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의는 당신의 무지를 먹고 자란다
이나영 | 중앙대 교수·사회학
출처 : 2018년 5월 27일 <경향신문>
한국 사회에서 남자로 태어나 남자로 자라 남자로 살면서 남자라고 호명되지도 않는 선생님께. 제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일이 많아 몇 가지 질문 드리고자 합니다.
한 대학 미술대 수업에서 동료 남성 모델의 사진을 찍어 유포한 혐의로 20대 여성이 긴급 체포됩니다. 여성 가해자는 연쇄살인범이나 연쇄강간범, 혹은 나라를 뒤흔들 만큼 높으신 나리들이나 서는 그 포토라인에서 기자들의 사진세례와 질문에 시달립니다. 그의 신상은 온갖 남성 커뮤니티에서 까발려지고, 사진이 유포되었다는 여성 커뮤니티는 ‘남성혐오’의 대명사로 부각되며 악마화됩니다.
선생님, 저는 ‘도촬’ 행위 가해자가 그렇게 신속하게 체포되고 포토라인에 섰다는 뉴스를 본 적이 없습니다. ‘소라넷’이라는 극악무도한 남성포르노 사이트는 형식상 없어지는 데도 17년이 걸렸습니다. 그나마 여성운동 덕분이었지요. 여성이 가해자가 되면 포털 사이트를 장식하고, 남성이 가해자가 되면 피해자 여성들만 포르노로 소비되며, 세대불문, 이념불문 자행되고 있는 성차별적 언행과 제도들은 ‘여성혐오’로 인지조차 되지 않는 대한민국에서 여성은 진정 동등한 시민인가요?
비공개 모델 촬영장에서 성폭력이 발생하고, 당사자 여성의 동의 없이 유출된 사진은 남성들의 유희거리가 됩니다. 피해자는 위험을 무릅쓰고 신상을 공개하며 범죄자 처벌을 호소합니다. 그러자 피해자의 이름은 각종 포르노 사이트, 남초 사이트에서 실시간 검색 순위에 오르고 범죄결과물과 당사자는 다시 남성욕망의 제물이 됩니다. 심지어 몇 가지 어긋나는 사건 정황을 빌미로 피해자는 ‘거짓말쟁이’ ‘무고녀’로 몰리고 촬영장의 성폭력과 사진 유출·배포라는 중대한 범죄행위는 희미해집니다.
어떤 사건에서 순도 100%의 ‘피해자다움’이, 수사와 처벌을 요구할 피해자의 ‘자격’이 범죄사실 여부를 판단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는지요? 신상을 드러내면 드러내서, 드러내지 않으면 드러내지 않는다고 각종 의심과 비난을 오롯이 피해자가 감내해야 하는 대한민국에서 여성은 진정 존중받는 시민인가요?
선생님, 저는 진심으로 궁금합니다. 밤거리에 주차된 차창에 꽂혀 있거나 선생님이 흔하게 밟고 지나가던 사진의 여성들이 과연 누구인지 생각해 보셨는지요? 알 수도 없는 세월 동안 명멸과 증식을 반복하며 누구나 다 아는 남성문화로 자리 잡은 ‘야동’에 등장하는 여성들, 스마트폰만 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녀 시리즈, ○○노출사진 시리즈에 등장하는 여성들, 주문까지 받아 교도소 남성 재소자들에게 넣어 줬다는 사진첩에 나오는 그 여성들은 가공인물일까요?
어떤 과정을 거쳐 촬영되었고, 당사자가 어떤 고통을 받았을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셨는지요? 강압적 상황에서 촬영되었거나 불법 촬영물이거나 비동의 유출물일 것이라는 생각은 해보셨는지요? 선생님이 보고 즐기고 공유하고 당연하게 생각하면 할수록 더 많은 여성 피해자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단 한번이라도 생각해 보셨는지요?
이런 상황에서 선생님은 낙태죄 유지 옹호를 위해 변론장을 제출하고, 임신중단이 “성교는 하되 그에 따른 결과인 임신 및 출산은 원하지 않는” ‘성적으로 방종’한 여자들의 문제라고 하셨지요.
“강간 등의 사유를 제외한 자의에 의한 성교는 응당 임신에 대한 미필적 인식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신 선생님의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피임을 하지 않거나 거부하는 남성들은 물론 출산을 전제하지 않은 모든 남성들의 성행위 또한 마땅히 규제 대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원하지 않는 성관계를 하고, 예상치 못한 임신을 하며, 건강상 심각한 손상을 입고 삶을 위협당하며, 그럼에도 갈등하고 번민하고 죄책감마저 느끼면서 최종 판단을 유보하게 되는지 아시는지요? 성관계, 임신, 출산, 육아와 낙태의 책임까지 전적으로 여성들이 져야 한다는 사고가 너무 자연스럽고 정당하다고 여겨지는 대한민국은 진정 여성에게도 공정한 나라인가요?
선생님이 끔찍한 가해 행위로부터는 자신들의 일상적 행위를 분리하면서, 가해자에 대한 동일시와 자기연민의 서사로 남성연대를 공고히 할 때, 여성들은 묻습니다. 성적 대상 혹은 자궁으로만 환원되는 대한민국 여성은 온전한 인간, 존중받는 시민, 평등한 노동자, 동등한 동료인가요? 시공간과 관계를 불문하고 두려움, 공포, 불안감, 압박감, 절망, 좌절, 슬픔을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여성들, 그래서 분노하고 연대하고 행동하는 여성들에게 더 이상 사회성이 부족한, 예민한, 드센, 나대는, 이기적인, 미친, 심지어 ‘메갈’이라 낙인찍으며 재갈을 물리고, 다시 자기 자리로 끌어내리려 윽박지르지 마세요. 여성들은 단순한 자리바꿈, 구색 맞추기식 끼워넣기가 아니라 불평등한 자원배분과 불균등한 가치배분, 불공정한 참여방식의 근본적인 변혁을 원합니다.
무지는 자랑이나 특권이 아닙니다. 부정의의 근본적 원동력입니다.