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반격일까
정희진 | 여성학자
출처 : 2018.05.15 [경향신문]
미투는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남성 사회의 반발이 곳곳에서 가시화되고 있다. 지하철에서 여성학 책을 읽는다고 봉변당한 여고생부터 “오해 받으니 여성을 멀리하겠다”는 ‘펜스룰’까지. 대개 이러한 현상을 반격(反擊·백래시)이라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
백래시(backlash)는 1970년대 미국에서 치열했던 여성운동과 진보세력을 몰아내고자, 정부와 미디어 등 사회 전반이 주도한 반동의 물결이었다. 이때 등장한 단어 중 하나가 ‘정치적으로 올바른(politically correct·PC)’인데, 당시 미국에서 냉소와 좌절의 용어였다면 한국에서 ‘PC’는 지향해야 할 가치로 사용되었다. 요컨대 상황이 다르다는 얘기다. 우리는 미국의 1970년대 같은 경험이 없으며, 레이건 정부는 안티페미니즘의 선봉장이었지만 우리 정부와 언론은, 특단의 대책은 없을망정, 미투에 우호적이다.
나를 포함한 여성주의 강사 두 명이, 얼마 전 모 대학 학생회로부터 인권 강의를 요청받았다. 그런데 해당 대학의 학생 204명이 그녀의 강연을 취소하지 않으면 학생회를 탄핵하겠다고 서명했고, 그보다 훨씬 많은 익명의 학생들은 강사의 ‘신상을 털고’ 혐오 발언을 쏟아냈다. 결국 학생회는 그 압력을 견디지 못했다(다행히 학내 여성주의 모임은 강연 취소에 항의하는 집회를 개최했다).
나는 그녀와 “연대한다”는 뜻에서 강연 거부를 통보했지만, 사실 나도 같은 처지이고 의욕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대학이 아닌가. 페미니즘은 인문학의 핵심이고, 학문과 사상의 자유라는 명분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지면에 담기엔 복잡한 논의지만, 만일 학교 당국이 홍준표씨를 특강 강사로 불렀다면 어땠을까. 학생들은 반대 시위를 했겠지만, 홍씨를 불렀다는 이유로 학생회 탄핵과 같은 누군가의 사퇴를 요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모 보수 정치인의 특강을 둘러싸고 학생들이 반발해 충돌한 적이 있었지만, 당시 학교 측은 강사의 신변 보호에 최선을 다했고 강연 취소를 요구한 학생들은 비난받았다.
얼마 전에는 ‘코뮌주의’를 내건 모 연구 공동체에서 성추행 사건이 발생, 관련 토론회가 열렸다. 흥미로운 사실은 토론회 분위기였다. 가해자와 조직을 옹호하는 이들은 억울한 듯 다소 흥분한 얼굴로 대화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반면, 피해자를 지원했던 여성들은 ‘쿨’했다. 이들은 토론회 내내 어이가 없다는 듯, 말이 안 통하는 이들과의 시간이 아깝다는 듯, 답답해했다.
대학생들의 여성주의 강연 저지는, 반격일까. 또한 이미 당사자 두 명이 모두 인정한 사안에 대해 들뢰즈와 데리다, 칸트를 인용해가며 “우리는 문해력이 뛰어난 집단인데, 우리가 못 알아들었으니 당신들이 틀렸다는 증거”라고 ‘논증’하는 이 조직의 행위는, 과연, 반격일까.
한국 사회의 일부 진보 진영이 크게 오해하고 있는 개념 중의 하나가 ‘대화’와 ‘폭력’이다. 이들은 대화와 폭력을 대립시키면서, 자신을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민주주의 세력으로 자칭한다. 노! 민주주의는 폭력 대신 대화를 하자는 주장이 아니다. 삶에서 대화로 해결되는 문제는 거의 없다. 평화학자 신시아 인로는 “완벽한 대화는 군대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했다. 합의 가능한 대화는 명령뿐이라는 얘기다.
‘을’은, ‘갑’과 말이 안 통하는 일상을 산다. 대화가 안되기 때문에 저항하는(‘폭력을 쓰는’) 것이다. 위 공동체도 일부 여성 회원이 남성과의 대화에 절망하여 탈퇴했는데, 남성은 “왜 우리 몰래 토론회를 개최하느냐”는 말을 반복했다. 모두가 동등한 관계에서 같은 언어로 대화할 수 있다면, 유토피아다.
민주주의는 대화의 조건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언제 끝날지 모른다. 대화를 쉽게 생각하는 이들은 권력자들이다. 그들은 글로벌 시대 미국인처럼 자기 언어가 보편적이라고 믿는다. 남성 중심적인 인식과 용어는 ‘영어’보다 훨씬 오래되었다. ‘남성’ ‘백인’ ‘이성애자’들은 ‘여성’ ‘유색인’ ‘동성애자’와의 관계에서 자신의 통념을 의심하지 않는다.
