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없이 민주주의 없다
오수경 자유 기고가
출처 : 2018년 6월 8일 [경향신문]
요즘 여성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놀이가 있다. ‘개시건방진’ 표정으로 사진 찍기. ‘인권변호사’로 알려진 어느 변호사가 이번 지방선거에 출마한 신지예 서울시장 녹색당 후보의 벽보 사진에 관해 ‘개시건방진’ ‘나도 찢어버리고 싶은 벽보’ 등의 거친 표현이 담긴 글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게시한 것이 발단이다. 비판이 거세지자 그는 사과했다.
우선 ‘개시건방진’이라는 단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단어는 주로 윗사람이 아랫사람의 언행을 평가할 때 쓴다. 신지예 후보는 정당한 절차를 거쳐 후보에 등록한 ‘공인’이다. 변호사의 사회적 지위가 어찌 되는지 잘 모르지만, 그가 막말을 해도 되는 대상은 아니란 말이다. 그는 왜 그랬을까? 그에게 신지예 후보가 아랫사람이라도 되는 걸까? 아니면 1990년생, 페미니스트, 여성 후보의 ‘자신감 있는’ 표정은 중년 남성에게 ‘개시건방진’ 표정으로 자동번역이라도 되는 걸까? 그다음 주목할 단어는 ‘찢어버리고 싶은 벽보’ 앞에 붙은 ‘나도’이다. 단지 그만 그런 생각을 한 게 아니란 뜻이다.
과연 ‘찢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실천한 사람들이 있었다. 신지예 후보의 선거 벽보와 현수막이 훼손된 것이다. 물론 후보의 홍보물이 훼손된 경우는 선거 때마다 있었다. 그러나 신지예 후보의 경우는 다르다. 유난히 페미니스트라는 글자 주변, 후보 얼굴 부분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여성과 성소수자 등 그동안 사회적으로 배제되었던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페미니스트 서울시장’이 되겠다고 출마한 젊은 여성 정치인을 향한 편견과 혐오가 ‘개시건방진’이라는 말과 ‘벽보 훼손’이라는 행위의 동력이 된 것이다. ‘페미니스트 대통령’을 자임한 대통령을 가진 2018년의 한국 사회에서 말이다.
한국 사회의 정치는 명백히 ‘중년 남성’의 것이다. 이번 선거에 나선 후보자들 성비만 봐도 그렇다. 더불어민주당이 발표한 17개 전국 시·도지사 후보에 여성은 없다. 1995년부터 지금까지 여섯 번의 지방선거를 치르는 동안 광역단체장으로 선출된 여성도 없다. 선거 때마다 여성이 불려나오기는 한다. 후보의 아내와 딸, 혹은 꽃으로서 말이다. 3선에 도전하는 최문순 강원도지사는 딸의 유세 일정을 소개하며 “강원 안구 복지 타임”이라고 표현했다. 김문수 자유한국당 서울시장 후보는 도시를 “매일 씻고 다듬고 피트니스도 해야 하는” 여성에 비유했다. 여성이 정치 생태계에 존재하는 ‘그림’이란, 고작 이 정도인 것이다. ‘중년 남성’ 정치를 위해 여성을 필요로 하지만, 생각하고 말하고 설치는 주체적 여성은 혐오하며 배제하는 정치 말이다.
선거는 이기는 게 중요하지만 어떤 사회를 지향할 것인가에 관해 상상력을 펼쳐볼 기회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페미니스트’를 자임한 젊은 여성 후보를 향한 마타도어나 아내와 딸, 혹은 꽃으로서 여성을 아무 문제의식 없이 활용하는 정치는 분명 퇴행이다. 그런 구태 정치를 박살내기 위해 젊은 여성 후보들이 나섰다.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를 향한 혐오는 정치가 아니다. ‘Girls Can Do Anything’이라는 구호는 정치라고 예외일 수 없다. ‘페미니즘 없이 민주주의 없다’는 말은 우리 사회의 보편 상식이 되어야 한다.
이번 선거에서 활약하는 젊은 여성 정치인들의 의미에 관해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은 이렇게 응원했다. “최소한 우리 모두가 역사적인 첫걸음을 떼었다. 여자라는 이름으로, 자연이라는 이름으로 짓밟히고 차별받는 시대를 종식시키겠다는 선언의 첫걸음을 떼었다는 기록을 남겼으면 좋겠고, 우리 국민들과 함께 그것을 공감하는 인식의 확산이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이 말은 전국에서 분투하고 있을 여성 정치인들의 선언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비로소 이렇게 멋있는 여성 정치인들을 갖게 되었다. 이것이 이번 선거에서 거의 유일하게 만나는 ‘사회적 상상력’이다.
그 포스터에 광분한 이유
박권일사회비평가
출처: 2018년 6월 8일 [한겨레]
“1920년대 이른바 계몽주의 모더니즘 여성 삘이 나는 아주 더러운 사진을 본다. 개시건방진. 나도 찢어버리고 싶은 벽보다. 그만하자. 니들하고는.”
