름을 즐길 줄 안다. 흐르는 오후, 시시때때 변신하는 뭉게구름이 양도 됐다가 공룡도 됐다가 엄마 얼굴이 되는 것도 모른 채 아이들의 염색 놀음은 계속되고, 그 아이들 뒤에서, 헐렁한 면티만 걸친 초로의 친환경 신부, 정홍규 아우구스티노가 웃고 있다.
가톨릭 환경운동의 큰 산
정홍규(53)는 신부다. 광주가톨릭대학교를 졸업한 후 사제 서품을 받고, 대구 월배성당·상인성당·고산성당을 거쳐 지금은 경산성당에서 사목 활동을 하고 있는 신부다. 하지만 ‘신부’라는 직함만으로는 그를 온전히 담아내기에 부족하거나 또는 그의 정체를 제대로 표현하는 데 왼고개가 틀린다. 그는 환경운동가이기도 하고, 교육자이기도 하고, 농학자이기도 하다(사실 ‘전원생활’에서 그를 만난 이유도 신부 정홍규보다는 환경운동가 정홍규를 조명해보기 위해서다).
대구 지역에서 정홍규는 종교계 환경운동의 큰 산이다. 그가 시작한 생태적 평화운동인 ‘푸른평화’는 대구 지역사회에 환경운동의 불을 지폈다. 그는 성당에서 미사 집전하는 것 외에 시대의 공기 속으로도 걸어들어갔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종교인으로서 시대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기도 했다. 1980년대가 민주화운동기였다면 1990년대는 환경이 중요한 화두로 떠오른 시기였다. 일찍이 가톨릭 농민운동에 발을 담그며 환경 문제에 눈을 뜬 정홍규는 1990년, 평화와 생명은 결국 우주적 창조 질서에 충실한 건강한 환경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깨닫고, 생태학적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 ‘푸른평화’ 운동을 제창했다.
물론 초기에는 농산물 직거래, 저공해 세제 만들기, 우유팩 모으기 등 사안별로 그때그때 필요한 일들을 해나가는 ‘케이스 바이 케이스’식 운동이었다. 그런데 1991년 대구 지역에 페놀 사건(낙동강 수질오염 사건)이 터졌고, 그때부터 푸른평화 운동은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 환경 문제는 단편적으로 대처해나갈 문제가 아니라 심도 있게 조직화해야 할 과제였기에, 푸른평화 운동은 이후 생활협동조합, 친환경농업, 생태학교 등으로 범위를 확장하며 발전해나간다. “종교인이 뭔 환경운동이냐고들 하지만, 사실 종교와 환경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하느님은 농부’(요한복음)라고 했으며, 교리에도 하느님의 자연 질서를 지키는 것이 종교인의 소명이라고 나와 있어요.”
정홍규는 환경운동을 하기 위한 신학적 근거를 찾기 위해 2000년 미국 유학도 다녀왔다. 그때 만난 것이 힐데가르트였다. 힐데가르트는 12세기 독일의 여성 신학자이자 수녀로, 그 시대에 벌써 생태학적 영성을 중요시하고 인간을 환경과 연대해야 할 존재로 봤었다. 힐데가르트의 사상은 이후 그가 종교인으로서 환경운동에 매진하는 이론적 바탕이 됐다.
“종교적 근본주의가 시야를 가립디다”
정홍규의 푸른평화는 종교에서 근본으로 삼고 있는 평화를 생태학적으로 바라보자는 것이다. 곧 생태학적 평화운동이다. 또한 여기에는 모든 생명은 하나다, 만물은 동근同根이다, 세상에 살아 있는 것은 거룩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범신론적 사고가 바탕에 깔려 있다. 푸른평화는 생활협동조합이나 유기농 활동을 중심으로 대구·경북 지역에서 발을 넓혀나갔다. 전국화도 가능했지만 정홍규는 지역적 기반에 충실했다. 생협 운동이 알차게 꾸려지기 위해서는 지산지소(地産地消·신토불이와 같은 의미)여야 했기 때문이다. 현재 대구 시내에 생협 매장은 여섯 곳이 있으며 회원은 3000여 명으로, 회원 중에는 가톨릭 신자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다. 푸른평화는 범종파를 추구한다.
생협을 중심으로 한 웰빙운동이 전개되다 보니 성당에서 직거래장터, 재활용장터 등이 열리는 것은 당연한 일. 성당 마당에는 무·배추가 돌아다니고 우유팩이 쌓였다. 성당이 도떼기시장으로 변해가는 것을 보며, 성당 내부에서는 “구원과는 별개의 일에 신경 쓰지 말고 종교에 충실하라”는 목소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깔끔하고 고상한’ 신도들도 “정부에서 할 일을 왜 신부님이 나서냐”며 못마땅한 내색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정홍규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주류의 영성은 아니지만, 그는 이미 인간 중심의 가톨릭 구원관을 뭇 생명들에까지 확장시키고 있었다(그는 “십계명의 ‘살인하지 말라’보다는 불교의 ‘살생하지 말라’가 더 포괄적이고 옳다”고 말한다).
대구 인근의 사과밭에서 농약을 먹고 죽은 새들은 곧 사과의 죽음이자 인간의 죽음이었다. “종교적 근본주의가 시야를 가립디다. 죽어야 할 것은 고정관념과 낡은 질서인데도 말입니다. 여기에는 대구 지역의 보수성도 한몫합니다. 보수끼리는 통한다고 이 지역은 종교인들도 다분히 보수적이에요.” 대구에 푸른평화 운동이 자리를 잡고 ‘녹색평론’이라는 유수의 환경잡지가 나오고 있는 것도 이러한 지역적 폐쇄성과 보수성을 극복하고자 한 데에 기인하는 면이 없지 않다. 물론 그의 주변에는 반대하는 사람보다는 박수 치는 사람이 더 많다.