지금 남성들의 미투 운동에 대한 반감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목소리’에 대한 불안, 당황, 겁먹은 심정의 산물이 아닐까. 백래시? 반격하려면, 논리가 있어야 한다. 자기 논리가 아니라 상대방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해야 한다. 이들은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오래된 관행과 IT의 익명성에 의존한다. 한국 남성들은 새로운 무지의 시대의 주인공이 되었고, 남성의 심기에 민감한 미디어는 이들의 퇴행을 “반격”으로 과대평가하고 있다.
자신의 ‘환상’ 탓에 상처받은 남자들
최태섭 문화비평가 <잉여사회> 저자
출처: 2018년 5월 23일 <경향신문>
남자들의 반격(Backlash)이 과격화되고 있다. 5월19일 혜화동 시위에 가서 여자들에게 염산을 투척하겠다는 게시물(실제로 일어나지는 않았다)이 여러 건 올라왔고, 일베의 몇몇 유저가 시위를 훼방 놓으러 갔다가 연행되기도 했다. 요즘 온라인에서는 ‘페미를 다 죽여버리고 싶다’는 댓글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심지어는 지난주 한 유튜버가 폭로한 사진계 성폭력 사건 수사청원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한 여자연예인의 사형을 요구하는 경악스러운 청원이 올라오기까지 했다.
여자들의 분노를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하지만 남자들은 왜 이렇게까지 화가 났을까? 그간 누려왔던 가부장제적 특권이 공격받는다는 위기의식의 발로일까? 하지만 그런 ‘이성적’인 계산속을 찾아보기도 어렵다. 그야말로 ‘뭐가 문젠지 울지 말고 똑바로 말해보라’고 얘기해야 할 지경이다. 이들은 대체 무엇으로부터 이렇게 상처를 받은 것일까?
어쩌면 ‘문제’가 일어나고 있는 곳은 좀 더 깊은 곳일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한국의 ‘일부’ 남자들이 내뱉고 있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들이 그들이 가지고 있던 ‘환상’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야기는 진부하지만 엄연한 현실로부터 시작된다. 여자와 남자를 불문하고 모든 청년들의 삶이 근 10년간 지속적으로 나빠지고 있다는 것은 사회적 사실이다. 여전히 믿기 어렵다면 청년임대주택이나 대학 기숙사를 자신들의 이익(땅값과 임대료)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반대하고 있는 건물주들이나, 지역 SOC 예산을 900억원가량 증액하고 청년 관련 예산 1000억원을 삭감한 국회를 보면 될 것이다.
당연히 청년들의 삶은 궁핍해지고, 그들의 필요와 욕망 역시 많은 제약 속에 놓이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젠더질서의 불균형이 성별에 따라 대응방식을 갈라놓았다. 남자들은 ‘여자 탓’을 하며 자신들의 분노를 해소했고, 여자를 성욕해소를 위한 물건처럼 여김으로써 욕망을 해소했으며, 아직은 오지 않았지만 언젠가 열심히 살아온 나에게 주어질 ‘조신하고, 살림 잘하고, 내 부모님께 효도하고, 나를 떠받들어 주면서, 맞벌이도 해줄 개념녀’를 꿈꾸며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간직했다. 반면 여자들은 우울함에 빠져드는 와중에도 자력생존을 위해 노력했고, 변화를 위해 싸웠으며, 없는 가운데서도 서로를 도우려 했다. 여자들이 차근차근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미래를 모색하는 동안, 남자들은 오로지 자신들이 멋대로 만들어놓은 환상 속의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들을 비난하고, 추행하고, 의존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2015년부터 터져나온 여자들의 분노는 이런 남자들의 환상을 심대하게 위협하고 있다. 때리면 맞기만 하는 줄 알았던 김치녀들에게 나를 상처 입힐 수 있는 힘이 있었다는 것, 불법촬영물 속의 벗은 몸들과 예쁘게 웃기만 하던 여자아이돌에게도 인격이 존재한다는 것, 나를 구질구질한 삶에서 구해줄 것이라 막연히 여기던 여자들은 세상의 불공평함을 모르는 순진한 바보가 아니며, 그런 게임에 놀아날 생각도 없다는 것. 그러므로 남자들의 사회인식과, 포르노와, 미래계획 속의 여자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자꾸 일깨우려 하는 것이다.
그것이 모두 인간이라는 사실, 그들과 눈이 마주칠 수 있고 그들 또한 나를 바라본다는 사실이 남자들에게는 공포가 되었다. 남자들은 이 환상의 여자들을 자신의 궁핍과 어려움에 대한 모종의 보상이자 권리처럼 여겨왔다. 그리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환상을 만들고, 키우고, 공유하며 낄낄거렸다. 나의 힘듦을 알리바이 삼아서, 나보다 더 힘든 처지에 놓인 이들의 얼굴을 외면하고 착취했다.
그리고 오늘 남자들이 받아보고 있는 것은 그 행동들에 대한 인간성의 정산서다. 시간이 지날수록 인간으로서 물어야 할 죗값의 크기는 커질 것이다. 단언컨대, 어떤 협박이나 폭력도 여자들의 눈을 감게 할 수 없다. 응분의 대가를 치르고 다시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하거나, 혹은 환상의 세계와 함께 멸망하거나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한다. 이미 너무 늦지 않았기만을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