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는 고 박두진 시인입니다.
조금 오래 된 글이라 벌써 문체에서 옛스런 느낌과 호흡이 긴 문장이 눈에 띱니다.
하면서도 잘 쓴 산문의 맛과 힘을 느끼게 합니다.
(퍼온곳: 글-[오두막집]까페 사진-[네이버 포토앨범])
시인과 농부를 겸할 수 없을까?
그렇게 빼어나게 산수가 고운 곳이 아니래도 좋다. 수목이나 무성하여, 봄, 가을, 여름, 겨울로 계절의 바뀜이 선명하게 감수되는 양지 바르고 조용한 산기슭이면 족하다. 이러한 곳에 나는 내 손으로 설계한 한 일여덟 간쯤의 간소한 집을 짓고, 내 힘으로 지을 만한 얼마쯤의 전지를 마련해서 시업과 농사를 겸한 생활을 해보고 싶다. 취미나 운치나 도피나 은둔의 일시적인 허영으로가 아니라, 좀 투철하게 이것이 내 천업이요 천직이니라 안분하고, 조그만치의 억지나 부자유·부자연이 없이 훨씬 편하고 건실하고, 즐거운 심정과 청신·발랄한 탄력있는 의욕으로서 시·농 일원살이를 해 보고 싶은 것이다.
내가 가 다루는 논밭의 거리는 주택에서 물론 가까워야 한다. 아침 저녁으로 잔 손이 많이 가야하는 밭 농지의 거리는 논보다도 더 가까운 바로 주택 울 안팎이면 더욱 좋다. 면적은 논이 댓 마지기, 밭이 한 7백평쯤ㅡ. 주택의 정원은 별다른 인공적인 설계 조작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연생 그대로의 수목을 주로 하되, 적어도 한 5백평은 안아들여야 한다. 높은 곳 산에서 내려오는 골짝 물을 그대로 졸졸대며 뜰안에 흐르게 하고, 음료로 쓰는 물도 그대로 생생하게 돌틈에서 쪼개낸다.
청대, 사철 같은 상록수를 산으로 심되, 월계, 넝쿨장미를 섞어서 올리고, 창 가까이는 모란, 풍, 목련, 석류 침향, 파초, 백합, 란 등을 심어 화단을 모으고, 울 안팎 혹은 밭두둑 일대로는 힘이 미치는 데까지 감, 능금, 포도, 수밀도 등의 과일을 심어 열게 하는 한편, 온 주택지대 일대에다가는 필요한 채소와 과목과 곡종이 심기는 외의 공백마다 온갖 일년생 잡화초를 깡그리 노가리로 뿌려서 제대로 어울려 일대 야생화원이 되게 한다. 밭에는 우선 채소로 무, 배추, 캐비지, 부루, 상치, 쑥갓, 시금치, 아욱, 파, 마늘, 오이, 호박, 가지, 고추를 비롯하여, 감자, 토마토, 고구마, 완두콩, 참외, 수박들을 심고, 잡곡으로 적두팥, 동부, 녹두, 대추밤콩, 참깨, 들깨, 수수, 차조들을 되도록 골고루 다채하게 가꿔 수확한다.
논농사로서는 보통 메벼뿐만 아니라, 인절미와 차시루떡을 해 먹는 찰벼 농사도 지어 낸다. 이렇게 해서, 나는 내 손으로 이마에 땀을 흘려 가꿔 거둔 소산물로 자급을 해가며 정결하고 검소한 불안이 없는 생활을 가져보고 싶은 것이다. 육축으로는 젖짜는 양을 두 마리쯤과 흰 산란용 닭을 열댓 마리 쳐서 알을 내먹고, 뒤안에는 꿀벌을 네댓 통 놓고 청밀을 따낸다. 이렇게 하자면, 어쩌면 내가 혼자로는 좀 너무 바쁠는지도 모르지만ㅡ. 아무튼 나는 누구누구들 가까운 친구들을 청해 와도 꼭 내가 심어 가꿔 거둔 이 자작 농산물로 대접하되, 아무개는 팥단주, 아무개는 무밀도 화채, 아무개는 감주, 아무개는 수정과로 이렇게 그 친구 친구의 즐기는 것을 주로 해서 장만해 내기로 한다.