녹색당 서울시장 후보 신지예씨 포스터를 두고 변호사 박훈씨는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다. 글을 보는 순간 위화감이 엄습했다. 그 격렬한 반감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평소 박훈 변호사는 진보 성향 인사로 알려졌기에 더 의아했다. 그는 나중에 ‘사과문’을 올렸지만 내 의문은 전혀 해소되지 않았다. “나도”라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 반감을 드러낸 사람은 박 변호사만이 아니었다. 신지예 후보의 포스터는 서울 시내 곳곳에서, 특히 강남에서 숱하게 찢겨나갔다. 무엇이 그들의 ‘버튼’을 눌렀을까? 저 집단적 반감의 심층에 도사린 멘탈리티는 무엇일까?
가장 쉬운 대답은 “페미니스트 서울시장”이라는 문구다. 페미니스트라고 하면 일단 손사래 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벽보를 찢은 사람들 중 일부는 정말로 ‘페미니스트’라는 말이 싫어 그런 짓을 했을 수 있다. 하지만 박훈 같은 이의 반응은 설명되지 않는다. 그는 페미니즘의 대의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시건방”지다고 했다. 요컨대 그는 텍스트로 된 메시지, 공약 따위에 반응한 것이 아니다. 포스터 속 후보의 이미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선거 벽보를 훼손한 사람 일부도 어쩌면 같은 이유에서 그런 행동을 했을지 모른다. 이제 논의는 도상학적 차원으로 넘어간다.
신지예 후보 사진, 한눈에도 평범하진 않다. 인자하고 온화한 표정을 연출하려 발버둥 치는 여타 후보들과 전혀 다르다. 쇼트커트 머리에 단정한 흰색 셔츠를 입었는데 몸은 정면을 향한다기보다 옆을 향했다. 고개를 틀어 정면 쪽으로 돌렸지만 글자 그대로 살짝 틀었을 뿐이라서, 나란히 서서 걸어가는 친구를 흘깃 보는 느낌이다. 웃고 있으나 해사한 웃음이라기보다 자신만만한 미소에 가깝다. 여성 후보 사진의 경우 안경을 쓰지 않는 경향이 있지만, 신 후보는 사각 형상의 금속테 안경을 썼다.
박 변호사가 말한 “1920년대 이른바 계몽주의 모더니즘 여성 삘”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는 없다. 짐작하건대 소위 ‘모단걸’(毛斷girl, modern girl)을 가리킨 게 아닐까 싶다. 머리를 짧게 자른, 현대적 사고방식과 라이프스타일을 지향했던 여성들. 그러고 보니 100년 전 경성의 신여성들이 이랬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그게 어쨌단 말인가? 그것이 “아주 더러운 사진”이란 소릴 들어야 할 이유라도 되는가?
신지예 녹색당 서울시장 후보 포스터
반감의 기저에 도사린 핵심은 결국 권위주의 아닐까. 이를테면 이런 것. “공손히 한 표 달라 해도 줄까 말까인데, 어디 나이도 어린 계집애가 감히 되바라지게!” 그 멘탈리티는 오랫동안 당연시되어온 ‘정치인 머슴론’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정치인은 머슴이다’라는 말이 종종 국민 주권론처럼 포장되곤 하지만, 사실 민주주의의 본질과 가장 동떨어진 사고방식이다. ‘정치인 머슴론’은 후보의 배우자가 목욕탕에서 유권자들 때 밀어주는 일을 아름다운 미담으로 만들고, ‘적어도 선거 기간에는 유권자가 왕’이라는 식의 왜곡된 보상심리의 원천이 되었다.
‘정치인 머슴론’은 평등한 참여의 장이어야 할 정치를 엘리트의 희생과 보답 서사로 환원하고, 결국은 갑질과 냉소의 악순환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정치인은 머슴이나 노예가 아니며 그래서도 안 된다. 정치인은 시민의 대표이지만 어디까지나 동등한 시민으로서 그러한 것이다. 신지예 후보의 사진을 “시건방”으로 봐선 안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는 신 후보가 청년·여성 후보이니 더 관대하게 봐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서울시장에게 기대되는 역량이나 미덕을 신 후보가 지니고 있는지 여부는 따로 따져볼 문제이며, 후보와 정당이 온전히 감당해야 할 몫이다. 만약 후보의 정책이나 행보에서 궁금한 점이 있다면 얼마든지 질문할 수 있다. 비판하고 싶다면 논점 제대로 잡아 비판하면 된다. 단, 동료 시민으로서의 존중을 담아서. 주관적 인상에 근거해 정치인을 폄하하는 습속은 우리 정치담론을 캐릭터 품평으로 납작하게 짜부라뜨려왔다.
지금 신지예 후보를 향한 쏟아지는 말과 행동 상당수는 그저 폭력이고 갑질일 뿐이다. 서로 시민적 예의를 지키자. 그 태도가 민주주의의 출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