생활 속의 환경운동 외에 푸른평화 운동의 일환으로 그가 꾸준히, 성공적으로 전개하고 있는 것은 오산자연학교와 BMW농법 보급이다. 오산자연학교는 경북 영천시 화북면 오산리의 폐교를 임대해 꾸민 자연체험학습장으로, 점점 자연과 단절되어가는 아이들에게 회복의 장을 마련해주기 위해 2003년 개교했다. 생태유아교육이 중요한 까닭은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조기 체험이 평생의 코드가 되기 때문. 프로그램은 자연과의 소통, 우주 알기, 공작을 중심으로 짜여 있으며, 벌써 인근에 소문이 나 연간 5000명이 넘는 어린이들이 다녀간다. “일회성이 아닌 지속가능한 생태교육을 위해 내년부터 오산학교를 대안초등학교로 전환할 계획입니다.
자연 치유와 영성을 통해 아이들을 더불어 사는 맑고 푸른 참 세상의 주인으로 키우고 싶습니다. 물론 현재의 체험학교는 주말과 방학을 이용해 계속됩니다.” BMW농법은 박테리아(B), 미네랄(M), 물(W)을 이용하여 자연을 순환시키고 재활용하는 농법으로, 분뇨를 정화시켜 활성수로 만들어 다시 농사에 이용하는 것이다. 이 기술은 자연의 섭리를 과학적으로 이용한 것으로, 비료가 들어오며 분리된 축산(축산 분뇨)과 농사를 다시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사람도 웃고 소도 웃는’ 농법인 셈이다. 그는 1995년 일본에서 이 농법을 배워왔다.
햇빛이 하나의 초점으로 모여 종이를 태우듯
경주에서 나고 자란 정홍규는 어린 시절 절에 가는 것을 좋아하던 농민의 자식이었다. 그랬던 그가 ‘정적이지 않은 움직이는 세계관’을 찾아 개종을 결심하자 집안의 반대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장손에 독자였다. 하지만 누구도 그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고, 결국 그는 성사聖事를 집행하는 성직자가 됐다. 이런 전력 탓일까. 그는 종교의 벽을 허물고 있는 신부로도 유명하다. 그의 종교적 파격이 시작된 것은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때부터. 당시 그는 희생자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은적사 주지였던 허운 스님(현 동화사 주지)과 만나 장승굿을 준비했다. 가톨릭과 불교 모두 굿이라는 무속을 용납하지 않았지만, 희생자들의 종교를 다 아우를 수 있는 민속적 풍습으로 넋을 기리자는 데 뜻을 같이한 것이다.
그때 이후 두 사람은 석가탄신일과 성탄절 상호 방문, 양 종교 산사음악회, 성당에서의 108배, 산사 오페라 등 종교적 담을 넘나드는 만남을 계속했고, 상대방의 종교에도 넉넉한 마음 씀씀이를 보여주었다. 다이아몬드의 아름다움은 각 방향에서 볼 때 더욱 빛나듯, 갈등과 반목을 접고 벽을 허물어야 나의 새로운 아름다움도 보이는 까닭이다. 정홍규의 파격(“마땅히 해야 할 일이 어째서 파격이냐”며, 그는 이 말을 거부했다) 행동에 이번에도 종교 근본주의자들은 심하게 반발했다. 그들은 스님이 성당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았고 장승과 108배를 우상숭배로 몰아붙였다.
“타 종교를 받아들일 수 없는 편견의 고착이 더 우상숭배입니다. 지속가능한 미래 세계를 열어가기 위해서는, 햇빛이 하나의 초점으로 모여 종이를 태우듯 우리 종교인들도 모든 종파가 연대해서 한몫을 해야 합니다.” 친환경 신부로서 환경운동을 해온 지 15년. 그동안 그의 환경관도 많이 변했다. 초기의 활동이 운동 중심이자 사안별 대처였다면, 지금은 자발적 참여와 깨달음을 유도한다. 결국 환경운동도 풀뿌리 운동이다. 물질만능과 개발우선주의라는 고래등을 터지게 하는 것은 새우들의 자발적인 연대다.
소금 한 알 맑은 물 한 방울
시냇가로 몰려갔던 아이들이 돌아오는지, 논둑길을 따라오는 재잘거림이 탱자나무 울타리를 넘는 해거름 녘. 빨랫 줄에 걸린 아이들의 작품이 석양빛을 받아 단풍이 든 듯 빨개져 있다. 오늘 밤, 아이들은 저 황토 메리야스를 입고 고추에 노란 물이 들도록 곤한 잠을 잘 것이다. 신부로서는 높은 점수를 받지 못해서일까. 호두나무 아래 앉아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정홍규의 얼굴에 나뭇잎 그림자인 듯 잠시 그늘이 진다. 하지만 그는 종교인으로서 해야 할 시대적 소명을 다해 살아왔다. 그는 꼭 필요한 곳에 맛을 내는 소금 한 알이었고 탁한 세상의 맑은 물 한 방울이었다.
“이제 내가 걸어온 삶을 정리할 단계입니다. 많이 성숙해진 만큼 환경운동도 시민사회에 넘기고 성사를 집전하는 본당신부직도 후배들에게 넘긴 뒤, 이 학교로 들어와 아이들과 함께 살고 싶습니다. 학교 뒤꼍 텃밭 일구는 농부 신부로 살고 싶습니다.” 내년 이맘때쯤, 영천에서 안동 가는 35번 국도를 타고 오산자연학교 앞을 지나가는 사람이라면 헐렁한 면티 차림에 아이들과 함께 운동장을 뛰어다니는 인상 좋은 교장선생님을 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