또 온갖 할 수 있는 대로의 편리를 도모 제공하여 도시의 친구들이 며칠씩 와서 묵으며 글과 그림의 구상제작을 마음놓고 해갈 수 있도록 한다. 한편, 내가 쓰는 글은 시를 적어도 한달에 역작으로 두 편, 수필 수상이 서너 편 다른 창작과 연구론표를 두어 달 혹은 서너 달에 한 편 정도씩 쓰되, 특히 농사일이 한가한 추운 삼동은 꾸욱 들어앉아 창작에만 전력한다. 또 늦가을부터 이른 봄까지의 농한기에는 훌쩍 한두 번씩 저 부전고원이나 동해안 같은 곳으로 마음 맞는 친구들과 장거리 여행도 꾀해 본다.
그래서, 써서 발표하는 글들은 다 책이 될만큼 모여지면, 이내 척척 목곧하고 아담하게 책으로 만들어 출판이 되는 것을 즐거움으로 할 수 있도록 그렇게 순조롭게 되어지라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내 지금의 계획으로는 ㅡ계획이야 못할까ㅡ 적어도 내 저서로 시집이 세 권, 혹은 다섯 권, 단편집이 서너 권, 장편이 일곱 권, 수필·수상집이 각 서너너덧 권, 그 밖에 다른 원론류가 네댓권, 이렇게쯤은 내 생애에 가져보자는 것이다. 물론, 이것도 욕심껏 말하면 최소한도다. 그러자면, 나는 내가 글을 쓰는 것과 농사를 짓는 일을 병전하게 해나가되, 때로는 농사하는 재미에 취하고 골몰해서, 글 쓰는 일이 좀 등한해진대도 할 수가 없는 일이다.
또 그와 반대의 경우가 온대도 나는 어쩌는 수가 없다. 가령, 가다가 내 사색과 번민과 숙고와 몸부림이 실로 내 유일한 생의 의의를 보람짓는 내 문학의 전진과 성숙에 대한 명제의 것일 때, 나는 하룻밤 이틀밤을 전전하며 밝혀 새워 앓아도 좋은 것이다. 가다가 내가 내 시와 다른 새로운 창작에의 불붙은 의욕과 야심으로, 또는 피나는 각고와 팽팽한 긴장과 황홀한 무아의 경지에서, 혹은 무엇에 들린 것 같은 고도한 발열상태에서, 며칠 밤을 침식을 버리고 겨루어 낸 단을 어떠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해서, 내가 짓는 전토의 농작물이 그대로 며칠쯤 성해가는 김 속에서 묵어간다 한들 또한 어쩌랴, 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사노라면 자연 내가 홀로 별을 바라보는 시간, 기도를 드리는 시간, 시를 쓰는 시간, 묵상을 하는 시간, 화초와 농작물과 육축을 가꾸는 시간이, 또는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이 그렇게 끊은듯이 또박또박 따로따로 일 수가 없다. 그것은 실로 초라한대로나마 내 이 시생활은, 내 전자아와 내 전대상 ㅡ관객세계ㅡ와의 머리카락 하나만큼의 간극도 있을 수 없는, 지속적이요 긴장한 대결행위여야 하겠기 때문이다. 내게 감각·감수·체험되고, 내 세월 속에 투영되어 오는 온갖 필·우연·유·무의 식간의 계기와 사단과 사물들의 추이과정은, 아무리 거칠고 억세고 심각하고, 격렬하고, 또는 비근하고, 대수롭지 않은 뇌말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다 저절로 나대로의 한 개성, 나대로의한 활달한 한 사고범주 안에 잘 취사되고, 섭취·순화되고 비약되어야 하겠기 때문이다.
조화되고 통일되고 생명화된, 청신하고 오직 정신영양으로서 부단히 문학 위에 승화발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를 창작하고 농산물을 애지중지 가꿔 키움으로써, 어쩌면 나는 사랑으로 이 우주를 지으시고 역시 사랑으로 력으로 만물을 섭리·주재하시는 하느님의 놀라우신 은총의 사업에 가장 가까운 데서, 가장 생생하게 참여하여 찬양할 수 있는 그러한 분외의 특권과 기쁨까지를 누려볼 수가 있는 것이다. 땀을 흘리며 밭에 엎드려 일하다 쉬일 잠에 시원한 바람맞이 나무 그늘 밑에 앉아 도시, 혹은 다른 먼 뎃 친구로부터 보내온 다정하고 도톰한 편지를 받아서 뜯어보는 반가움이라든지, 잉크 냄새도 싱싱한 신간 문예물·잡지·단권책을 흙 묻는 손으로 받아 보는 그 맛은 지금 상상만 해 보아도 만족 이상의 것이다.
옥수수나 감자나 쪄다 놓고 먹으면서, 벌레 우는 여름밤을 마당에 깔아놓은 멍석에 누워 같은 농사를 하는 이웃 친구들, 혹은 노동들과 더불어 띄엄띄엄 소박한 얘기들로 구수한 별밤을 깊어가는 맛은 또 어떠한가? 냇물이 있으면 햇볕이 쨍쨍한 냇가에 나가 이들 농사하는 이웃친구나, 또는 멀리서 가끔씩 찾아와 주는 도시의 벗들과 더불어 잠방이 하나로만 훌훌 벗어버리고, - 엇! 피리 피리! - - 엇! 붕어 붕어! - 하고, 이리 닫고 저리 닫고 하며, 그물 밑이 목곧하도록 물고기를 몰아 서늘한 숲그늘에서 천렵놀이를 하는 맛도 또 어떨 것인가? - 시·농 일원살이…… 어쨌던 먼 인류의 첫 고향은 수목이요 들이다. 더구나 내가 자란 고향은 먼지와 모연과 기름때에 찌들은 도회 구석이 아니다. 하늘이 많고, 바람이 많고, 별이 많고, 나무가 많고, 물이 많고, 새들이 많고, 꽃이 많고, 풀벌레가 많은, 저 넓고 푸른 시골이었던 것이다. 숲이요, 벌판이요, 산골짜기요, 풀밭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나는 지금 무엇보다도 좀 조용한 기슭에 조용하게 자릴 잡고 나대로의 생각에 잠겨 살아가고 싶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일을 해보고 싶다. 손발이 툭툭 부르트도록 일을 해보고 싶다. 쩔쩔 끓는 들판에서 후끈후끈한 흙냄새에만 파묻혀 일해보고 싶다. (나는 보통 농사하는 기술과 노동을 감당할만한 강인한 체력을 가지고 있다.) 또, 나는 이러한 땀을 뻘뻘 흘리며 하는 노동일이 끝날 때마다의 다시없는 감미한 휴식의 시간을 맛보고 싶다. 앵ㅡ 하도록 고요해 오고, 맑아 오고, 아늑해 오고, 편해 오는 호수빛 환희 속에 잠겨 들어가 보고 싶다. 아리 오리 실톱만한 불안도 없는ㅡ. 내 생명, 내 정신, 내 생활, 내 대소의 환경, 주·객 일절의 세계의 불안에서 벗어나 보고 싶다.
그리하여, 저 쩡! 높고 넓고 맑고 빈, 천년을 억천년을 짙푸르기만한, 창궁과 같은 깊은 환아 속에 쉬어 가보고 싶다. 온갖 일절의 것을 포용하면서, 또 그것들에서 초연도 해 있는 저 푸른 창공과 같은 심경에 유적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